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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법화경과 삼대(三代) 정승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高牙邑) 예강동(禮江洞) 앞산에는 ‘거류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 근처에는 조선 왕조 성종 대왕 때 영의정을 지낸 심회(沈澮)를 길러낸 강거민(康居敏) 부부의 묘가 있다. 
심회(沈澮)는 아버지 심온(沈溫)도 영의정을 지냈고, 할아버지 심덕부(沈德符)는 좌의정을 지낸 삼대 정승 가문 출신이다. 
또한 심온의 딸은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 왕후이다.  
영의정 심온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심온의 정적(政敵)인 당시 병조판서 박습(朴習)이 상왕인 태종에게 심온을 모함하였다. 
당시 태종 대왕은 아들인 세종 대왕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병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박습의 모함은 심온의 막내아우 시정(당시 병조 도총재 벼슬)이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온다”는 불만을 토로한 것이 병조판서 박습을 통해 태종의 귀에 들어갔고, 태종은 이를 괘심하게 여겨 심정을 국문(鞠問)하였다. 
불평분자의 수괴(首魁)로 심온이 지목되어,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심온은 압록강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 앞서 심온이 명나라로 갈 때 환송하는 시민이 거리에 넘쳤는데, 그의 인기가 너무 좋아 상왕이 이를 꺼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은 건국 초기로 왕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태종 자신도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에, 자신의 왕권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말은 가차 없이 제거하였다. 
형제까지 무차별 숙청한 태종으로서는 사돈인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아버지의 위태로운 상황을 눈치 챈 소헌 왕후는 사람을 압록강까지 보내어 아버지의 귀국을 만류하였으나, 심온은 “나는 일편단심으로 나라와 임금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을 뿐, 조금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라며 귀국을 감행하였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심온이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나이는 불과 44세였으며, 당시 대역죄인은 아들까지도 화가 미쳤기에, 심온이 죽을 때 세 살 난 아들 회(澮)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심온의 집안은 회(澮)를 유모에게 맡기고, 저고리 고름에 표찰을 붙여주었으며, 비단 보자기에 책 한 권을 고이 싸서 유모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 책은 불경으로, 선대 할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불경 중에서도 귀중한 법화경이다. 
우리 집은 대대로 가보로 모셔왔다. 
할머님과 어머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읽으셨고, 나 또한 선대 어른들을 본받아 오늘까지 소리 없이 수천 번 읽었다. 
이제 이 어린 회(澮)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나, 다행히 부처님과 조상의 덕분으로 신명을 보전하면 중전(소헌 왕후)이 계시니 가문을 회복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책을 잘 간직하였다가 회가 장성하면 전해주시오.”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옷깃을 적시고, 정처 없이 떠나도록 하였다.  
여기서 심온의 선대와 불교와의 인과관계를 잠시 살펴보겠다. 
고려 조정에서 위위시승(衛尉時丞) 벼슬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는 말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경상도 청기(靑己, 지금의 청송) 땅으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벼슬하던 분이 시골 청기에 와서 살고 있으니, 심홍부에게 청기군(靑己君)으로 봉하였다. 
이 당시 청기 고을에 지인(知印, 군수의 직인을 맡은 사람)의 형제가 공모하여 군수의 인장을 남용하는 일이 있었다.
국고 손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죄를 범한 "지인”형제를 합하여 13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하옥시키고 여죄를 추궁하여 장차 안동 도호부로 이송할 예정이었다. 
조사가 일단 마무리되었으므로, 내일 안동으로 호송하기로 작정한 그 밤에 청기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박하며 내일 호송될 13명에게 닥쳐올 운명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그것은 바로 참수형을 당하고, 그들의 머리가 성문 위에 높이 달아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청기군은 마음속으로 "인과응보"를 여러 번 되뇌었으나, 그들을 구제할 묘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첫닭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바로 그때, 전광석화처럼 청기군의 머리를 스쳤다. 
청기군은 일대 결심을 하고, 깊은 구렁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옥문 앞으로 달려가 옥사정을 멀리하고 옥안으로 들어가 열세 명의 중죄수를 모두 도망치게 하였다. 
참형 직전에 살아난 13명은 청기군에게 은혜를 갚을 것을 서로 맹세하고 헤어졌다. 
열세 사람 중 지인(知印)의 직책을 맡았던 형제 두 사람은 금강산 깊은 골에 들어가 산서(풍수학)를 공부하여 지리를 달통한 후, 생명의 은인을 찾아 청기 땅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청기군은 이미 세상을 떠나 말이 없었다.  
"지인”형제는 지금의 청송군 청송면 덕동 보광산 중턱에 묏자리를 정해놓고 상주에게 권(勸)하였다. 
상주는 산 끝에 험한 바위가 보인다고 거절하였으나, "지인“형제는 <바위는 장차 자연히 없어질 것이니 안장하도록 하시오>라고 극구 권하였으며, "지인”형제의 간청에 감복한 상주는 마음을 정하고 광중을 파내니 고등경경불멸(孤燈耿耿不滅, 외로운 등잔불이 거물거물하면서도 꺼지지 않는다는 뜻)의 여섯 글자가 쓰인 희미한 돌이 나왔다고 전한다. 
장례를 지낸 날 밤에 벼락이 쳐서 산 끝에 험하게 보이던 바위는 자취도 없이 부서졌다고도 전합니다. 
"지인”형제는 떠나면서 <삼대 후에 삼대 정승이 날 것이며, 저 앞에 현비암(賢批岩)이 비치니 왕비가 대대로 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 사백 칠십여 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진정 불국토 세계였다. 
연등회, 팔관회, 소제, 도량등 등 모든 불사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으며, 헌종대왕 때 거란병의 침입과 고종 때 몽고병의 침입으로 부인사 대장경과 황룡사 구층탑이 불탄 후 수십 년 동안 소실된 국보를 복구하기 위하여, 일면 전쟁, 일면 복구에 국민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정성을 불(佛)과 천(天, 신장님)께 바치고 곡식 한 톨, 화살 한 개 원조 없이 이 흉악한 적군을 물리치고 광대무상한 대작불사를 기어이 이루었다.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로 대다수 자리 잡고 있었으며, 국민 전체가 불(佛) 자로 총단결하였고 대장경 판목과 황룡사 구층탑은 국민의 정신적 대지주였다. 
이에 고종대왕의 팔만대장경 조성 발원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대장경도 한 가지요, 선후의 조각도 한 가지요, 군신 상하가 다 같이 발원함도 고금이 한 가지어늘, 그때의 거란병만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병은 어찌 아니 물러가리까> 
이로써 능히 고려 국민의 부처님께 귀의한 신앙심을 알 수 있으며, 청송군의 신앙심과 그 후손들의 부처님께 향한 숨은 신앙심도 충분히 인정된다. 
뒷날 청송군 산소 앞에 보광사(普光寺)라 불리는 절을 짓고 세종조 이후 수백 년간 절을 수호하였으며, 한편 산소의 관리를 절에 부탁하여 수대가 긴밀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앙의 힘은 결코 헛되지 않아 영향상종(影響相從,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듯이)과 같다는 말이 어찌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리오. 
"지인" 형제의 예언과 같이 청송군의 증손인 심덕부는 정종조에 좌의정을 지냈고, 아들 심온은 태종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 심회는 세조조에 영의정을 지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말은 <팥 심어 팥 얻고, 오이 심어 오이 얻는다>는 뜻으로, 이는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이야기는 다시 유모로 돌아간다. 
유모는 어린 아기를 안고 목적지도 없이 여러 날 길을 가다가 해질 무렵에 다다른 곳이 경상북도 선산군(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대망동 어느 삼밭(麻田)이었다. 
그 당시 이 마을에 살고 있던 강거민(康居敏)이라는 사람이 밤에 잠을 자다가 앞들 삼밭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너무 기이하여 새벽에 초롱불을 들고 삼밭에 가보니 과연 한 여인이 옥동자를 안고 있었다. 
집으로 데리고 온 강 씨는 마침 아들이 없던 터라 기쁨을 말할 수 없었고, 이 옥동자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공부시켰다. 
그러자 강 씨에게도 아들이 태어나 두 아들을 똑같이 키웠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심회의 나이 15세(1433년) 때 조정에서는 심온의 청렴결백함이 밝혀져 나라에서는 행방불명이 된 심회를 전국에 수소문하여 찾았다. 
마침내 서울로 올라온 심회는 1467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성종 2년(1472년)에는 청송부원군이 되었다. 
이때 선산에서 강거민 내외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접하고 심회는 <나를 낳아주신 분도 부모요, 나를 길러주신 분도 부모다>라고 하며 슬픔을 금치 못하고 관복을 벗고 선산으로 달려 내려와 강 씨 내외분의 묘소 앞에서 6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거류암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10월 17일에는 청송 심씨 문중이 이곳에 와서 강 씨 문중과 함께 합동 묘사를 모시며, 서로 혼인도 하지 않고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사연이 서려 있는 거류암(居留岩)의 이야기는 두 문중만이 알 것이 아니라 널리 세상에 알려 볼 만하다. 
명문의 충효 정신과 이를 지켜준 순박한 시골 부부의 인정은 각박한 오늘날 현실로 볼 때 충분히 귀감이 될 것이다.  
이씨 왕조 500년간을 통틀어 볼 때 청송 심씨는 정승이 13명, 대제학이 2명, 왕비 3명, 부마 4명이 배출되었다. 
부처님 법에는 시대와 처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변할 수 있는 것은 '계율'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은 '인과'입니다. 
인과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청송 보광사 법당에는 법화경 일권이 수백 권 있었다고 한다. 
법화경은 공덕이 뛰어나 절마다 법화경 한권을 많이 소장했던 것 같다.  
"나무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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