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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피신과 유랑의 세월 ②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신아를 데리고 한구를 거쳐서 무사히 장사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로 임시정부의 문부를 가지고 진강을 떠난 조성환, 조완구 등은 남경서 오는 일행보다 며칠 먼저 도착하였고, 목선으로 오는 대가족 일행도 풍랑은 겪었으나 무고히 장사에 왔다. 남기가 사무소에서 부리던 중국인 채 군이 풍랑중에 무호 부근에서 물을 길어 올리다가 실족하여 익사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사람이 충실하니 데려가라 하시는 어머님 명령으로 일행 중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남경에서 함께 지내던 주애보는 거기를 떠나면서 제 본 고향으로 돌려 보내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 때에 여비 백원만 준 일이다. 그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 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안공근의 식구는 중경으로 갔고, 장사에 모인 백여 식구들은 공동 생활을 할 줄 모르기에 저마다 방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짓는 살림을 하였다. 나도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살림을 시작하여서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글을 쓰는 오늘에는 이미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상권을 쓸 때와 같이 지난 일과 날짜도 많이 여쭈어 볼 것이건마는 이제는 어머니가 안 계시다.
 이 기회에 내가 아내를 잃은 후에 어머니가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어머니가 신아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때에는 노자가 다 떨어졌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워서 어머니가 중국 사람들의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인천에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니는 내가 말씀드린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셔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니가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 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찾아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니는 해주 고향에 조상들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으로 가셨다.  내가 인아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 주셨다.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이 가끔 어머니를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니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 때에 내게는 어머니께서 굶지 않으시게 할 만한 힘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셔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에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 정리하셨다.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에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어머니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집과 가산들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 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니를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으로 꾸며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몇 달 후에 어머니는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하고 신아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 다녔다. 그리고 평양에 도착하고 나서야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인 인아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 열차를 타셨다. 대련에서 왜놈 경찰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에서는 인아가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에 있는 친척의 집에 간다고 대답하며 무사히 통과하셨다. 나는 남경에서 어머니가 상해 안공근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듣고 곧 가흥으로 달려가 9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할지언정 회초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라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니의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이렇게 어머니를 남경에서 따로 모시다가 1년이 못 되어 장사로 모시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니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고, 그러면 당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셨다. 이에 사람들이 어머니의 요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운동에 쓰라 하고 도로 내어 놓으셨다.
 장사로 옮겨온 우리 백여 명 대가족은 중국 중앙정부의 보조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어서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더욱이 장사에는 곡식이 흔하고 물가가 낮았으며, 호남성 부주석으로 새로 부임한 장치중이라는 장군은 나와는 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나는 상해, 항주, 남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바꾸었으나 장사에서는 언제나 버젓이 김구로 행세하였다.
 오는 도중에서부터 발론이 되었던 3당 합동문제가 장사에 들어와서는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합동하려는 3당의 진용은 이러하였다. 
 첫째는 조선 혁명당이니, 이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 등이 중심이요.
 둘째는 한국 독립당이니, 조소앙, 홍진, 조시원 등이 그 간부이다. 
 다음으로 셋째는 내가 창설한 한국 국민당이니,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봉준, 엄항섭, 안공근, 양묵, 민병길, 손일민, 조성환 등이 그 중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상 3당이 통합 문제를 토의하려고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 모였는데, 나도 거기에 분명히 참석 중이었다.
...
그런 와중에 문득 정신을 회복하여 보니 병원인 듯하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은 즉, 내가 술에 취하여 졸도하여서 입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 가슴에 웬 상처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 의사가 회진할 때에 이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그것은 내가 졸도할 때에 상머리에 부딪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런 줄만 알고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한 달이 지나서야 엄항섭 군이 비로소 진상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회의가 열렸던 그날 밤, 이운한이 회의장에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매, 첫방에 내가 맞고, 둘째로 현익철, 셋째로 유동열이 다 중상을 입고 넷째 방에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현익철은 입원하자마자 절명하였고, 그나마 유동열은 치료 경과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범인 이운한은 조선 혁명당원으로서 내가 남경 있을 때에 상해로 특수공작을 간다고 하여서 내가 금전의 도움을 준일이 있었다. 그런 자가, 난리를 일으킨 뒤, 장사 교외의 작은 정거장에서 곧 체포되었다 한다. 연루자로 강창제, 박창세 등도 잡혔었으나 모두  석방되고 이운한도 결국 탈옥하여 도망하였다고 한다.
 호남성의 주석인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의원에 나를 위문하러 왔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호남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전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내게 돈 3천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나하천을 대표로 보내주었다.
 퇴원하여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자네 생명은 하느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삿된 것이 감히 바른 것을 범하지는 못하는 법이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하시기도 하였다.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인데,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홍콩에 있던 인아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아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왔었다.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미치게 되어 호남성 정부에서도 이 사건을 법적으로 끝까지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강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나쁜 꼬임과 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내가 퇴원하여 엄항섭 군 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어서 다시 상아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오른편 갈빗대 옆으로 옮겨가 있다고 한다.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란다.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가 마비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 하였다.
 그러던 중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성의 장치중 주석이 광동성의 오철성 주석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 채원개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쏘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정리하고, 나는 안중근 의사의 미망인과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는데, 사실상 그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 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 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홍콩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놈들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나는 다시 어머님과 우리 대가족을 데리고 불산으로 이사하게 하였다. 이것은 광동성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다. 나는 조성환, 나태섭 두 동지를 대동하고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 차표 세 장과 귀주성의 오정창 주석에게로 가는 소개장을 얻었다.  그리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 만에 귀주성 수부 귀양에 도착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뿐이었으나 귀주 지경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함뿐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만 많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도 한족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의 생활을 더욱 곤궁하고 야매한 모습이었다. 중국 말을 모르는 나는 말만 듣고서는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었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알3 수가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 시대의 삼묘씨의 자손으로서, 4천 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가. 요순 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다.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수백의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승희와 운남의 용운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위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귀양에서 8일을 지내고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동안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 때에 이렇게 빌려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대가족의 이주가 끝난 후, 나는 미주와 하와이에 이 사실을 통지하고서 소식을 받기위해 우정총국에 있을 때, 인아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니는 병환이 위중하신데 중경으로 오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내가 인아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 홍빈여사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남쪽 아궁보 손가화원에 있는 김홍서 군 집으로 가 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인후증이었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이라,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니 같은 노령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진동 군과 그 부인 강영파 여사였다. 이 부부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애호하던 동지들인데,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요양원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유의사 부처가 왔을 때는 벌써 더 손 쓸 수가 없게 되신 뒤였다.
그해 어머님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하시게나.  독립이 되어 귀국할 때는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을 파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주시게” 
어머님은 그렇게 가셨다. 나를 위해 50여년 동한 고생만 하시다가 자유 독립되는 것도 보지 못하시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여러 동지들의 도움으로 화상산 공동묘지에 어머님을 모셨다. 
 내가 중경에 와서 할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데려오는 일이요, 둘째는 미주와 하와이에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로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정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세번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수 김약산은 계림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 김홍서, 석정, 김두봉, 최석순, 김상덕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이니,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의 연명으로, 민족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 의외의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사상이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로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하던 내가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회의를 열고 노력한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운동 진영인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과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민족 혁명당, 조선민족 해방동맹, 조선민족 전위동맹, 조선혁명자 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조의 협정에 5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5당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어두운 허물을 사과했다.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체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새로 된 한국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위원장에 김구, 위원으로는 홍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
 임시 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 동감폭포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지어주고, 시내에도 집 한 채를 사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생각이니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중앙정부의 서은증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하고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장래에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 계획서를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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