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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방랑의 길 ①

 옥에서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바를 몰랐다. 늦은 봄, 밤안개가 자욱한데다가 인천은 연전 서울 구경을 왔을 때에 한번 지났을 뿐이라, 길이 생소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물결소리를 더듬어서 모래사장을 헤매다가 훤히 동이 틀 때에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터기에 와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휘휘 둘러보노라니 수십 보 밖에 어떤 순검 한 명이 칼 소리를 제그럭제그럭 하고 내가 있는 데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길가 어떤 가겟집 함실아궁이를 덮은 널빤지 밑에 몸을 숨겼다. 순검의 흔들리는 환도집이 바로 코끝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아궁이에서 나오니 벌써 훤하게 밝았는데,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인 줄 알고 걸어갔다. 
 나는 어떤 집에 가서 주인을 불렀다. 누구냐 하기로 "아저씨, 나와 보세요." 하였더니 그는 나와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김창수인데, 간밤에 인천 감리가 비밀 석방하여주었으나 이 꼴을 하고 대낮에 길을 갈 수가 없으니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주인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또 얼마를 가노라니까 모군꾼 하나가 상투바람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소리를 하며 내려왔다. 나는 또 사실을 말하고 빠져나갈 길을 물었더니, 그 사람은 대단히 친절하게 나를 이끌고 좁은 뒷골목 길로 요리조리 사람의 눈에 안띄게 화개동 마루터기까지 가서 이리 가면 수원이요, 저리 가면 시흥이니, 마음대로 어느 길로든지 가라고 일러주었다. 미처 그의 이름을 못 물어본 것이 한이다. 
 나는 서울로 갈 작정으로 시흥 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 행색을 보면 누가 보든지 참말로 도적놈이라 할 것이다. 염병에 머리털은 다 빠져서 새로 난 머리카락을 노끈으로 비끄러매어서 솔잎상투로 짜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이고,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릿 바람인데, 옷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 아닌 새 것이면서 땅 밑으로 기어 나올 때에 군데군데 묻은 흙이 물이 들어서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인천 시가를 벗어나서 5리쯤 가서 해가 떴다. 바람결에 호각소리가 들리고 산에도 사람이 희끗희끗하였다. 내 이런 꼴로는 산에 숨더라도 수사망에 걸릴 것 같으므로 허허실실로 차라리 대로변에 숨으리라 하고 길가 잔솔밭에 들어가서 솔포기 밑에 몸을 감추고 드러누웠다. 얼굴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은 솔가지를 꺾어서 덮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칼 찬 순검과 벙거지 쓴 압뢰들이 지껄이며 내가 누워 있는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서 나는 조덕근은 서울로, 양봉구는 배로 달아난 것을 알았고, 내게 대해서는  "김창수는 장사니까 잡기 어려울 거야. 허기야 잘 달아났지. 옥에서 썩으면 무얼 하게."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나는 다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온종일 솔포기 속에 누워 있다가 순검 누구누구며 압뢰 김장석 등이 도로 내 발부리를 지나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야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니, 벌써 황혼이었다. 나오기는 하였으나 어제 이른 저녁밥 이후로는 물 한 방울 못 먹고 눈 한 번 못 붙인 나는 배는 고프고 몸은 곤하여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운 동네 어떤 집에 가서, 황해도 연안에 가서 쌀을 사가지고 오다가 북성고지 앞에서 배 파선을 한 서울 청파 사람이라고 말하고 밥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죽 한 그릇을 내다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정표로 받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화류면경을 꺼내어 그 집 아이에게 뇌물로 주고 하룻밤 드새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고 보니 죽 한 그릇에 엽전 한 냥을 주고 사먹은 셈이 되었다. 그때 엽전 한 냥이면 쌀 한 말 값도 더 되었다. 나는 또 한 집 사랑에 들어갔으나 또 퇴짜를 맞고 하릴없이 방앗간에서 자기로 하였다. 나는 옆에 놓인 짚단을 날라다가 덮고 드러누웠다.
 인천 감옥 이태의 연극이 이에 막을 내리고 방앗감 잠이 둘째 막의 개시로구나, 하면서 소리를 내어서 <손무자>와 <삼략>을 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지가 글을 다 읽는다."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또 어떤 사람이, "예사 거지가 아니야. 아까 저 사랑에 온 것을 보니 수상한 사람이야." 하는 말에는 대단히 켕겼다. 그래서 나는 미친 사람의 모양을 하느라고 귀둥대둥 혼자 욕설을 퍼붓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버리고개를 향하고 소로로 가다가, 밥을 빌어먹을 생각으로 어떤 집 문전에 섰다. 나는 거지들이 기운차고 넌출지게 밥을 내라고 떠들던 양을 생각하고, "밥 좀 주시우." 하고 불러 보았으나, 내 딴에는 소리껏 외친다는 것이 개가 짖을 만한 소리밖에 안 나왔다. 주인은 밥은 없으니 숭늉이나 먹으라고 숭늉 한 그릇을 내 주었다. 그것을 얻어먹고 또 걸었다.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서 살다가 넓은 천지에 나와서 가고 싶은 대로 활활 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고 상쾌하였다.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하면서 부평, 시흥을 지나 그날 당일로 양화도 나루에 다다랐다. 강만 건너면 서울이건마는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또 나룻배를 탈래야 뱃삯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네 서당을 찾아 들어갔다. 
 선생과 인사를 청한즉 그는 내가 나이 어리고 의관이 분명치 못함을 봄인지 초면에 하대를 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이 이렇게 교만무례하고 어찌 남을 가르치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리를 다 빼앗기고 이 꼴로 선생을 대하게 되었소마는 사람을 그렇게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소. 허, 예절을 알 만한 이를 찾아온다는 것이, 어참, 봉변이로고." 하고 일변 책하고 일변 빼었다.
 선생은 곧 사과하고 다시 인사를 청하였다. 그러고는 그날 밤을 글 토론으로 지내고, 아침에는 선생이 아이 하나에게 편지를 써주기로 나룻배 주인에게 전하여 나를 뱃삯 없이 건너게 하였다. 
 나는 옥에서 사귀었던 진오위장을 찾아갔다. 이 사람은 남영희궁에 청지기로 있는 사람으로서, 배오개 유기장이 5, 6인과 짜고 배를 타고 인천 바다에 떠서 백동전을 사주하다가 깡그리 붙들려서 1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그들은 내게 생전 못 잊을 신세를 졌노라 하여 날더러 출옥하는 날에는 꼭 찾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내가 영희궁을 찾아간 것은 황혼이었다. 진오위장은 마루 끝에 나와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고머니, 이게 누구요?" 하고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 내려와서 내게 매달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온 곡절을 듣고는 일변 식구들을 불러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일변 사람을 보내어 예전 공범들을 청해왔다. 그들은 내 행색이 수상하다 하여 '나는 갓을 사오리다.' '나는 망건을 사오겠소.' '나는 두루마기를 내리다.' 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추렴을 모아서 나는 3, 4년 만에 비로소 의관을 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진오위장 일파와 모여 놀며 며칠을 유련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조덕근을 두 번이나 찾아 갔으나,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나를 전혀 만나주지 아니하였다. 중죄인인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오위장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수일을 쉬어서 여러 사람이 모아주는 노자를 한 짐 잔뜩 걸머지고 삼남 구경을 떠나느라고 동작 나루를 건넜다. 그때에 내 심회가 심히 울적하여 승방뜰이라는 데서부터 술 먹기를 시작하여 매일 장취로 비틀거리고 걷는 길이 수원 오산장에 다다랐을 때에 벌써 한 짐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산장에서 서쪽에 있는 김삼척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주인은 삼쳑영장을 지낸 사람으로, 아들이 6형제가 있는데, 그 중 맏아들인 김동훈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옥에서 한 달 정도 고생을 할 때에 나와 절친하게 되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내 손을 잡고 꼭 후일에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김삼척 집에서 대환영을 받아서 그 아들 6형제와 더불어 밤낮으로 술을 먹고 소리를 하며 며칠을 놀다가 노자까지 얻어가지고 또 길을 떠났다. 
 강경에서 공종렬을 찾으니, 그도 인천옥에서 사귄 사람으로서, 그 어머니도 옥에 면회하러 왔을 때에 알았으므로 많은 우대를 받고, 공종렬의 소개로 그의 매부 진선전을 전라도 무주에서 찾은 후, 나는 이왕 삼남에 왔던 길이니 남원에서 김형진을 찾아보리라 하고 이동(귓골)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 말이 김형진의 집이 과연 대대로 이 동네에 살았으나, 연전에 김형진이 동학에 들어가 가족을 끌고 도망한 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나는 대단히 섭섭하였다. 
 전주 남문 안서에서 약국을 하는 최군선이 자기의 매부라는 말을 김형진에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갔으나 최는 대단히 냉랭하게, 그가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고 벌써 죽었다고 원망조로 말할 뿐이었다. 나는 비감을 누를 수 없어서 부중으로 헤매었다.
 마침 그날이 전주 장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떤 백목전 앞에 서서 백목을 파는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의 모습이 김형진과 흡사하기로 그가 흥정을 하여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붙잡고,  "당신 김 서방 아니오?"  하고 물은즉, 그가 그렇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노형이 김형진 씨 계씨 아니시오?" 하였더니, 그는 무슨 의심이 났는지 머뭇머뭇하고 대답을 못했다. 
 나는  "나는 황해도 해주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말을 못 들으셨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형이 생전에 노상 내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시에도 나를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청년을 따라서 금구 원평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농가였다. 그가 그 어머니와 형수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고하니 집 안에서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김형진이 죽은 지 열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신주를 모신 궤연에 곡하고 늙은 어머니와 젊은 과부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인에게는 맹문이라는 8, 9세 되는 아들이 있고, 그의 아우에게는 맹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버린 벗을 생각하여 수일을 더 쉬고 목포로 갔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목포는 아직 신개항지여서 관청이 건축도 채 아니 된 엉성한 곳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양봉구를 만났다. 나와 같이 탈옥한 넷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나는 조덕근이 다시 잡혀서 눈 하나가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과, 그때에 당직이던 김가는 아편 인으로 죽었단 말을 들었다. 내게 관한 소문은 못 들었다고 하였다. 양봉구는 약간의 노자를 내게 주고 이곳은 개항장이 되어서 팔도 사람이 다 모여드는 데니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하여 어서 떠나라고 권하였다. 
 나는 목포를 떠나서 광주를 지나, 함평에 이름난 육모정 이 진사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 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께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 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상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께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 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본보기)요, 가풍이었다. 육모정은 이 진사의 정자거니와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게실 등이 구비되었다. 그때에 글을 읽던 두 학동이 지금의 이재혁, 이재승 형제다. 나는 하룻밤을 쉬어 떠나려 하였으나 이 진사가 굳이 만류하여 얼마든지 더 묵어서 가라는 말에는 은근한 신정(新情)이 품겨 있었다. 나는 주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육모정에서 보름을 더 묵었다. 
 내가 내일 이 진사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으로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소 연장자인 장년의 한 선비로, 내가 육모정에 묵는 동안 날마다 와서 담화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물리칠 수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참말 게딱지와 같고 방은 단 한 칸뿐이었다. 그 부인이 개다리 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은 아니요,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이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주인은 내가 이 진사 집에서 매일 흰 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지마는 조금도 안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저도 먹고 내게도 권하였다. 나는 그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하여 조금도 아니 남기고 다 먹었다. 
 나는 함평을 떠나 강진, 고금도, 완도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갔다. 보성에서는 송곡면(지금은 득량면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득량리에 사는 종씨 김광언이라는 이를 만나 그 문중의 여러 댁에서 40여 일이나 묵고, 떠날 때에는 그 동네에 사는 선씨 부인한테 필낭 하나를 신행(贐行 :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시문이나 물건) 선물로 받았다. 
 보성을 떠나 나는 화순, 동복, 담양을 두루 구경하고 하동 쌍계사에 들러 칠불아자방(七佛亞字房:칠불암의 아자방)을 보고 다시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한 것은 감이 벌겋게 익어 달리고, 낙엽이 날리는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절에서 점심을 사먹고 앉았더니 동학사로부터 왔노라고 점심을 시켜먹는 유산객 하나가 있었다. 통성명을 한즉, 그는 공주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였다. 연기는 40이 넘은 듯한데 그가 들려주는 자작의 시로 보거나 그의 말로 보거나 퍽 비관을 품은 사람이었다. 비록 초면이라도 피차가 다 허심탄회한 말이 서로 맞았다. 그가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기로, 나는 개성에 생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1년이 장근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가 40리밖에 아니 되니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이 마곡사 팥죽 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이 서방은 홀아비라는 것이며, 사숙에 훈장으로 여러 해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니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하였다. 나도 중이 될 생각이 없지는 아니하나 돌연히 일어난 문제라 당장에 대답은 아니하였다. 
 마곡사 앞 고개를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유자비추풍(遊子悲秋風)'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왔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이 서방이 다시 다져 물었다. "김 형, 어찌하시려오? 세상일을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나는 웃으며,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오?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안개를 헤치고 고개를 내려서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가는 것이었다. 매화당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에 들어가니, 머리 벗어진 노승 한 분이 그림폭을 펴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이 서방은 전부터 이 노승과 숙면이었고, 그는 포봉당이라는 이였다.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두고 자기는 다른 데로 갔다. 이윽고 나를 위한 밥이 나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앉았노라니 어떤 하얗게 센 노승 한 분이 와서 내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는 거짓말로 본래 송도 태생이오며, 조실부모하고, 강근지친도 없어서 혈혈단신이 강산 구경이나 다니노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그 노승은 속성은 소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고 노승이 된 지가 50년이나 되노라 하고,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탁하고 학식이 천박하여 노사에게 누가 될까 저어하노라 하고 겸사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의 밑에서 불학을 공부하여 장차 큰 강사가 될지 아느냐고 강권하였다. 
 이튿날 이 서방은 벌써 머리를 달걀같이 밀고 와서 내게 문안을 하고 하는 말이, 하은당이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선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착가사 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들고, 향적실에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검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이라고 명하여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회상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를 준다. 예불의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 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나이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우고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정신 수양에 대하여서는, '승행에는 하심이 제일이라' 하여 교만한 마음을 떼는 것을 주로 삼았다. 사람에게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짐승, 벌레에 대하여서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어젯밤 나더러 중이 되라고 교섭할 때에는 그렇게 공손하던 은사 하은당이 오늘 낮부터는, "얘, 원종아!" 하고 막 해라를 하고, "이놈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먹었으니 고명한 중은 될까 싶지 않다. 상판대기가 저렇게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 하고 막 종으로 부리려 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망명객이 되어 사방으로 유리하는 몸은 되었지마는,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평생에 한이 되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양반이 되어도 월등한 양반이 되어서 우리 집을 멸시하는 양반들을 한번 내려다보겠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놈이 되고 보니 이러한 허영적인 야심은 불씨 문중에서는 터럭끝만치도 용서하지 못하는 악마여서, 이러한 악념이 마음에 움틀 때에는 호법선신의 힘을 빌려서 일체법공의 칼로 뿌리째 베어버려야 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를 들어왔나 하고 혼자 웃고 혼자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할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하라는 것은 다 하였다.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는지 보경당 노승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 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 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 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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