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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직설 ③


11. 참 마음은 생사를 벗어남[眞心出死]  
12. 참 마음을 드러내는 수행[眞心正助]  
13. 참 마음의 공덕[眞心功德]  
14. 참 마음의 성숙, 무애를 시험함[眞心驗功]  
15. 참 마음은 아는 바 없이 안다[眞心無知]  
16. 참 마음이 가는 곳[眞心所往]



11. 참 마음은 생사를 벗어남[眞心出死]

어떤 이가 물었다.
“견성(見性)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나는 들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이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어 있다고 헤아린다. 저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에 어른거리는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없다 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원래 없는 빈 것이건마는 병자가 망령되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 생사가 없는 어떤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마는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갖가지로 뒤바뀐 것은 마치 정신 잃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바꾸는 것과 같아서 망령되이 사대를 인정하여 제 몸이라 하고, 바깥 경계의 반연(攀緣)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지더라고, 결코 사라진 곳에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고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을 진실로 알 수 있다. 지금 생사의 없음을 알았지마는 그래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암바팔라는 여자가 문수 보살께 생사가 바로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사온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 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가 수산주에게 물었다. 
“생사가 바로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수산주는 
“죽순이 필경에는 대가 되겠지마는 지금 당장 그것으로 떼배를 만들어 쓰려 한들 되겠는가?”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생사의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의 없음을 체득함만 못하고 생사의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의 없음에 계합함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의 없음을 활용함만 못한 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의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의 없음을 체득하겠으며, 생사의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생사의 없음을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망령되이 생사를 인정하는 이로서는 생사의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12. 참 마음을 드러내는 수행[眞心正助]

어떤 이가 물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심을 쉬면 진심이 나타나겠지마는 만일 망심이 쉬지 못했을 때에는 다만 망심을 쉬고 무심하기만 공부해야 하는가? 다시 그 망심을 다스릴 다른 법이 있는가?”
나는 답하였다.
“바른 것과 도와주는 것은 다르다. 무심으로 망심을 쉬는 것이 바른 것이고, 온갖 선을 행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비유하면 거울이 티끌에 덮였을 때 손으로 닦아야 하겠지마는 다시 묘한 약으로 문질러야 비로소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티끌은 번뇌요 손은 무심의 공부며, 문지르는 약은 온갖 선행이요 거울의 광명은 진심이다.
기신론에,
<또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란 것은 어떤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곧은 마음(直心)이니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의 선행을 모으기 때문이며, 셋째는 대비심이니 모든 중생을 고뇌에서 제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는 또 물었다.
“위에서 법계는 일상(一相)이므로 부처의 체(體)는 둘이 없다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선행을 구해 배워야 한다 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마치 큰 마니보주가 그 본체의 성은 밝고 깨끗한 것이지마는 광석으로서의 더러운 때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비록 보배의 성을 생각하더라도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갈지 않으면 마침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처럼, 중생들의 진여의 법도 그 본체의 성은 공하고 깨끗하지마는 한량없는 번뇌의 더러운 때가 있기 때문에, 비록 사람들이 진여를 생각하더라도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익혀 닦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 번뇌가 한량없어 모든 법을 두루 덮었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
<망심을 쉬는 것으로 정을 삼고 온갖 선법을 닦는 것으로 조를 삼았다. 그러므로 조를 닦을 때에도 무심과 서로 맞아 인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인과에 집착하면 범부들의 인간과 천상의 과보에 떨어져 진여를 증득하기 어려우므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만일 무심과 서로 맞으면 그것은 진여를 증득하는 방편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라, 광대한 복덕을 아울러 얻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금강반야경에,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은 한량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요즘 세상 사람들의 공부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겨우 한낱 본래의 불성을 알고는 곧 스스로 타고난 것만 믿고 많은 선행을 닦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 진심에 통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게을러져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하거늘 어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소견은 아주 그릇 된 것이다.” 


13. 참 마음의 공덕[眞心功德]

어떤 이가 물었다.
“유심(有心)으로 원인을 닦음은 그 공덕을 의심하지 않지마는, 무심으로 인을 닦음은 그 공덕이 어디서 오는가?”
나는 답하였다.
“유심으로 인을 닦음은 유위의 과보를 얻고 무심으로 인을 삼으면 자성의 공덕을 나타낸다. 그 온갖 공덕은 본래 스스로 갖추어 있었으나 망심에 덮여 나타나지 못하다가 이제 이미 망심이 없어졌으므로 그 공덕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가 스님은,
<삼신(三身)과 사지(四智)는 몸으로 원만해지고, 팔해탈과 육신통은 마음에 새겨진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 몸 가운데 스스로 성의 공덕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옛 게송에,
<만일 누구나 잠깐 동안이나마 고요히 앉으면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 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보탑은 필경에 티끌이 되겠지마는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룬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심의 공덕이 유심의 그것보다 큰 줄을 알 것이다.
홍주의 수료스님은 마조 스님에게 나아가 절하고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입니까?>
하다가 마조 스님에게 발길을 차여 거꾸러지고는 갑자기 깨치고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고,
<매우 기이하고 매우 기이하여라. 백천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의 근원을 다만 한 털 끝에서 단박 근원을 알아내었다>
하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로써 보면, 공덕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도신 스님은 나융 선사에게,
<대개 백천의 법문도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 수 같은 공덕도 다 마음의 근원에 있으므로, 일체의 계율 선정 지혜 등의 문과 신통 변화가 모두 스스로 갖추어져 그대 마음에 떠나지 않았다>
하였다. 조사의 말에 의하면 무심의 공덕이 한없이 많건마는 다만 사상(事相)의 공덕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심의 공덕에 대해 스스로 신심을 내지 않을 뿐이다.”
 


14. 참 마음의 성숙, 무애를 시험함[眞心驗功] 

어떤 이가 물었다.
“진심이 앞에 나타날 때 어떻게 그 진심이 성숙하여 걸림이 없음을 아는가?”
나는 답하였다.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진심이 앞에 나타났을 때에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하고 전에 익히던 허망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는 수가 있다. 마치 소를 기를 때에 그것을 잘 다루어 이끄는 대로 따르게 되었더라도 그래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이 부드럽고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밭에 몰고 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손을 놓는 것과 같다.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도인이 진심을 얻은 뒤에는 먼저 공을 들여 보호하고 지켜, 큰 임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진심을 징험하려면 먼저 평상시에 미워했거나 사랑하던 대상을 가져다 때때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아 만일 여전히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요, 만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그것은 도의 마음이 성숙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성숙하였더라도 그것은 아직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못된다. 
또다시 마음을 징험하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특히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 대상을 취하게 하여도 그래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걸림이 없어 마치 같이 놓아 둔 흰 소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옛날에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을 꾸짖는 사람들은 이 마음과 상응하였는데, 요즘에 보면 겨우 종문에 들어간 이들이 도의 멀고 가까움도 알지 못하고 곧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을 꾸짖기만을 배우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다.”
 

15. 참 마음은 아는 바 없이 안다[眞心無知]

어떤 이가 물었다.
“참 마음과과 허망한 마음을 마주했을 때에, 진심(眞心)인지 망심(妄心)인지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망심은 대상을 대하면 앎이 있게 알아서 순경과 역경에 대해 탐하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또 중간인 경계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 그 대상에 대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심을 일으키면 그것은 망심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조사는,
<역경과 순경이 서로 다투는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대립시키는 것이 바로 망상임을 알 것이다.
또 만일 그것이 진심이라면 앎이 없이 알아서 공평하고 원만히 비추므로 초목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다.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이 비고 밝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앎이 없이 아는 것이 진심이다.
그러므로 조론에,
<대개 성인의 마음은 미묘하여 형상이 없으므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쓸수록 더욱 부지런하므로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도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이 없이 안다>
하였다. 그러므로 앎이 없이 아는 것은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망심은 유(有)에 있어서는 유에 집착하고 무(無)에 있어서는 무에 집착하여 항상 양쪽에 치우치므로 중도(中道)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영가 스님은,
<망심을 버리고서 진리를 취하면,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행할 줄 알지 못하여 도적을 자식으로 아는 것이 된다>
하였다. 만일 그것이 진심이라면 유무(有無)에 있으면서도 유무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조사는,
<반연을 따르지 않고 공(空)이라는 생각도 머무르지 않아 한결같이 생각을 공평히 하면 모두가 저절로 없어진다>
하였고 또 조론에,
<그러므로 성인은 유(有)에 있어도 유에 집착하지 않고 무(無)에 있어도 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유무를 취하지 않으나 또 유무를 버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에 빛을 혼동하여 다섯 세계로 두루 돌아다니되 고요히 갔다가 갑자기 와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은 성인이 사람을 위해 손을 내밀어 다섯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할 때에 비록 갔다 왔다 하더라도 갔다 왔다 하는 상(相)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망심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진심과 망심은 다른 것이다. 또 진심은 평상(平常)의 마음이요 망심은 평상의 마음이 아니다.”

그는 또 물었다. 
“평상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답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 점의 신령한 밝음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맑고 고요하기 허공과 같아 어디나 두루 있다. 세속 일에 대해서는 방편으로 이성)이라 이름하고, 행식(行識)에 대해서는 방편으로 진심이라 부른다. 털끝만큼의 분별이 없지마는 인연을 만나서는 어둡지 않고, 한 생각의 취하고 버림이 없지마는 만물에 부딪히면 모두 포섭하여 온갖 대상을 따라서 옮기지 않으며, 비록 흐름을 따라 묘한 작용을 얻더라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고요하다. 그러므로 <찾으려면 그대는 곧 보지 못한다>하는 것이 곧 진심이다.”

그는 또 물었다.
“평상이 아닌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답하였다.
“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단(斷)과 상(常)이 있고 경계에는 이치와 일이 있으며, 경계에는 남과 사라짐이 있고 경계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감과 옴이 있고 경계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선과 악이 있고 경계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자세히 논하면 천차만별이 있지마는 지금 말한 열 가지 상대가 다 평상 아닌 경계다.
마음은 이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생기고 또 그것을 따라 사라진다. 평상이 아닌 경계의 마음이란 앞의 평상의 진심에 대립시키기 때문에 평상이 아닌 망심이라 하고, 진심은 본래 갖추어져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갖가지로 차별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평상의 진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는 또 물었다.
“진심은 평상하여 모든 인과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는 인과와 선악의 응보를 말했는가?”
나는 답하였다.
“망심은 갖가지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 경계들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부처는 갖가지 인과의 법을 설명하여 그 갖가지 망심을 다스리려 하였기 때문에 인과를 세워야 했던것이다. 그러나 만일 진심이라면 온갖 경계를 따르지 않으므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도 가지가지 법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니, 거기에 무슨 인과가 있겠는가?”

그는 또 물었다.
“진심은 한결같이 계속되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나는 답하였다.
“진심은 작용할 때가 있지마는 경계를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묘한 작용으로 유희하여 인과에 어둡지 않을 뿐이다.”
 


16. 참 마음이 가는 곳[眞心所往]

어떤 이가 물었다. 
“진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선악의 인을 짓는다. 선의 인을 짓기 때문에 좋은 세계에 나고 악의 인을 짓기 때문에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데, 업을 따라 상을 받는 이치는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진심을 아는 사람은 망상이 모두 없어지고 진심에 계합하여 선악의 인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죽은 뒤에 그 영혼은 어는 곳에 의탁하는가?”
나는 답하였다.
“의탁할 곳이 있는 것이 의탁할 곳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을, 인간에 떠돌아다니는 방탕한 사람이나 귀신 세계의 주인 없는 외로운 혼과 같다 하여, 특히 이렇게 물어서 의탁할 곳이 있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또 말했다.
“그렇소.”
나는 다시 말하였다.
“성을 알면 그렇지 않다. 일체 중생들은 깨닫는 성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정과 사랑하는 생각으로 업을 짓고 인을 삼아 삼계의 육도에 태어나서 선악의 과보를 받는다. 가령 천상의 업을 지어서는 다만 천상의 과보를 받아 제가 마땅히 날 곳을 제외하고는 그 이외에는 수용하지 못한다.
다른 세계도 그와 같아서 그 업을 따르기 때문에 제가 태어난 곳을 즐겁다 하고 나지 않은 곳을 즐겁지 않다 하며, 자신이 난 곳을 자기의 의탁할 곳이라 하고 남이 난 곳을 남의 의탁할 곳이라 한다.
그러므로 허망한 과이 있으면 허망한 인이 있고 허망한 인이 있으면 허망한 과가 있으며, 허망한 과가 있으면 허망함을 의탁할 곳이 있고 허망함을 의탁할 곳이 있으면 피차가 갈라지며, 피차가 갈라지면 옳고 옳지 못함이 있다.
지금 진심을 알아서, 생멸이 없는 깨닫는 성에 계합하여 생멸이 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킨다. 묘한 본체는 진실하고 항상되어 본래 생멸이 없으나,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므로 생멸이 있는 듯하지마는 본체에서 생긴 작용이라 작용이 곧 본체인데 거기에 무슨 생멸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달인은 본체를 증득하였는데 생멸이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물과 같다. 즉 물은 젖는 성이 그 본체요 물결이 그 작용이니, 젖는 성질에는 원래 생멸이 없는데 물결 속의 젖는 성에 무슨 생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물결이 젖는 성을 떠나서는 따로 없기 때문에 물결에도 생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온 대지가 사문의 한 짝 바른 눈이며 온 대지가 하나의 절이라 이것이 이치를 깨친 사람의 안신입명(安身立命)할 곳이다>
하였다. 이미 진심을 알았으므로 태생, 난생, 습생, 화생으로 태어나는 모든 중생들과 육도가 모두 사라지고, 산하대지가 모두 진심이라 이 진심을 떠나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 이미 삼계의 허망한 인이 없어졌으므로 반드시 육도의 허망한 과보도 없을 것이니, 허망한 과보가 없어졌는데 무슨 의탁할 곳을 말하겠는가? 또 따로 피차가 없다면 무슨 옳고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즉 시방세계는 오직 한 진심이라 온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시현문(示現門) 가운데서 마음대로 가서 태어나더라도 아무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전등록에서 온조상서가 규봉 스님에게 묻기를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는가?>
하니 규봉은,
<일체 중생이 모두 신령스러이 밝은 깨달음의 성을 갖추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만일 그 성이 곧 법신임을 깨치면 본래 남(生)이 없거늘 무슨 의탁할 곳이 있겠는가? 신령스러이 밝아 어둡지 않고 항상 분명히 알며 어디서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갈 곳도 없다. 다만 비고 고요함으로써 자체를 삼고 육신을 인정하지 말고, 신령한 앎으로써 자가 마음으로 삼고 허망한 생각을 자기 마음으로 인정하지 말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전연 따르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도 저절로 그 업이 얽매지 못할 것이요, 혹 중음(中陰)이 있더라도 향하는 곳이 자유로와 천상이나 인간에 마음대로 의탁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죽은 뒤에 진심이 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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