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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직설 ①

 

1. 머리말[自序]   
2. 참 마음은 바른 믿음[眞心正信]  
3. 참 마음의 다른 이름[眞心異名]  
4. 참 마음의 오묘한 본체[眞心妙體]  
5. 참 마음의 미묘한 작용[眞心妙用] 



1. 머리말[自序]

어떤 이가 물었다.
“조사들의 묘한 도를 알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답하였다.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즉 도는 앎[知]에도 속하지 않고 모름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이요, 모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기(無記)이다.
만일 참으로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마치 탁 트인 허공과 같거늘 어찌 구태여 이것이 아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그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조사들이 세상에 나오심은 중생들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가?”
나는 답하였다.
“부처나 조사들이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들에게 따로 법을 준 것이 없고, 다만 중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본성을 보게 한 것뿐이다.
화엄경에,
<모든 법이 곧 제 성임을 알면 지혜의 몸을 이룬다. 남에 의해 깨닫는 것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부처나 조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마음을 아주 쉬어 제 본심을 보게 하였다. 그러므로 덕산 스님은 누구나 문에 들어오는 이를 곧 방망이로 때렸고, 임제 스님은 누구나 문에 들어가면 곧 소리를 질렀었다. 어찌 다시 말이 있었으랴?”

그는 또 물었다.
“일찍 들으매, 마명 보살은 기신론을 짓고, 육조 스님은 단경을 설하고, 황매 스님은 반야를 전하였는데 그것은 다 점차로 사람들을 위하신 것이니, 어찌 법에 방편이 없다 하여 되겠는가?”
나는 답하였다.
“묘고산 봉우리 위는 원래 헤아림을 허락하지 않지마는 둘째 봉우리는 조사들이 약간 말로 알게 함을 허락하였다.”
그는 또 물었다.
“감히 바라노니, 둘째 봉우리에서 약간 방편을 가르쳐 주겠는가?”
나는 답하였다.
“말이 옳다. 큰 도는 심오하고 비어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참 마음은 그윽하고 미묘하여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음을 어찌하랴? 그러므로 그 문을 앉아 들어가지 못하면 비록 오천부의 장경을 살펴보더라도 많이 아는 것이 아니요, 참 마음을 밝게 깨달으면 다만 한 마디 말이라도 그것은 벌써 군일이다.”
이제 눈썹을 아끼지 않고 삼가 몇 장의 글로 참 마음을 밝혀, 도에 들어가는 기초와 절차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서문을 쓴다. 


2. 참 마음은 바른 믿음[眞心正信]

화엄경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 일체의 선근(善根)을 길러낸다.”
하였고, 또 유식(唯識)에는,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과 같나니 흐린 물을 능히 맑히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이로써 온갖 선이 발생하는 데에는 믿음이 그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경 첫 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고 쓴 것도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가 물었다.
“조사문의 믿음은 교문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답하였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동일하지 않다. 교문에서는 사람과 하늘들로 하여금 인과를 믿게 한다. 즉 복락을 좋아하는 이는 십선(十善)이 묘한 원인이 되고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즐거운 결과가 된다고 믿으며, 비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이는 생멸의 인연이 바른 인이 되고 고집멸도의 사성제가 성인의 과라 믿으며, 불과(佛果)를 좋아하는 이는 삼겁(三劫)의 육바라밀이 큰 인이 되고 보리와 열반이 바른 과가 됨을 믿는다.
그러나, 조사문의 바른 믿음은 앞의 것과 다르다. 일체 유위(有爲)의 인과를 믿지 않고 다만 자기가 본래 부처라, 나면서 자성이 사람마다에 갖추어져 있고 열반의 묘한 본체가 낱낱에 원만히 이루어졌으므로 다른 데 구하려 하지 않고 원래 저절로 갖추어졌음을 믿는 것이다. 

승찬 스님은,
<원만하기는 허공과 같아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지마는 다만 취하고 버리는 생각 때문에 그와 같지 않다.>
고 하였다. 

또 지공 스님은
<상(相)이 있는 몸 가운데 상이 없는 몸이요, 무명의 길 위에 생멸 없는 길이다.>
고 하였다. 

또 영가 스님은,
<무명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바로 법의 몸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알겠다. 이미 바른 마음을 내었을진대 모름지기 또 앎을 늘리어야 한다.
영명 스님은,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무명이 더욱 자라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사뙨 견해가 더욱 자란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과 앎을 겸해야 도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물었다.
“처음으로 신심을 내어 도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이익이 있는가?”
나는 답하였다.
“기신론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는 결정코 부처 종자를 이어 받아 반드시 모든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잠깐이나마 이 법을 바로 생각하면 이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많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였다. 또 반야경에는,
<한 생각 동안만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면 부처는 그를 다 알고 본다. 그러므로 그 중생은 그런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리를 가려면 첫걸음이 빨라야 하나니, 첫걸음이 어긋나면 천리가 다 어긋남을 알아야 한다. 무위(無爲)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첫 믿음이 발라야 하나니, 첫 믿음을 잃으면 온갖 선이 다 무너진다. 그러므로 조사가,
<털끝만큼 어긋나면 하늘과 땅처럼 멀어진다>
고 한 것이 바로 이 이치이다.”


3. 참 마음의 다른 이름[眞心異名]

어떤 이가 물었다.
“이미 바른 신심은 내었거니와 어떤 것을 진심이라 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허망을 떠난 것이 참이요, 신령하게 밝은 것이 마음이니 능엄경에 이 마음을 밝혔다.”
또 물었다.
“다만 진심이라고만 하는가, 따로 다른 이름이 있는가?”
나는 답하였다.
“부처님 말씀과 조사의 말씀에서 지은 이름이 같지 않다. 불교에서는 보살계율에서 마음의 땅(心地)이라 하였으니 온갖 선을 내기 때문이요, 반야경에는 그것을 보리라 하였으니 깨달음이 체(體)가 되기 때문이며, 화엄경에는 법계라 하였으니 서로 사무치고 융통하여 포함하기 때문이요, 금강경에는 여래라 하였으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며, 반야경에는 열반이라 하였으니 모든 성인들의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요, 금광명경에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진실하고 항상되어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정명경에는 법신이라 하였으니 보신과 화신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요, 기신론에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이며, 열반경에는 불성이라 하였으니 삼신의 본체이기 때문이요, 원각경에는 총지(摠持)라 하였으니 공덕을 흘려 내기 때문이며, 승만경에는 여래장이라 하였으니 숨겨 덮고 포용하였기 때문이요, 요의경에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두움을 부수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 선사의 유심결에,
<하나의 법이 천 가지 이름을 가진 것은 인연을 따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고 한 것이다. 여러 경에 두루 있으므로 다 인용할 수 없다.”
그는 또 물었다.
“불교의 것은 알았거니와 조교에서는 어떤가?”
나는 답하였다.
“조사의 문에는 이름과 말이 끊어져서 하나의 이름도 짓지 않거늘, 무슨 많은 이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근기에 따라 그 이름도 또한 많다.
어떤 때는 자기라 하였으니 중생의 본성이기 때문이요, 때로는 바른 눈이라 하였으니 온갖 모양을 바로 보기 때문이며, 때로는 묘한 마음이라 하였으니 비고 신령스러우며 고요하고 비추기 때문이요, 때로는 주인공이라 하였으니 종래에 짐을 졌기 때문이며, 때로는 밑 없는 발우라 하였으니 간 곳마다 생활하기 때문이요, 때로는 줄 없는 거문고라 하였으니 지금 소리가 나기 때문이며, 때로는 다함이 없는 등불이라 하였으니 어둔 마음을 비추어 부수기 때문이요, 때로는 뿌리 없는 나무라 하였으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하기 때문이며, 때로는 머리카락마저 가르는 날카로운 취모검이라 하였으니 감관과 대상을 끊기 때문이요, 때로는 무위의 나라라 하였으니 바다가 고요하고 강물이 맑기 때문이며, 때로는 보배구슬이라 하였으니 빈궁을 구제하기 때문이요, 때로는 열쇠 없는 자물쇠라 하였으니 여섯 감관을 잠그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진흙소, 나무말, 마음의 근원, 마음의 도장, 마음의 거울, 마음의 달, 마음의 구슬이라 하여 그 갖가지 다른 이름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만일 진심을 밝게 알면 모든 이름을 다 알 수 있고, 진심에 어두우면 모든 이름에 다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부디 이 진심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야 한다.”
 

4. 참 마음의 오묘한 본체[眞心妙體]

어떤 이가 물었다.
“진심의 이름들은 알았거니와 그 본체는 어떠한가?”
나는 답하였다.
“방광반야경에,
<반야는 아무 형상이 없으므로 생멸하는 모양이 없다>
고 하였으며, 또 기신론에는,
<진여 자체는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에 있어서 차별이 없으므로 과거에 난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항상 있어 본래로부터 성이 스스로 일체 공덕을 만족히 갖추어 있다>
고 하였다. 이상의 경론에 의하면 진심의 본체는 인과를 뛰어났고 고금에 통하였으며, 범부와 성현을 구별하지 않고 아무 상대할 것이 없다. 마치 허공이 어디나 두루한 것처럼, 그 묘한 본체는 고요하여 온갖 실없는 말들이 끊어져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 고요히 항상 머무른다. 그러므로 옛날의 주인공이라고도 부르고 또 공겁(空劫) 이전의 자기라고도 한다.
한결같이 마음이 공평하고 비어서 털끝만큼의 티의 가리움도 없어, 모든 산과 강, 땅덩이와 초목의 우거진 숲과 온갖 물건이나 모든 현상과, 깨끗하고 더러운 모든 법이 다 여기서 나온다.
그러므로 원각경에,
<선남자들아, 위없는 법의 왕에게 큰 다라니 문이 있으니 그것을 원각이라 한다. 그것은 일체의 청정한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또 바라밀을 흘려내어 보살을 가르친다>
하였다.
또 규봉 스님은,
<마음이란 깊고 허하며 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스레 밝아,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서 가만히 과거 미래 현재에 통하고 가운데도 아니요 가도 아니면서 시방에 두루 사무친다. 없어지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네 산이 해칠 수 있으며, 성을 떠나고 상을 떠났는데 어찌 다섯 빛깔이 눈멀게 하겠는가?>
고 하였다.
그러므로 영명 스님의 유심결에,
<대저 이 마음이란 온갖 묘하고 신령스러움이 모두 모여 모든 법의 왕이 되었고, 삼승과 오성이 가만히 귀의하여 모든 성현의 어머니가 된다. 혼자 높고 홀로 귀하여 견줄 데가 없으니, 실로 큰 도의 근원이며 참 법의 골수다>
고 하였다. 믿으면 삼세의 보살이 다 같이 공부한 것도 이 마음을 공부한 것이요, 삼세의 부처가 다 같이 깨친 것도 이 마음을 깨친 것이며, 대장경이 설명해 나타낸 것도 이 마음을 나타낸 것이요, 일체 중생이 미혹한 것도 이 마음을 미혹한 것이며, 모든 조사가 서로 전한 것도 이 마음을 전한 것이요, 천하의 납자들이 참구한 것도 이 마음을 참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밝게 알면 일마다 다 이것이요 물건마다에 온전히 드러날 것이요, 이 마음을 미혹하면 가는 곳마다 뒤바뀌고 생각마다 어리석은 것이다. 이 본체는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가진 부처의 성이요, 또 모든 세계의 발생한 근원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영취산에서 침묵하시고 선현 존자는 바위 밑에서 말을 잊었으며, 달마 스님은 소림굴에서 벽을 향해 앉았었고, 유마 거사는 비야리 성에서 입을 다물었던 것이니, 그것은 다 이 마음의 묘한 본체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조사의 문에 들어오는 이는 반드시 먼저 이 마음의 본체를 알아야 할 것이다.> 


5. 참 마음의 미묘한 작용[眞心妙用]

어떤 이가 물었다.
“묘한 본체는 알았거니와 묘한 작용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대답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매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생기매 성이 티끌을 일으킨다. 만일 오늘의 일을 밝히려 하면 본래의 사람을 모르고 만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묘한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진심의 묘한 본체는 원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한데,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묘함을 얻는 데에는 거리끼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의 게송에도,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구르니, 구르는 곳에 진실로 신비롭다. 
흐름을 따라 성을 알면 기쁨도 없고 또 근심도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의 행동하고 베푸는 것이나,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는 것이나,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리는 것이나,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엿보는 것 등이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미혹하여 옷을 입을 때에는 다만 옷을 입는다고만 알고 밥을 먹을 때에는 다만 밥을 먹는다고만 알아, 모든 일에 있어 상만을 따라 구른다.
그러므로 날마다 활용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데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행동하고 베푸는 그 중에서 잊어버려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조사는,
<태 안에 있어서는 신(神)이라 하고 세상에 있어서는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어서는 빛깔을 보고 귀에 있어서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있어서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어서는 말하며, 손에 있어서는 물건을 잡고 발에 있어서는 걸어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법계를 두루 싸고 거두어 들어서는 한 티끌 속에 있다. 그것을 아는 이는 그것을 부처의 성이라 하고 모르는 이는 영혼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도오 스님이 피리불고 춤춘 것이나 석공 스님이 활을 당김이나 비마 스님이 집게를 든 것이나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세운 것이나 흔주 스님이 땅을 두드린 것이나 운암 스님이 사자를 놀리는 등 이 모두가 다 이 하나의 큰 작용을 밝힌 것으로서, 일상 생활에서 미혹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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