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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③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우종서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내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 앉았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시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하였다. 그들은 둘 다 나보다 십년은 연상일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혼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라, 우씨를 종사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를 시켰다. 그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진사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였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이나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여 송종호, 허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온당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로 접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우리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났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 막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나서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에서는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선 평생에 처음 입어 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 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안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며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령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이라는 안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 말이, "김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은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 주시니 감사하외다." 하고 다시, "들으니 구경하시던데 양위 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 해 오렷다."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 5개월이었지만, 그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 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있게 읊어 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때에 안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 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내게 자기의 사랑에 놀러 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우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간간이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날더러, 내가 매일 안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같이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선생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 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는 글구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가끔 안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 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그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제2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건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청일전쟁. 1894년)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 두었다가 훗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도 염려 말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서양 오랑캐)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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