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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 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색으로 묵은 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제압을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적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의 종으로서 속량받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을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이다.
증조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도 다 살아 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24세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연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 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 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병자년 7월 11일(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 자시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 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 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도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루듯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나가시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여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이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나가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 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 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 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 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니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러진 수저로 엿들 사시오." 하고 외쳤다. 나는 엿을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 간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밀었다. 헌 숟가락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어미는 반 동강 숟가락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이 밀었다. 내가 반 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치겠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또 한 번은, 역시 그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 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온통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너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를 가느냐?" 하고 내 앞을 막아 서신다. "떡 사 먹으로 가요."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애비가 보면 이 녀석 매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 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참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러 내려 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마는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하고 말씀으로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 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종증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으로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매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 주셨다. 나는 매우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한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한 번은 장마비가 많이 와서 근처의 샘들이 넘쳐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통을 집에서 꺼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모여서 어울려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종조께서 이 땅에서 작고하셔서 백여 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한 것이 별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서는 여기 와서 살던 바툰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난다.
고향에 돌아와서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비록 기성명 정도이지마는 허위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 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떠메다가 사랑에 누이곤 하였다. 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볼 때면 참지 못하시고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 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해마다 세말이 되면 아버지는 닭의 알,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여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였다. 그러면 그 회사로 책력이며 해주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리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 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지내며 또 설사 태장,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만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 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범 같은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일년 동안에 십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는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없이 대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주기는 하였을망정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되어서 아버지는 공전흠포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이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차를 떨었다.
아버지의 아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을 더 사셨다는 데서 생긴 것이다.
아버지 4형제 중에 백부(휘백영)는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휘준연)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 데도 한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억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여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양반에게만 주정을 하셨지마는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인가 사람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 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 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를 열고 이러한 패류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고 의논한 결과,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 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들었다.
이때 쯤에는 나도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는 한 동기가 있었다. 하루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 사돈을 대하셨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대답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에 진사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살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 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얕아서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었다.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리로서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창암아, 선생님께 절하여라."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때에 내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개학하기 전날 나는 '마상봉한식'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매가리 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자꾸 외웠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 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 동무들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이러한지 반 년 만에 선생과 신 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보내게 되었는데 신 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한 번은 월강(한 달에 한 번 하는 시험) 때에 선생에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른 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오리다 하고 약속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날은 신 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장원을 하였다. 신 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날 닭을 잡고 한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 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잘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셨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쪽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로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여행을 나서시게 되었다.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부모님은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유리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있어 못 쓰던 팔다리를 잘은 못해도 쓰셨다.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의리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 하더라도 지필묵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니가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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