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박도령의 지성에 박 어사도 감탄하다.
어사 박문수(御史 朴文秀)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 때의 인물로, 삼남(三南)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암행어사로 전라도 지방을 순찰하던 중 장성(長城) 고을의 한 농촌에 이르렀다.
날은 저물고 배가 고파 몹시 견디기 어려운 곤경에 처하자, 이집 저집 문밖을 기웃거리다가 어느 조그마한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싸립문 앞에 나와 있던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아이고, 손님, 참 죄송합니다.
저는 어머님 한 분과 함께 살고 있는데 살림이 매우 빈곤하여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문수는 “야, 내가 잘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구나. 물이라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라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소년은 “손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라며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무언가 속삭이더니 다시 나와 “손님, 이리로 들어오시라 합니다.”라며 정성껏 안내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마루 한쪽에서 조그마한 종이 봉지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이것으로 밥을 지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야야, 그것을 없애 버리면 네 아버지 제사 때 맷밥은 뭘로 지으려느냐? 그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쓰게 하리다.”라며 말렸다.
그러나 허기에 쓰러져 가는 나그네를 보고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어머니와 상의한 끝에 밥을 짓기로 하였다.
박문수는 그 모습을 엿보며, 끼니 분별을 못한다던 이 소년의 집에서 어머니와 의논하던 종이 봉지에는 분명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얘야, 네 어머니께 드린 종이 주머니에 든 것이 무엇이었니?”라고 물으니 소년은 “아니올시다.
그것은 손님께서 아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박문수가 “그럴 것이 아니라 내가 대강 들어서 알고 있으니 자세히 말해 보아라.”
하자, 소년은 “손님, 참으로 부끄럽습니다만 대강 아신다 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님 제사 때 쓸려고 아껴둔 제미인데, 손님께서 너무 시장해 하시기에 어머님과 상의하여 밥을 짓도록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박문수는 “그렇겠다.”라며 어린아이가 하는 짓이 너무 착하고, 모자라는 살림이 불쌍하게 여겨져 “네 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고령 박(高靈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밖에서 누군가 “도령, 어서 나와라! 안 나오면 큰일 난다!”라며 얼러댔다.
소년은 기운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박문수가 “얘야, 그것 무슨 일로 그러니?”라고 묻자, 소년은 “그런 것이 아니오라 어머님께서 저를 장가 보내려고 웃마을에 사는 김좌수 댁 규수에게 청혼하였더니, 그 집에서 욕을 한다 하여 날마다 저를 데려가 매를 때리고 욕을 합니다.
아버님만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박문수는 문을 확 열고 “여봐라, 나는 이 도령의 아저씨다.
오늘 저녁에는 내가 갈 테니 같이 가자.”라며 나서서 김좌수 집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앉아 있는 김좌수 곁에 바싹 다가가 앉아 담배대로 턱을 괴며 “그래, 내 조카 아이로 말하면 양반의 자손으로 문벌은 그대보다 훨씬 나으며, 위선이 좀 가난한 것이 흠이지 무엇이 그대만 못하단 말인가? 싫으면 그냥 그만두지, 그까짓 권력을 가지고 날마다 그렇게 욕을 주는가?”라고 꾸짖었다.
김좌수는 화가 나 하인에게 “이놈아, 박 도령 데려 오랬는데 어떤 미친놈을 데리고 와서 망신을 시키느냐!”라며 하인을 잡아 때리려 하였다.
박문수는 “그냥 두었다가는 죄 없는 하인을 매질하겠다.”
싶어 옆구리에서 마패를 꺼내 김좌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김좌수는 마패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나가 업드려 죽을 죄를 진 듯 백배 사죄하였다.
집안 식구들은 눈이 둥그래져 “이것 범 잡는 시랭이가 있다더니, 웬일인가?”
하며 모두 놀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박문수는 “그러면 나도 청할 것이 있다.
그대의 딸과 내 조카를 혼인시키겠느냐?”라고 물었고, 김좌수는 “예,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박문수는 “그럼 글피가 날이 좋으니 그날로 정하고 신랑은 내가 데리고 올 테니 잔치는 자네 집에서 베풀라.”고 하니, 김좌수는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박문수는 박 도령 집으로 돌아가 장가 갈 준비와 예절을 가르치고, 모레 함께 갈 것이라 일렀다.
그리고 고을 원이 있는 동헌으로 가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며 먼 친척 조카의 장가를 돕기 위해 원의 협조를 부탁하였다.
원은 흔쾌히 관에 쓰는 관대와 장엄 기구 등을 빌려주기로 하였고, 근읍의 원들을 불러 굉장한 혼인 행렬을 준비하였다.
관복 차림의 어사와 각 고을 원들이 줄지어 김좌수 집으로 새길 행렬이 들어가자, 좌수의 살림은 한쪽이 기울어져도 이런 영광에 좌수는 황송해하며 춤출 듯 기뻐하였고, 동리 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하였다.
대례가 끝나고 잔치가 시작되어 한참 먹은 뒤, 박문수가 김좌수에게 “여보 사돈, 마음이 어떠하오? 내 조카가 댁의 사위로 꼭 마땅하지요?”라고 묻자, 김좌수는 “황송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박문수가 “여보 사돈,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인데 이제는 당신네 집에서 먹고 살 것을 좀 나누어 주심이 어떠하겠소?”라고 하니, 김좌수는 “하고 말고요, 살림 반쯤은 갈라주겠습니다.”라며 허락하였다.
이에 지필묵을 가져와 문서를 작성하고 고을 원이 입증과 날인하였다.
김좌수도 영광이요, 박 도령도 아버지 제사에 쓸 제미로 허기진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한 덕분에 이런 복이 닥쳤으니, 참으로 금시발복(今時發福)으로 식전방장(食前方丈)의 벼락부자가 되었다.
<은혜 갚음을 바라지 말고 남을 돕되, 곤궁에 빠진 사람을 보면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마땅히 구호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보시이다.>
조선시대 야사에서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