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허정승과 애첩(愛妾)의 인연(因緣)
이조 숙종대왕(肅宗大王) 때 허정승(許政承, 성명 미상)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천하일색인 애첩(愛妾)을 데리고 살았는데, 그 여인의 성은 박씨였다.
허정승은 박씨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여 금슬(琴瑟)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어느 해 봄, 조정에서 여러 중신이 모여 일주일간(七日) 어전(御前)에서 중대한 회의를 하느라 허정승은 박씨와의 연정을 참을 수 없었으나 사택으로 나올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렇게 보고 싶던 박씨가 보이지 않았다.
노비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에 웬 숯장사가 숯을 팔러 와서 아씨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뒤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허정승은 아무리 박씨의 행방을 탐문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허탈해진 허정승은 정승직도 사임하고 박씨를 찾기 위해 천하강산을 주유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아무 산에 가면 도승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허정승은 그 말을 따라 찾아갔더니 과연 도승이 계셨다.
자신의 경과와 애타는 심정을 호소하자 도승이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알려면 참선(參禪)을 해야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정승이 “참선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도승은 답하기를, 우두마면(牛頭馬面) — “머리는 소머리인데 얼굴은 말 뺨이다”라는 화두(話頭)를 생각하며 이것이 무슨 뜻인지 항상 의심하라고 하였다.
허정승은 잃어버린 박씨가 보고 싶은 한 생각뿐인데 ‘우두마면’이 무엇인지 의심할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박씨를 만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 “스님, ‘우두마면’을 의심해도 박씨의 행방을 알 것 같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도승은 “그렇다면 ‘나무 관세음보살’ 일곱 자(七字)를 하루에 삼만(三萬) 번씩 부르며 마누라를 속히 찾게 해 달라고 축원하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허정승은 매일같이 ‘나무 관세음보살’을 삼만 번씩 외우며 박씨를 만나게 해 달라고 축원하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풀막을 짓고 공부하였다.
이렇게 삼 년(三年)이 지났는데 어느 날, 건너편 산길을 바라보니 숯섬을 지고 가는 남자 뒤에 어떤 여자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육감적으로 자기의 애첩이었던 박씨가 틀림없었다.
허정승은 빈 망태를 지고 달려가서 쫓아가 보니 남자는 분명 숯장사였고, 여자는 박씨가 분명했다.
그러나 박씨는 깡마르고 살집도 빠졌으며, 의복이 남루하여 눈으로 참아 볼 수가 없었다.
허정승은 박씨를 만나기 전에는 만약 만나기만 하면 애원하여 다시 데려다 살고 싶었으나, 막상 만나고 보니 모든 생각이 재처럼 사라지고 미련이 없었다.
숯장사 남자만이라도 없이 혼자 있는 것을 만났으면 무슨 대화라도 나누었겠지만, 흉악하게 못생긴 남자와 함께 사는 모습을 보니 더욱 정이 뚝 떨어졌다.
허정승과 숯장사 일행은 정면으로 마주쳐 길을 비키며 서로 얼굴을 보았다.
허정승은 여인을 알아보았으나 여자는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숯장사는 본래 허정승을 만나본 적이 없어 모르는 사이였지만, 여자는 허정승을 알아볼 만했으나 아주 모르는 척했다.
설사 안면이 익숙했더라도 부귀영화로 호화찬란하게 살던 허정승이 이 산중에서 채약하는 사람들과 함께 망태기를 걸머지고 있으니 더욱 알아볼 수 없었으리라.
허정승은 이 두 남녀를 보내고 바위 위에 앉아 ‘나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축원하였다.
“나무 관세음보살님! 숯장사와 나의 처지가 천양지간인데, 박씨가 나를 버리고 숯장사를 따라가 고생살이를 하면서도 태산준령을 넘나들며 숯장사에게 밥을 빌어 얻어 먹고, 집도 없이 허구한 날 따라다니며 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명상에 잠겼다가 잠이 살짝 들었는데, 관세음보살님이 몽중에 늙은 부인으로 나타나 일러주시기를,
“너는 전생에 열일곱 살 때 집이 가난하여 남의 고용살이를 할 때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수물거리는 이를 잡아 산에 던져버렸다.
그 이가 산돼지 몸에 가서 붙어 뜯어먹고 살다가 죽었다.
그 인연으로 금생에 와서 산돼지는 숯장사가 되었고, 그때 고용살이하던 너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공경하고 부처님을 신봉한 공덕으로 금생에 정승이 되었으며, 그 이는 박씨 부인이 되었다.
전생에 잠깐 네 몸에 붙어 뜯어먹은 인연으로 너의 애첩이 되었고, 네가 버린 뒤에는 산돼지 몸에 붙어 다니며 죽을 때까지 뜯어먹고 살았기에 너를 버리고 숯장사를 따라간 것이다.
그리 알고 모든 것을 잊고 불교 공부를 잘하여라.”
하였다.
허정승은 ‘범소유상(凡所有相)’이라, 이 세상에 머무는 모든 인연은 다 허망한 것임을 깊이 깨닫고 발심하여 출가하여 스님 노릇을 잘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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