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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해수관음보살님께서 해주신 중매


조선 순조 대왕 시절,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에 윤덕삼(尹德三)이라는 노총각이 나무장사로 근근이 노모를 모시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이 서른에 장가갈 엄두도 못 내고, 농사지을 땅도 없으며, 꼭두새벽부터 나무 품을 팔아야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형편이었다. 
까딱하다가는 총각으로 늙어 죽을 판이었다. 
그러나 삼대독자로서 대를 끊는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일찍 일어나 곱절의 노력을 해보았으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지게에 나무 한 짐을 지고 세검정 쪽으로 가는데 목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덕에 지게를 세워놓고 땀을 식히며 바라보니, 개천 건너 옥천암(玉泉庵)의 돌부처님 앞에서 신도들이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예전에도 가끔 그런 광경을 보았지만 무심히 지나치곤 했는데, 오늘은 한 가닥 의문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돌부처에게 절을 할까? 저렇게 하면 소원이라도 들어준단 말인가? 새벽부터 발이 붓도록 다녀도 잘 안 되는 것이 세상 일인데, 바위돌이 무슨 재주로 사람을 도와준단 말인가? 저러는 시간에 일이나 더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기도를 마친 할머니들이 개천을 건너 윤 씨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그들이 다가오길 기다려 한 노인에게 물었다.  
“할머니, 무엇 때문에 저 돌부처에게 절을 합니까? 빌면 과연 소원을 들어주나요?”   
할머니는 총각의 당돌한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보게 총각, 저분은 보통 돌이 아니네. 저 바위에 새겨진 분은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는 관세음보살님이시네. 바다가 관음영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하여 저기 모신 것이지. 그런데 그 영험이 대단해서, 누구든지 저 보살님께 정성을 드리면 틀림없이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네. 예로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는가? 믿는 마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돌로만 보이겠지만, 마음이 참되고 정성이 지극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부처님으로 보이는 법이지.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은 사실 사람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네. 모든 것을 다 갖추시고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중생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지.”   
윤 씨는 할머니의 설명에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제까지 그저 돌로만 보았던 부처님이 새삼 색다르게 보이는 것이었다. 
슬그머니 마음이 돌아선 윤 씨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제 소원도 들어주실까요?”   
할머니는 “그렇지, 여기 다니는 신도가 수백 명이나 되는데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단다. 
그저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기만 하면 틀림없이 바라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지. 우리가 세상에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땀 흘려가며 이 산골짜기까지 찾아와 절을 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갖은 고생에 시달려 오던 윤 씨는 그만 귀가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영험한 분이 옆에 계신 것도 모르고 이제까지 절 한번 안 했으니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라는 생각에 즉시 달려가 수없이 절을 하였다. 
예전에 못한 절을 한꺼번에 하듯 다리가 뻐근할 때까지 절을 올렸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아무쪼록 어리석었던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매일 절을 올릴 테니 어서 제가 장가들어 자식도 낳고 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며 서툴게 합장하며 기원하였다.  
한참 절을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도시락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 관세음보살님께도 점심을 올리고 싶었다. 
그냥 절만 하는 것보다는 꽁보리밥일지언정 공양을 올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짐에서 도시락을 꺼내와서는 “관세음보살님, 비록 꽁보리밥이지만 맛있게 드시고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하고는 점심을 올렸다.  
그날부터 윤 총각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지게를 벗어놓고 절을 하였다. 
백여 일쯤 지나자 처음엔 딱딱하고 무표정하게 보이던 관세음보살님의 눈이 꼭 어머니의 눈매처럼 부드럽게 보이고, 옆에 있으면 마치 어머님의 품같이 포근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쳐다보고 농담도 하며 어리광도 부렸다.  
나무하느라 무던히도 고생했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새싹이 돋아나는 따뜻한 봄이 성큼 다가왔다. 
어느 날 관세음보살님께 들렀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문도 없는 관음각(觀音閣)에 홀로 앉아 있던 윤 총각은 심심하여 기도하고 ‘고누’ 놀이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말판을 관세음보살님 앞에 그려놓고 말했다.  
“관세음보살님, 저와 내기 고누를 둡시다. 
만일 제가 이기면 그 대가로 장가를 보내 주셔야 합니다. 
사실 저는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말을 걸고 고누를 두기 시작하였다. 
밖에 나가 조약돌 두 개를 주워와서 하나는 제 것이라 하고 또 하나는 관세음보살님의 것이라 하며 고누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럼 제가 먼저 두겠습니다.”  
하고는 첫 판에 이겨버렸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을 쳐다보며 “분명히 보셨지요? 틀림없이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더니 나는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보살이다. 
네가 하도 천진스럽고 정성이 갸륵하여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   
윤 총각은 하도 좋아서 “고맙습니다, 보살님!”  
하고 인사하니, 할머니는 “내일 첫 닭이 울 때쯤 길을 떠나, 날이 밝기 전에 자하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그리고 문이 열리고 첫 번째로 나오는 여자에게 ‘남녀가 유별한데 말을 거는 것이 미안합니다. 
어디로 가시는 뉘신지 모르겠으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거라. 그리하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입이 함박처럼 벌어진 윤 총각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보살님!”  
하고 크게 웃으며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첫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즉시 자하문으로 달려갔다. 
아침도 걸렀지만 배고픈 줄도 모르고 지게를 덜렁이며 종종걸음으로 자하문에 도달하니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 전에 도착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먼동이 트길 기다렸다. 
그런데 문이 열릴 시각이 되어 삐걱하며 대문이 열리자마자 보자기를 품에 안은 젊은 여인이 바쁜 걸음으로 세검정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옳다구나, 관세음보살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구나!”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윤총각은 지게를 내던지고 여인을 쫓아갔다. 
그러나 막상 소매를 붙잡고 얼굴이 마주치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과연 내 말을 들어줄 것인지 겁이 났다. 
만일 소매를 뿌리쳐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로운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남녀가 유별한데 이렇게 말을 걸어 죄송합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니 뜻밖에도 여인은 “저는 신도에 사는 윤총각을 찾아갑니다.”  
하고 고분고분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윤총각은 “제가 신도에 사는 윤총각인데요.”  
하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여인이 “어머나, 그러세요? 그런데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나오셨습니까?”라는 반문에 윤총각은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저에게도 지난밤 꿈에 인자한 얼굴의 할머니가 나타나셔서 ‘네가 자하문을 첫 번째로 나가면 어떤 총각을 만날 것이다. 
그는 신도에 사는 윤총각이라 하는데, 그는 복이 많은 사람이니 같이 살도록 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아하면서도 그 말을 따른 것인데 이렇게 진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천생연분인가 봅니다.”  
하며 집으로 발길을 나란히 하였다. 
부처님께서 점지해 주신 인연(因緣)임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인의 성은 심씨였는데, 원래 명문 집안의 규수로 곱게 성장하였다. 
열여덟에 어떤 양반 집으로 출가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남편이 첫날밤부터 소박을 놓고는 방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삼 년 동안 참고 견디어 보았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친정에 다니러 온 김에 그냥 눌러앉아 칠 년을 기다렸으나 남편으로부터의 소식은 전혀 없었다. 
본의 아닌 생과부 생활을 십 년 동안이나 하다 보니 도대체 세상의 낙이 없었다. 
이대로 처녀귀신이 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또한 집안 체면상 버젓이 개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디 남 모르는 곳으로 가서 거처를 잡아볼 생각을 하고 어머니와 의논하니, 평소부터 측은하게 여기던 어머니는 값나가는 패물 한 보따리를 장만해 주며 인연 따라 나가서 잘 살아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내일이면 어디론가 나가보겠다고 미리 작별인사까지 해 둔 터였는데, 그날 밤 꿈에 늙은 할머니가 나타나 어디로 가라고 방향을 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어느덧 해수관음이 계신 장소까지 오게 된 윤총각은 관세음보살님 이야기를 하며 길을 인도하였다. 
찬란한 아침 해가 불끈 솟아오르는 가운데 윤총각이 “자, 우리의 인연을 맺어주신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였을 때였다. 
여인이 “어머나, 이분의 얼굴은 어젯밤 꿈에 나타나신 분의 얼굴과 똑같습니다.”라며 새삼 고개를 조아렸다. 
윤총각은 관세음보살님을 믿는 신앙심이 헛되지 않고 현실로 나타난 것에 한없는 행복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노모가 계신 집으로 돌아온 윤총각은 다시 날짜를 잡아 간단한 혼례를 치른 다음, 심씨가 가져온 패물을 팔아 논밭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 
<관세음보살님>의 덕분으로 해마다 풍작을 하여 주변의 땅을 자꾸 사 모으니, 얼마 안 가서 신도 일대의 갑부가 되었다. 
지금도 그의 오대손이 살고 있으며 역시 옥천암의 신도로서 불심이 돈독하다고 한다.  
또 조선조 말기에 최영년(崔永年)이라는 유명한 문장가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까지 생존했던 분이다. 
그의 부친이 늦도록 자식이 없어 역시 자하문 밖의 옥천암 해수관음보살님께 기도를 드렸다. 
삼칠일 기도를 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아들 하나를 점지해 주시되 재주가 비상한 문장가를 점지해 주옵소서!”라는 기원을 올렸다. 
그러자 삼칠일이 끝나는 날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어떤 점잖은 중년 부인이 나타나 옥동자(玉童子)와 석동자(石童子)를 들고 서서 “이 옥동자와 석동자 중에서 어느 것을 가져가겠느냐?”고 물었다.  
“이왕이면 옥동자를 주십시오.”  
하였더니 “이 옥동자는 네 복에 지나치니 석동자를 가져가거라. 이 석동자만 하여도 네가 바라는 대로 천하에 이름을 떨칠 문장가는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에 좀 섭섭하기는 하였으나 “그러시다면 석동자를 주십시오.”  
하니 “옛다, 받아라!”  
하며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질세라 덥석 받고 보니 꿈이었다. 
아무리 꿈이기로서니 옥동자를 받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어쨌든 분명 아들을 점지해 주신 것이 틀림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과연 그달부터 태기가 있었고, 열 달이 되자 순산하였는데 얼굴이 꿈에서 받은 석동자와 똑같았다. 
“과연 이 아이는 석동자가 틀림없구나. 그러니 장차 수명장수하고 뛰어난 문장가가 될 것이다.”라고 믿었는데, 과연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는 말을 들었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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