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34. 윤웅열 대감의 삼생일(三生事)  


 이씨 왕조 말, 광무 7년 계묘춘(光武七年 癸卯春 = 1903년)에 당시 군부대신 윤웅열(尹雄烈) 대감께서 아들 윤치호(尹致昊)와 가족, 그리고 호위병 10여 명을 데리고 석왕사(釋王寺)에 와서 수군당(壽君堂)에 머물렀다. 
그 이튿날 아침 공양 후 산중 승려들을 모두 모아 한 백 년 전후에 해파당 여순(海波堂 與淳)이라는 대사의 권속이나 그의 행적을 아는 이가 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대감은 매우 답답해하였다.  
군부대신 윤웅열 대감께서 왜 이토록 해파당 여순의 행적을 알고 싶어 했을까?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말 고종 황제 시절 조정에서는 대원군과 민중전 구부 사이에 권력 다툼이 한창일 때, 윤웅열 대감은 남의 참소를 받아 전라도 완도 섬으로 정배되었다. 
완도에서 3년간 머무르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느 날, 몸종 상노가 이웃 집 명두가 점을 치는데 백발백중이라 온 동네 사람들이 법석을 떤다는 말을 듣고, 미신임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시험 삼아 점을 보러 가기로 했다. 
점을 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명두라는 이는 공중에서 음성만 들려준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하여 여기 와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영감님은 서울 사람으로 여기로 귀향을 왔소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언제 풀려나가겠는가?”라고 묻자, “별 죄가 없으니 한 보름만 있으면 해배문자가 올 것입니다.”라고 하여, 정말일까 하고 다짐하니 “나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윤치호 씨에 대해 “내 아들이 있는데, 자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니, “내가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하며 흡—하는 소리와 함께 나갔다가 한참 후 돌아와 “영감 자제가 미국 수도에 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국에서 유학 온 청국 여자와 약혼하여 내년 가을 상해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며, 얼마 안 되어 부자 상봉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그것은 미래의 일이라 당해보면 알겠지만, 내가 전생에 무엇이었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예, 내가 어딜 가보고 오겠습니다.”  
하더니 한참 후 돌아와 “영감은 전생에 스님 노릇을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어디서 스님 노릇을 했는가?”  
하니, “함경도 안변 석왕사에서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이름은 아는가?”  
하니, “법호는 해파당(海波堂), 법명은 여순(與淳)입니다.”라고 했다.  
“중노릇을 잘했는가?”  
하니, “영감께서는 형제가 모두 스님이 되어 수행을 잘하셨고, 그 다음에 중국에 가서 태어나 일품 대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두 번째는 우리 조선에 태어나 오복(五福)이 구족하여 얼마 안 가 대감(大監)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영감 형님은 중노릇을 아주 잘못하여 법전을 중수하고 개금불사를 하며 신도들의 많은 돈을 탕진해 사복을 채웠던 죄로 지옥에 들어가 고초를 받다가 인도(人道)에 수생(受生)하였으나 가난한 보살핌을 받아 지금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새 술막이라는 곳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두 손이 쪼막손인데 성명은 이경운(李景云)이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겠다고 점을 치고 그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그로부터 2주일 만에 해배문자가 왔고, 이듬해 가을에는 아들의 결혼식이 상해에서 열린다는 전보가 왔으며, 얼마 안 되어 부자 상봉을 하고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대신 직위에 올랐다. 
명두의 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맞았으나, 남은 석왕사 사건 두 가지를 알아보려 애썼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가족과 수행원을 데리고 승지 수양한다는 핑계로 상부에 주달(奏達)하고 석왕사에 와서 산중 원로 설하대사(元老 雪河大師)와 여러 승려들을 모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몹시 답답했다.  
그래서 뒷산에 올라 산양을 몰며 행적골 부근으로 노루를 몰아넣고, 그 이튿날 수행원을 데리고 행적골로 올라가 내원암 입구에서 잠시 쉬는데 마침 부도가 서 있었다. 
윤웅열 대감이 부도에 덮인 풀을 헤치고 보니 ‘해파당 여순(海波堂 與淳)’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나타났다.  
대감이 “치호야, 너 아이들 데리고 이리 오너라. 이 부도에 절을 하여라.”  
하니 윤치호 씨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절을 하였다. 
그러자 대감이 “이것 좀 보아라.”  
하며 협낭(挾囊)에서 십여 봉지의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해파당 여순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는 “이제 절로 가자. 이것을 찾으려고 온 것이지 성지에 사냥 온 것이 아니다.”  
하며 절로 내려와 다시 대중을 모으고 완도에서 점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니 모두 신기하게 여기며 탄복하였다.  
자, 이제는 강원도 통천으로 사람을 보내 볼 터이니 금택여관 주인 윤오(允旿)를 불러 사람을 구한 것이 유대방(劉大方)이라는 사람이었다. 
강원도 통천군 새 주막에서 술장사하는 이 경운이라는 사람은 두 손이 모두 조막손이라 찾기도 쉬울 터이니 빨리 가서 데리고 오너라 하니, 과연 사흘 만에 데리고 왔다. 
수행원이 대감께 절을 하라 하니 절은 그만두고 그저 앉으라고 한 뒤에 전생담을 이야기하며 살기가 곤란한 듯하니, 돈 백량과 백 목 열 필을 주는 것이니 돈은 두 내외 호구할 논이나 몇 두락 사고, 백목은 옷가지나 하여 입고,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은덕이니 과거사를 뉘우치고 이후부터는 염불을 많이 하여 죄장을 소멸하소. 그리고 무거운 것을 가져갈 수 없을 터이니 통천군수에게로 환전 표를 하여 주면서 가지고 가게 하니, 이 노인은 전생 동생이 금생 부모보다 낫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석왕사 대중을 불러놓고 내가 전생에 복을 닦은 사찰이라 엽전 이백량으로 미성을 표하는 것이니 작으나마 부처님 향촉비에 보태 달라 하고, 그 다음 날 서울로 환가하셨다고 한다. 


이 글은 『석왕사지』에서 초록한 것을 젊은 때에 본 것이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