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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피신과 유랑의 세월 ③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돈 4만원을 바탕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 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세하여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었다. 이범석을 제 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를 제 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학규를 제 3지대장으로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 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김문호를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원의 기부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로,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지대를 찾아온 것인데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문화협회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미국 전략 사무국 (OSS : Office of Strategic Service)를 주관하는 싸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쓰 중위는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엇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도노반 장군과 군사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회의는 광복군 제 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오른쪽 태극기 밑에는 나와 제 2지대 간부가, 왼쪽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  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으로 나올 때에 활동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오래된 사찰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전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다음에는 단결력과 용기, 임기응변 등을 측정하는 시험이었다.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밧줄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까마득한 절벽에는 겨우 다섯 자 길이의 밧줄로는 내려갈 수 없었다. 그런데 일곱 청년은 잠깐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밧줄을 이어서 하나의 긴 밧줄을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중국 학생 4백 명을 모아 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사람은 전도 유망한 국민이요."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다음에는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생각으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에서 서안은 40리 거리였다. 호종남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서안성의 주석인 축소주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서안성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나를 환영하기 위하여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소주 주석 댁 만찬에 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소주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 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후에 뛰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소주 주석의 집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서안성 안에 진동하였다.
 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으리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 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거기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 2차로 떠나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그동안 임시 의정원을 소집하여 임시 정부 국무위원의 총 사직을 주장과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이 팽팽했다. 그러다 주석인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정부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으니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와 아들 인아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은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잘 살펴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가죽 종이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고 중경에 거주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의 계획을 정했다. 임시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 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 이광, 이상만, 김은충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 동필무 제씨가 임시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중앙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부들을 위시하여 정부·당부·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을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며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에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의 중경 생활에서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단번에 인구 백만에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밖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수십만이나 되었다.
 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남은 시간에는 주변 청소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 뿐만 아니라, 교외인 토교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 가매 임시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째 정부청사인 양류가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불에탄 후로 오사야항으로 갔다. 다시 또 이 집이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부청사로로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정부청사 겸 직원의 주택으로 삼았다. 네 번째로는 연화지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일년에 40만원이었다.  다행히 이 돈은 장개석 주석의 도움을 받게 되어 임시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며, 동포 중에 죽은 이도 신익희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날의 폭격이 가장 심한 것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명이니 8백명이니 하는 질식 사망자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 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 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은·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巴)인데, 지금은 성도라고 부르는 촉(蜀)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곳이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이 흘러와서 오른편에서 오는 양자강과 합류하는 곳으로, 일천톤 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내륙 항구였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장군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까닭이어서, 연화지에는 파장군의 분묘가 있다.
 중경의 기후는 심히 건강에 좋지 못하여 호흡기병이 많다. 7년간에 우리 동포도 폐병으로 죽은 자가 80명이나 된다. 9월 초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운무가 많아 볕을 보기가 드물고, 기압이 낮은 우묵한 땅이라 지변의 악취가 흩어지지를 아니하여 공기가 심히 불결하다. 내 맏아들 인이도 이 기후의 희생되어서 중경에 묻혔다.
 11월 5일에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기타 직원은 비행기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중경을 떠나 다섯 시간 걸려 떠난 지 13년 만에 상해의 땅을 밟았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한 비행장이 곧 홍구 신공원이라 하는데 우리를 환영하는 남녀 동포가 장내에 넘쳤다. 나는 14년을 상해에 살았건만, 그곳의 홍구 공원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일찍 없었었다. 홍구 공원에서 나와서 시내로 들어가려 한즉 아침 여섯 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6천 명 동포가 줄을 서서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 있는 2미터가 넘는 단 위에 올라서 동포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본즉 그 단이야말로 13년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백천대장 등을 폭격한 자리에 왜적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양자반점에 묵었다. 13년은 사람의 일생에는 긴 세월이었다. 내가 상해를 떠날 적에 아직 어리던 이들은 벌써 장정이 되었고 장정이던 사람들은 노쇠하였다. 이 오랜 동안에 까딱도 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고절을 지킨 옛 동지 선우혁, 장덕로, 서병호, 한진교, 조봉길, 이용환, 하상린, 한백원, 원우관 제씨와 서병호 댁에서 만찬을 같이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상해에 머무르는 동포들 중에 부정한 직업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우리 동포가 가는 곳마다 정당한 직업에 정직하게 종사하여서 우리 민족의 신용과 위신을 높이는 애국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나는 법조계 공동묘지로 아내의 무덤을 찾고 상해에서 10여 일을 묵고난 뒤, 미국 비행기를 타고 본국을 향하여서 상해를 떠났다. 이동녕 선생, 현익철 동지 같은 이들이 이역에 묻혀서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클어진 가슴으로 27년 만에 조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그리운 흙을 밟으니 김포 비행장이요, 상해를 떠난 지 세 시간마이었다.
 나는 조국의 땅에 들어오는 길로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슬픔을 느꼈다. 책보를 메고 가는 학생들의 모양이 심히 활발하고 명랑한 것이 한 기쁨이요, 그와는 반대로 동포들이 사는 집들이 납작하게 땅에 붙어서 퍽 가난해 보이는 것이 한 슬픔이었다.
 동포들이 여러 날을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였더라는데 비행기 도착 시일이 분명히 알려지지 못하여 이날에는 우리를 맞아 주는 동포가 많지 못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들어오니 변함없는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내 숙소는 새문 밖 최창학씨의 집이요, 국무원 일행은 한미호텔에 머물도록 우리를 환영하는 유지들이 미리 준비하여 주었었다.  나는 곧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와 강화 김주경 선생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윤 의사의 아드님이 덕산으로부터 찾아오고 이 의사의 조카따님이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주경 선생의 아드님 윤태 군은 38선의 장벽 때문에 보지 못했지만, 그 따님과 친척들이 혹은 강화에서 혹은 김포에서 와서 만날 수 있었따.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선조의 분묘가 계시고 친척과 고구가 사는 그리운 내 고향은 소위 38선의 장벽 때문에 가보지 못하고 재중형제들과 종매들의 가족이 상경하여서 반갑게 만날 수가 있었다.
 군정청에 소속한 각 기관과 정당, 사회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연합 환영회를 조직하여서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왔건마는 '임시정부환영'이라고 크게 쓰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행진의 끝인 덕수궁에 식탁이 4백여 개로 환영연을 마련하고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이 좁을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찬란하고 성대한 환영회였다. 나는 이러한 환영을 받을 공로가 없음이 부끄럽고도 미안하였으나 동포들이 해외에서 오래 고생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맙게 받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나는 38선 이남 만이라도 돌아보려고 첫 번째 일정으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 두 살에 인천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에는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자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 전의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에서도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두 번째 길로 나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 도착하니 충청남북도 열 한개 군에서 10여 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 주었다. 공주를 떠나 마곡사로 가는 길에 김복한, 최익현 두 선생의 영정 모신 데를 찾아서 배례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동민의 환영하는 정성을 고맙게 받았다.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로 마곡사까지 나를 따르는 이가 3백 50여 명이었고 마곡사 승려의 대표는 공주까지 마중을 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스님들이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었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 기둥에 걸린 주련도 옛날 그대로였다.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보니 꿈 속의 일만 같구나.(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그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구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용담 스님께 <서장>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뜻깊은 하룻밤을 지냈다. 스님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스님들 중에는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세 번째 길로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 오게 하였다.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위패를 모시는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이 참배하기 편리하게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인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군정간부도 전부 참석하였으며 미국 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었다.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 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에서부터 효창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에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선두에는 애도하는 비곡을 아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와 만장대가 따르고 세 분 의사의 상여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보다 더 성대한 장례식이었다.
 나는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길에 보성군 득량면 득량리 김씨 촌을 찾았다. 내가 48년 전에 망명 중에 석 달이나 몸을 붙여 있던 곳이요 김씨네는 나와 동족이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구에는 솔문을 세우고 길을 닦기까지 하였다. 남녀 동민들이 동구까지 나와서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내가 그때에 유숙하던 김광언 댁을 찾으니, 집은 예와 같으되 주인은 벌써 세상을 떠났었다. 그 유족의 환영을 받아 내가 그 때에 상을 받던 자리에서 한 때 음식대접을 한다 하여서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정결한 자리를 깔고 나를 앉혔다. 모인 이들 중에 나를 알아 보는 이는 늙은 부인네 한 분과 김판남 종씨 한 분뿐이었다. 
 김씨는 그때에 내 손으로 쓴 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각별히 친하게 지내던 나와 동갑인 선씨는 이미 작고하고 내게 필낭을 만들서 작별 선물로 주던 그의 부인은 보성읍에서 그 자손들을 데리고 나와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부인도 나와 동갑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도중에서 함평 동포들이 길을 막고 들르라 하므로 나는 함평읍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환영회에 한 차례 강연을 하고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육모정 이 진사의 집을 물은즉, 이 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요, 지금 지나온 함평이며, 함평 환영회에서 나를 위하여 만세를 선창한 것이 바로 이 진사의 종손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혼동한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의 종손 이재승·이재혁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이 길에 김해에 들리니 마침 수로왕릉의 추향 대제였다. 제례 의식에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 주어 평생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를 차리고 참배하였다.
 전주에서는 옛 벗인 김형진의 아들 김맹문과 그 종제 김맹열과 그 내종형 최경열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서 자던 날 밤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강화에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찍고, 내가 그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에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개성, 연안 등을 순회하는 노차에 이창매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 쉬던 날 어머니가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의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심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중국 서쪽 화산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 것을 생각하니 비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시기나 하여도 다소 어머니의 마음이 위안이 아니 될까.
 배천에서 최광옥 선생과 전봉훈 군수의 옛일을 추억하고 장단 고랑포에서 나의 선조 경순왕릉에 참배했다. 그때 능촌에 사는 경주 김씨들은 이미 내가 오는 줄 알고 제전을 준비하였었다.
 나는 대한나라 자주 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지금은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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