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②

 

내 나이가 열 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 짜리, 닷 섬 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하는 땅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하는 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하는 축문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라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 "사략"을 읽을 때에 '왕후장영유종호(제왕, 제후, 장수, 재상의 씨(혈통)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하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의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과거하는 글)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수업료)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망태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는 일이 많았다.
제작으로는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 십팔구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통감 등이요, 습자에서는 분판만을 썼다.
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떤 날 정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과거에 글지어 바치는 종이)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를 좀 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과거날이 가까워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중에 먹을 좁쌀을 지고 정선생을 쫓아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과거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글방)을 제 접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 석담접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과거에 급제를 시켜 달라고 비는 것)라는 것이다. 둘러 늘인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목을 쑥 들이 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행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가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내 글은 짓기는 정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하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있는 사람들은 다들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어찌 되었던지 서울 권문세가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 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 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서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이나 되는 것이 상지상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 보아서 성인 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지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 대하여서는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地家書)를 좀 보았으나 거기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을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泰山覆於前心不妄動 與士卒同甘苦 進退女虎 知彼知己 百戰不敗_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 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일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에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을 못 가게 딱 잡아 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 주었다는 등,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 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에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 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등 이러한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이라는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 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 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 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에서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외우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을 하였더라도 양반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 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 최수운 선생께서 천명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 가지고 장래에 진주(참된 주인)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하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 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게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 뿐더러 상놈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절차를 물은 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 "팔편가사", "궁을가"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몇 개월만에 연비(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건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창암이라던 아이명을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는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퍼져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아기 접주라고 별명 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이듬해인 계사년 가을에 해월(최시형)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 열 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이라는 해월선생 계신 데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하는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가득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한 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 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구,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동학 도를 닦는 선비)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 놓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 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경군(서울 군사)이 삼남을 향해서 행군하는 것도 만났다.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9월이었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재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쟁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
최고 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내 부대에 산 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따라 오라 하고 나는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으로 된 수성군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 곽감역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말은 안해도 후하게 드리는 비사후폐(卑辭厚弊)로 초빙하여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삼았다. 총 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