35. 김성근 대감의 전생 이야기
김성근(金聲根, 1835~1919) 대감은 조선 말기 고종 황제 시절 이름이 높았던 제상으로, 판서 김송간(判書 金松澗) 씨의 둘째 아들이다.
김송간은 꿈에 큰 바위가 집 가운데 날아드는 꿈을 꾸었고, 태기가 있어 열한 달 만에 김성근 대감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김성근 대감은 생전에 몸에서 70과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며, 말년에는 참선을 많이 하다가 돌아가신 후 본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였는데, 사리가 많이 출현하여 봉익동 대각교당의 백용성 큰스님께 모셔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김성근 대감은 용성대선사와 가장 친밀한 사이였으며, 글씨 또한 명필로 알려져 각 사원에 현판과 주련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돌아가신 지 100여 년이 지났음에도 김성근 대감에 관한 이러한 사연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원암산 원등사(遠岩山 遠燈寺) 옆 석굴법당(石窟法堂) 아라한전(阿羅漢殿) 탁자 한쪽에는 석함(石龕)이 있었는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석함은 전라감사가 뚜껑을 열어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전라감사로 부임하면 그 속의 비밀을 알기 위해 꼭 한 번씩 와서 열어보려 했으나 열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성근 대감이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 이야기를 듣고 “에라, 나도 한번 가서 열어보자”
하여 원등사로 갔다.
생전 처음 가는 길임에도 좌우 산천과 길이 익숙하게 느껴졌고, 원등사에 도착하여 주지 스님을 만났는데 얼굴이 익숙하여 부모나 형제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안내를 받아 아라한전 석함이 있는 곳으로 가서 뚜껑을 열어보니 쉽게 열렸다.
석함 안을 살펴보니 다른 물건은 없고, 다만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는데 펼쳐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갑오년 전에는 해봉이란 스님이었고, 갑오년 뒤에는 김성근(甲午年前海峰僧 甲午年後金聲根)>
이 글을 보고 김성근 대감이 전생에 원등사에서 스님 노릇을 한 수도인이었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불교에서는 잡념을 쉬고 선정력을 길러 영식(靈識)이 맑아지면 전생과 내생의 일을 환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김성근 대감에 관한 이런 글들도 전해지고 있다.
(遠岩山上一輪月 影墮都城作宰身 甲午年前海峰僧 甲午年後金聲根)
원암산 위에 둥근 달 그림자가 장안에 떨어져 재상의 몸을 받았다.
<갑오년 전에는 해봉이란 스님이었는데, 그가 갑오년 뒤에는 김성근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글도 있다.
(昔年曾遊遠岩山 誤落漢城作宰身 甲午以前海峰僧 甲午以後金聲根)
옛날에 원암산을 거닐었으나 잘못하여 한성에 떨어져 재상이 되었다.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 스님이었고,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이 되었다는 뜻이다.>
김성근 대감의 호를 ‘해사(海士)’라고 한 것도 전생의 해봉(海峰)이라는 ‘해(海)’ 자와 금생의 유사(儒士)라는 ‘사(士)’ 자를 합한 것이라고 한다.
근세에 김성근 대감의 전생 이야기는 유불 양간에 걸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한 ‘전생에 같던 곳에는 후신도 간다’는 유연지(有緣地)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로, 전생인 해봉 스님도 명필로서 선산 도리사(桃李寺)에 초빙되어 도리사 사적기를 썼다.
해봉 스님이 썼다고 하여 사적기 책 이름을 ‘해봉집(海峰集)’이라 한다.
후신인 김성근 대감도 명필로서 말년에 도리사가 전국 선원 중 으뜸이라는 평을 듣고 도리사에 방문하여, 도리사 스님들의 청으로 태조선원(太祖禪院) 현판과 주련을 썼으며, 이 글씨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전생인 해봉 스님은 사적기를 썼고, 후신인 김성근 대감은 현판과 주련을 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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