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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격언-교육의 길
 
이상이 없는 교육은 미래가 없는 현재와 같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같이 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유태인을 찾아 보면, 그 가운데는 특히 개혁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는 과학의 정설을 크게 바꾸어 놓은 사람과 개혁자가 많다.
그렇다면 유태인이 가지고 있는 이상은 무엇일까?
유태인들은 성서의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들어 이 세상을 맡길 때, 유태인에게 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들라는 책임을 지웠다고 배우고 있다.
바로 이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은 정의가 바르게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풍족함 속에 평등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을 믿는 세상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곧 정의라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우고 있어 점점 커가면서 강한 소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는 거의 다 보수적인 경향이지만, 유태교에서는 성서의 가르침만 지키는 것은 부족하다고 여긴다. 유태인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나 세계 각처에 흩어져 유태인만이 살아가야 하는 한정된 지역에 묶이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보다는 멸시와 천대 속에 살면서, 이러한 강한 전통에 힘입어 정의의 실현과 평등 사회를 간절하게 소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유태인 가운데는 사회 개혁자가 많이 나왔다. 아우스비추 수용소에 갇힌 많은 수감들이 만들어 부른 '나는 믿는다, 영원한 평화의 그 때가 오리라는 것을...'라는 노래가 있는데, 모르긴 해도 유태 민족이 아니고는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태 민족의 본질이다.
 
금전의 차용은 거절해도 좋으나 책을 빌려 달랠때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이 말은 <탈무드> 에 있는 율법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유태인들은 '학문과 책의 민족'이라 불릴 만큼 배움을 중시하였다. 유태 민족에 있어서의 배움이란 인간에서의 피와 같다고 여긴다.
인간의 몸 속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듯이, 배움이 없는 유태인들은 생각할 수 없다.이렇듯 배움이라는 것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지켜가는 의무로 삼고 있는 민족은 유태 민족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자라는 성장기에 말을 배운다. 하지만 각 나라의 많은 민족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읽고 쓰는 것을 모르는 민족이 많았다.
그러나 유태 민족만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서와 <탈무드>를 배우면서 쓰고 읽는 공부를 한다. 이들은 이때부터 배움이란 곧 신의 가르침이므로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태 민족에게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강한 전통 의식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책으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인생에서 지혜를 배운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몇 백년 전과 비교해 생각하여 보면,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며, 또한 계속 그 양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탈무드>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배우고 있는 많은 고전들을 보면, 인생을 통한 지혜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유태인들 가정에서는 주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에는 모든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아버지가 <탈무드>에 대해 가르쳐 준다. 이처럼 유태인들에게는 안식일이 곧 가족의 날이다. 이러한 탓에서인지 오늘날의 유태인들도 안식일에는 여행을 삼가고 장사고 쉬는 것이 보통이다.
유태인들에 있어 교육이라면, 시설이 잘 갖추어진 학교보다는 각 가정을 얼핏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가정에서 배우는 교육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자녀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지식에 그치지만, 가정에서는 온갖 지혜를 배우게 되며, 또한 그 아이들의 생활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랍에 파견되었던 어느 일본인이 많은 사람이 붐비는 공항에서 총기사고를 냈을 때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그 일본인을 가리켜 '학교에서 지식만 배운 녀석'이라고 비웃었다.
인간의 지혜가 <탈무드>라는 경전을 낳았고'인간의 지식이 <대륙간 탄도탄>을 만들어 냈다. 지식은 날마다 새롭게 발전해가지만 지혜만은 옛날과 차이가 없다고 유태인들은 믿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태인들은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성서와 <탈무드>를 믿는 것이다.
이들은 지식이 기록된 책과 지혜가 기록된 책을 구별하고 있으며, 지식의 책 못지 않게 지혜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유태 민족의 고전을 보면, 책을 통해 배우는 지혜보다는 부모를 통해 배우는 지헤가 가장 소중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탈무드>에 있는 이런 경구가 이미 수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가장 교육열이 높은 유태 민족을 '책의 민족'이라고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책이란 것이 귀하였다. 하지만 유태인들은 앞의 경구가 쓰일 만큼 책을 많이 읽었다.단순히 책을 읽는 것과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수만 종이나 되는 많은 책 속에 파묻혀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책을 다만 읽는 것으로 그치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마치 나귀가 책을 싣고 돌아다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지식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
<탈무드>에는 하 니와 이디라는 랍비에 관한 얘기가 있다.
'성경의 이사야편에는 [목마른 자는 모두 물가로 오라]
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의 가르침이 물로 표현하고 있는가? 물이란 높은 지대에 낮은 지대로 흐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이란 것도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아울러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겸손해 진다.따라서 지식은 흐르는 물과도 같다.' 이밖에도 <탈무드>에서는 지식을 포도주나 우유에까지도 비유하고 있다. 오사와라는 랍비의 얘기를 들어보자.
'성서에는 [포도주와 우유를 구하라.그리하면 그대들은 살 수 있다]
고 하였다. 왜 포도주와 우유를 예로 들었을까?그것은 바로 그릇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속에만 진정한 가르침이 깃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도 시간은 짧게 하고, 학문에는 오랜 시간을 보내라.
이 말은 유태인들이 학문 즉 배움에 대한 생각을 신 을 찬양하는 것과 같이 생각한 데서 연유한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위대한 것은 신'이라고 믿고 있는 그들이 어째서 기도 시간을 짧게 하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기도하는 것은 인간이 신에게는 하는 일방적인 말이고, 배움이란 것은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진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에게 하는 기도는 맑은 정신으로 짧게 하는 것이 옳으며, 배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신의 진리를 배운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진리를 연구하는 것 자체를 신을 찬양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지식과 지혜를 존중하는 것은 이것이 곧 신을 찬양하는 일로 여겼다.
간혹 신을 찬양하지 않는 유태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인생에 있어 학문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유태인들의 이와 같은 전통에 의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유태 민족들은 시도했던 일이 실패로 끝나면 먼저 자 기들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배움 바체가 곧 신을 찬양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배움에 의해 신을 존경하고 신에게 가까와진다고 여겼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 유태인들은 로마의 힘이 아니라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탈무드>에 있는 얘기를 들어보자. 널리 이름난 랍비가 어느 마을을 찾아왔다. 마을의 책임자는 랍비를 안내하여 마을의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가는 곳마다 작은 진지에 병사들이 차 있었고, 어느 곳에는 울타리로 방어망을 치고 있었다.
숙사로 들어온 랍비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마을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어요. 마을을 지키는 것은 병사나 울타리가 아니고 학교입니다. 왜 나를 학교로 먼저 안내하지 않았습니까?]
학교란 방비의 목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만약 학교가 없어 유태민족에게 배움과 전통 사상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강한 군대를 만든다 해도 그 군대가 지킬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지킬 것을 만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비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지식이다.
유태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집과 땅을 잃고, 이 나 라 저 나라로 옮겨 다녀야 하는 수모와 고통을 받아왔다. 그래서 유태인의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고 , 남들이 너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돈'이라고 대답하면, '아니란다. 그것은 지식이다.'라고 배워오고 있다.
필자 또한 어릴 때 부모로부터 그렇게 배웠다. 유태민족은 나라를 잃고 이리저리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때에도 '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식'이라는 생각을 가슴에 새기고 다녔다.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이다. 어떤 학자가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상인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무슨 물건을 팔러 다니시오?]
학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팝니다]
학자의 말에 궁금해진 상인은 학자가 잠이 들자 그의 짐보따리를 풀어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항해중에 풍랑을 만나 배를 난파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어느 해안에 닿았다.
학자는 그 마을 예배당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학자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매우 훌륭한 학자라고 칭찬하게 되었고 그는 많은 재물을 모으게 되었다. 상인들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과연 당신 말이 옳았소.우리는 팔 물건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당신은 살아 있는 동안은 잃어버리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오.]
 
신은 인간이 만든 마을과 탑을 보기 위해 왔다.
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말로, 여기서의 탑은 바벨탑을 이르는 것이다.
옛날의 여러 랍비들은 왜 신이 땅으로 내려와 바벨탑을 보려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성경에 의하면 그후 신은 바벨탑을 불태워 파괴하였다. 이에 대해 랍비들은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일을 시도하려면 반드시 여러 조건을 직접 확인된 뒤에 생각한 일을 하도록 가르쳐 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다.'
 
자기 혀한테 '모른다'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스스로 많이 아는 체하는 사람은, 헤엄을 모르면서 물에 뛰어드는 것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배움에 의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데, 배운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인정하는 것은 지성적인 일이다.
 
옳은 것을 배워 아는 것보다는 옳은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더 낫다.
'행동은 말보다도 더 웅변적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여러가지 논리나 학문이란 것은 이를 바탕으로 한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리라.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손함이다'라든가 '영리함보다는 친절함이 앞선다'는 격언도 '행동'이 말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태 사회의 옛 이야기를 통해 실제와 이론이 크게 다름을 알아보자.
옛날 어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1/2에 1/2를 더하면 얼마인가?]
먼저 손을 든 학생은 그 학급에서 성적이 제일 나은 아이였는데, '1/2이라고 대답하였다.
[1/2에 1/2을 더했는데, 어째서 1/2인가?반쪽에다 반쪽을 보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선생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명해 주자 학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역시1/2입니다.]
선생님은 화가 나서 종이 한장을 학생에게 주며 직접 계산해 보라고 명령했다. 학생은 여전히 '1/2+1/2=1/2'이라고 계산하였다.
[왜 그렇게 되는지 다시 설명해 봐라]
선생님의 꾸중에 학생이 설명하였다.
[분수에서 분자의 1과 1을 더하면 2가 되고, 분모의 2와 2를 더하면 4가 되므로 이를 약분하면 1/2이 됩니다.]선생님은 그야 물론 1 됩니다.]
[그렇다면 반으로 나눈 사과 1개가 되었으니, 계산에서도 '1/2+1/2=1'란게 증명되지 않았느냐?]학생은 그러나 여전히 상반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반으로 나눈 사과처럼 실제로는 1이 되지만, 계산으로 하는 이론적으로는 1/2밖에 안 됩니다.]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실제의 것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 결점을 쉽게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유태 민족이 즐겨 읽는 고전 가운데 하나인 <미드라쉬>에 보면, "선한 곳에는 반드시 조그마한 악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현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발전시켜 가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인간이란 누구이고 단점과 부족함이 있으므로, 이 단점을 고치기 부단한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이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점을 지니고 있는 반면 남과 다른 장점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완벽한 현자가 없듯이 철저하게 무지몽매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단점보다도 장점을 더 많이 개발함으로써, 단점은 별것 아닌 사소한 것으로 제쳐버리도록 해야 한다. 장점을 보다 많이 늘어가는 것이 자기 단점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생물 가운데 웃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 중에서도 영리한 사람이 웃는다.
유태 민족만큼 생활에서 유머를 즐기는 민족도 없다. 고통 받을 때 웃음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그러한 웃음을 통해서도 많은 교훈을 얻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성실한 것은 물론 좋다.그러나 이러한 것이 지나치면 너무 굳어지게 되고,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도 좁아지고 만다. 하지만 유머와 기지, 해학은 사물에 대한 고정된 관념에서 약간 벗어나 신선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자연과학, 사회과학할 것 없이 진보라는 것은 언제나 연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떤 한 가지의 사실에서 남이 생각해 내지 못할 것들을 연상해 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인시타인의 말이다. 유머와 기지에는 남달리 빠른 두뇌의 반사작용 즉 연상 능력과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쉬임없는 자기 발전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유머는 천시되거나 사라져서는안된다.
 
세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사람, 둘째는 자기가 슬기롭다고 자신하는 사람, 셋째는 자기도 남도 모두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
유태 민족은 지식이 많고 적고보다는 현명한가 아니면 어리석은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상들의 가르침을 잘 익혀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슬기로움이 있는 사람도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리하면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슬기롭고 현명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탈무드>를 독파하고 나면, 앞의 세 종류의 사람 가운데,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끝내는 슬기로운 사람들 속에 끼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당히 어리석은 자가 완전히 어리석은 자보다 더 어리석다.
<탈무드>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바다 속에 완전히 가라앉아 버린 배는 항해하는 다른 배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그러나 절반쯤 물에 잠긴 배는 다른 배에 장애가 된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치고 완전히 어리석은 자는 있을 수 없다. 자기 스스로 그렇다고 인정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자기 존재를 부정할 만큼 자존심까지 버릴 사람이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은 소중하니까.
여기에서의 격언은 정확하지 않은 어설픈 지식을 함부로 쓰면, 자신은 물론 남들까지도 다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정확하지도 않은 지식을 함부로 남발한다. 이러한 본능적 유혹은 생각보다도 강력하다. 이럴 때 우리는 스스로가 충분하지 못한 지식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가득 들어있는 항아리가 반쯤 들었는 항아리보다 움직이기가 쉽다'는 격언도 음매해 볼 만한 것이다.
 
산양이 수염이 있다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
필자도 수염을 기르고 있듯이 랍비들은 대부분 수염 을 기른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보면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 상처를 입는 것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개 생각한 랍비들은 자연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 면도기가 생겨 얼굴에 칼을 대지 않고 면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 면도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히브리어에서의 랍비는 '우리 선생님'이라 하는데, 이 말은 곧 유태인 지역의 지도자이며 지식을 갖춘 현자이다. 그러므로 '산양이 수염이 있다 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는 속담도 겉모양을 아무리 똑같게 꾸며도 속이 다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경구인 것이다.
'만약 수염의 모양으로만 평한다면 모르긴 해도 산양이 이 세상 제일의 현자일 것이다.'또한 반대로 필자 자신이 수염을 길렀다 하여 내가 산양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나귀가 예루살렘에 가도 역시 당나귀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또한 이름난 성도이 다. 지금의 뉴욕이나 파리처럼 옛날의 예루살렘은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지였고 아울러 유행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당나귀라는 동물은 중동 지역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운송을 위한 가축인 동시에 보통 우매하고 어리석은 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그래서 '당나귀가 예루살렘가도 나귀는 역시 나귀'라는 말은 어리석은 자는 뉴욕과 도쿄를 드나들어도 역시 어리석다는 뜻이다.
당나귀한테 대학모를 씌우고, 가슴에 훈장에 달고, 큰 귀에 황금 귀고기를 매어단다 해도 역시 당나귀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도 속에든 것은 없는 자가 겉치레만 힘쓰는 경우가 많다. 값진 보석들을 치렁치렁 매달고, 무슨무슨 직함을 문패처럼 새겨가지고 다니며 뽑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을 바뀌어 말하면 좋은 금고는 항상 속이 비어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바로 당나귀와 인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은 예루살렘을 다녀오면 한 두가지도 배워 온다는 점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자기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유태 현자 중의 한 사람인 야라쉬닐은 말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들이 많은 교양을 쌓으면서 신앙에 충실한 경건한 유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자녀가 자라서 또 부모가 되면 역시 자기 아들이 경건한 유태인이 되기를 빈다. 하지만 부모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많은 교양을 쌓아 경건한 유태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자기 아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보다도 훨씬 적은 것이다.
아들에게 근면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에게 절도를 가르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탈무드>에 있는 격언이다. 어느날 학생이 랍비한테 물었다. [어째서 아들에게 부지런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을 절도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까?]
랍비는 곧 대답하였다.
[자기 자식에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가르치는 부모는 자식에게 포도밭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 울타리가 쳐진 포도밭에는 여우같은 동물이 들어가지 못하듯이 잘못된 생각이 자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은 항상 어느 곳에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신은 어머니를 창조하셨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 요셉이 어머니가 가깝게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인사하기 위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룩하신 성령이 오고 있다. 나는 일어나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자식에게 있어서의 부모 특히 어머니는 존재 가치의 전부이다. 물론 유태인 가정에서도 남자인 아버지가 호주로서 모든 책임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자식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막중하고 너무나도 큰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애정은 바닥이 없을 만큼 무한정이다. '어머니, 어머니', 이 말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것인가?그래서인지 어머니에 대한 격언은 많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는 문고리가 없는 문과 같다.' 이 격언을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에겐 너무도 가혹하기 때문이다.
어느 어머니이고 자기 자식이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나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런 속담도 있다.
'어머니의 눈은 유리눈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의 잘못이나 결점은 보이지 않는다.'라든지 '어머니가 두르고 있는 앞치마는 자기 아들의 잘못을 감싸줄 만큼 크다',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이나 결점을 숨겨주는 베일이다' 이런 종류의 격언은 누구나 어릴 때 많이 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아이로서 나이를 한살씩 먹을 뿐이다.
30, 40세의 아이, 아니 60세의 아이, 사람은 누구이고 아이일 뿐이므로, 아이들과 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성질이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성장 과정에서 귀하게 컸는가, 가난하였는가, 부모의 교육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늘 따라다니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의 성격을 알아보고 싶다면, 그의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된다.
인간은 어릴 때 이미 인격이 완성된다는 말과 같이 아이들한테 온갖 정성을 다쏟아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이들이다. 수염이 있는 아이, 주름이 잡힌 아이, 허리가 굽은 지팡이 짚은 아이... 오직 아이들이 어른으로서, 노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린 아이일 때는 두통을 안겨 주지만, 크면 심통을 안겨준다.
어렸을 때의 아이들을 잘 운다. 하지만 자기의 자식 이기 때문에 즐겁고 기쁜 두통거리일 뿐이다.
어린 아이가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어지럽히고, 형제끼리 다투고, 호기심에 차 무엇이고 묻고 하여 부모에게 두통을 안겨 준다. 그러나 즐겁고 기쁘다. 누구고 자식을 길러본 부모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두통에서 해방되는데, 그때는 아이가 튼튼한 청년으로 성장해 준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성장한 뒤에는 부모에게 심통(마음의 고통)을 안겨 준다.이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인생, 인생...',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이 다 크면 부모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속담도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자의 노년은 황금기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나이를 먹는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에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인가? 옛날 랍비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노년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노년기를 맞이하기 위한 자기 창조를 시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젊어서부터 노인을 공경하게 된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무슨 일을 하느냐'하는 것보다는 '어던 모습의 인간이냐'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물질 만능과 소비 문화가 조장된 사회에서는 '어떤 모습이 인간'보다는 '무슨 일을 하는 인간'이 더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자연히 활동적인 인간이 더 성공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각종 매스컴의 광고에서 보아도 젊음의 매력과 활기찬 의욕에 지나친 박수를 보내고 있을 만큼 젊음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비록 나이를 먹오 장년이 되고, 이어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끊임없이 활동적인 모습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의 노년은 바로 실패의 모습이며, 게절로 보면 겨울철인 것이다. 실패와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회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가혹한 미래인가? 이 격언이 틀림없는 인간 사회의 현실이라면 우리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가혹한 사회에 살고 있단 말인가?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노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나이보다 젊은데요'하는 말 을 듣기 시작하며, 벌써 논년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 뒤 좀더 나이를 먹게 되면, 화장실에서 나올 때 바지의 단추 잠그는 것을 자주 잊게되고, 더 늙게 되면 바지의 단추 여는 것을 잊게 된다.이것은 유태인들의 유머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는 안정과 평화가 있다. 나이 먹은 노인의 잔소리는 아무리 많아도 조용하며, 게다가 젊은이게 선행을 하도록 권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인들이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미 나쁜 행위를 했거나 그런 일들을 보여줄 만한 힘이 없어서이다. 어쨌든 악행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는 밝은 사회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어느 사회이고 노인들은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다. 젊은 시절에 노인을 공경한 자만이 자신이 나이 먹어 노년이 되었을 때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노년기가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게 되리라. 경로 사상의 아름다운 윤리는 이렇듯 동서와 고금에 통하는 근본적인 인륜이다.
 
교육에 관한 격언
* 체중은 그 무게를 잴 수 있으나, 지성의 무게는 잴 수가 없다. 지성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 어떤 현인이 '어떻게 현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식용유에 보다도 등유에다 더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 사람은 책을 통해 가장 많은 지헤를 얻게 된다.
* 사람에 따라서는 학문에만 너무 시간을 소비하는 탓으로 진실을 알 여유가 없다.
* 사람에 따라서는 학문에만 너무 시간을 소비하는 탓으로 진실을 알 여유가 없다.
*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도 친구에게서, 그리고 학생에게서 배우는 게 더 많다.
* 스스로 세워지지 않은 마을은 없어져야 한다.
* 비만함과 돈과 오만은 기억력을 해친다.
* 글을 읽을 줄 아는 귀머거리는 진짜 귀머거리가 아니다. 진짜 귀머거리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이다.
* 학자 중에는 당나귀와 같은 학자가 많다. 그들은 오직 책만 나귀 등에 싣고 다닌다.
* 학자 중에는 값비싼 비단을 싣고 있는 낙타에 비유되는 학자가 있다. 낙타와 비단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나태한 자의 좋은 두뇌는 마치 눈면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있는 거와 같다. 쓸모없는 짐일 뿐이다.
* 글을 쓰는 것은 수표를 발행하는 거와 같다.
* 뱀에 물린 사람은 새끼줄에도 놀란다.
* 속에 넣는 물건보다도 더 비싼 상자를 만들지 말라.
* 물에 빠진 자는 칼끝이라도 잡으려 한다.
* 임금은 나라를 다스리지만, 현인은 임금을 다스린다.
* 현인은 돈의 위력을 알지만, 부자는 지혜의 위력을 모른다. 때문에 현인이 더 위대하다.
* 5명의 지혜로운 자가 500명의 무식한 자들보다 낫다.
* 지혜로운 자는 빵을 나눌 때 열 번씩이나 생각하고 나누지만, 우매한 자는 열 번을 나누어도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
* 열매가 탐스럽게 열린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 빈 독에 동전 한닢을 넣으면 소리가 요란하지만, 동전이 가득찬 독에는 소리가 없다.
* 금화는 흙속에서도 빛이 난다.
* 오래된 고목은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낸다.
* 우유 나무에서 사과를 따려 하지 말라.
* 강아지가 의자에 오르는 것을 놓아두면 나중엔 식탁에까지 오른다.
* 인간에 따라서는 구두와 같은 인간이 있다.값이 헐한 것일수록 삐걱 거린다.
* 동물은 생겨나면서부터 완성물이다. 그러나 갓 태어난 사람은 원료를 이용해 어떤 모습의 인간을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 자녀가 성장해 가면서 부모를 잊는 것은 부모의 교육이 나빴기 때문이다.
* 자녀들은 부모의 언행을 따라 한다.
* 부모의 말을 어기는 자는, 그가 자라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
* 한 사람의 아버지는 열 자녀라도 양육할 수 있으나, 열 자녀는 한 아버지를 봉양할 수 없다.
* 나태한 젊은이는 나중에 불평만 하는 부모가 될 뿐이다.
*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우매한 아들은 어머니를 슬프게 한다.
* 자식이란 학자 앞에서는 어리석지만, 그의 아버지 앞에서는 현명하다.
* 사람이 바꾸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은 자기의 부모이다.
*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도 어린 아이에게서 배울 게 있다.
* 아이들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은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자기 자신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장하지 않은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 서로 적이 된 형제는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나쁘다.
* 한명의 손자가 세 명의 아들보다 귀엽다.
* 나이 먹는게 싫다면 차라리 목을 매어라.
* 유연성이 있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역시 젊다.
* 노인은 자기 자신이 다시는 젊어질 수 없음을 알지만, 젊은이는 자기가 늙어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 할아버지가 집안에 있는 것은 짐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보물이다.
* 마소에게는 밭갈고 짐나르는 것을 어렸을 때 가르쳐야 한다. 짐승이 나이가 들면 가르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 어린나무는 바람을 이겨내기만 오래 된 나무는 곧 꺽인다.
* 일곱살은 일곱살답게, 일흔살은 일흔살답게 행동하라.
* 인간은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바꾸어 해야 한다. 태어난 아이의 앞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사람이 죽으면 이미 그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알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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