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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기구한 젊은 때 ③

 옥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넘어서 목에 큰 칼을 쓴 채로 선화당 뜰에 끌려들어가서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았다. 민영철은,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하였다지?" 하는 말에 나는, "그런 일이 없소."하고 딱 잡아떼었다. 
 감사가 언성을 높여서, "이놈, 네 행적에 증거가 소연하거든 그래도 모른다 할까? 여봐라, 저놈을 단단히 다루렷다." 하는 호령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내 두 발목과 무릎을 칭칭이 동이고 붉은 칠을 한 몽둥이 2개를 다리 새에 들이밀고 한 놈이 1개씩 몽둥이를 잡고 힘껏 눌러서 주리를 틀었다. 단번에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서 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지금 내 왼편 정강이 마루에 있는 큰 허물은 그 때에 상한 자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 하다가 마침내 기절하였다. 
 이에 주리를 그치고 내 면상에 냉수를 뿜어서 소생시킨 뒤에 감사는 다시 같은 말을 물었다. 나는 소리를 가다듬어서, "민의 체포장을 보온 즉 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이것은 관찰부에서 처리할 안건이 아니오니 내부로 보고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는 내가 그 일인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민 감사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다시 내리 가두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7월 초승에 나는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인천 감리영으로부터 4, 5명의 순검이 해주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집에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여서, 아버지는 집이며 가장집물을 모두 방매하여 가지고 서울이거나 인천이거나 내가 끌려가는대로 따라가셔서 하회에 보시기로 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나를 따라오셨다. 
 해주를 떠난 첫날은 연안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나진포로 가는 길에 읍에서 5리쯤 가서 길가 어느 무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이날은 일기가 대단히 더워서 순검들도 참외를 사 먹으며 다리 쉼을 하였다. 우리가 쉬고 있는 곁 무덤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앞에는 ‘효자이창매지묘’라고 하고 뒤에는 그의 사적이 적혀 있었다. 그 비문에 의하건대, 이창매는 본래 연안부의 통인으로서 그 어머니가 죽으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한결같이 그 어머니의 산소를 모셨다 하여 나라에서 효자정문을 내렸다 하였고, 또 이창매의 산소 옆의 그 아버지의 묘소 앞에는 그가 신을 벗어놓고 계절 앞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과 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향로와 향함을 놓았던 자리에는 영영 풀이 나지 못하였고, 혹시 사람들이 그 움푹 패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곧 뇌성이 진동하여 큰 비가 퍼부어 그 흙을 씻어내고야 만다고 한다. 
 그 근처 사람들과 순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귀로 듣고 돌비에 새긴 사적을 눈으로 보매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하고 피섞인 눈물을 흘렸다. 저 이창매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서도 저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거늘 부모의 생전에야 오죽하였으랴. 그런데 거의 넋을 잃으시고 허둥허둥 나를 따라오시는 내 어머니를 보라. 나는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나는 쇠사슬에 끌려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금 다시금 이 효자의 무덤을 돌아보고 수없이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내가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 병신년 7월 25일, 달빛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물결조차 아니 보이고 다만 소리뿐이었다.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쯤 하여 나를 호송하는 순검들이 여름 더위 길에 몸이 곤하여 마음 놓고 잠든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뱃사공에게도 안 들릴 만한 입안의 말씀으로,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 하시며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셨다. 나는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손을 끄시므로, 나는 더욱 자신있게, "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죽을 결심을 버리시고,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가 같이 죽자고."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비비시면서 알아듣지 못할 낮은 음성으로 축원을 올리셨다. 
 여전히 천지는 캄캄하고 보이지 않는 물결소리만 들렸다. 
 나는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옥에 이수된 것은, 갑오경장에 외국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재판소를 인천에 둔 까닭이었다. 내가 들어있는 감옥은 내리에 있었다. 마루터기에 감리서가 있고, 그 좌익이 경무청, 우익이 순검청인데,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 이 모든 관아로 들어오는 2층 문루가 있었다. 높이 둘러쌓은 담 안의 나지막한 건물이 옥인데, 이것을 반으로 갈라서 한 편에는 징역하는 전중이와 강도, 절도, 살인 등의 큰 죄를 지은 미결수를 가두고, 다른 편에는 잡수를 수용하였다. 미결수는 평복이지마는 징역하는 죄수들은 퍼런 옷을 입고 있었고, 저고리 등에는 강도, 살인, 절도, 이 모양으로 먹으로 죄명을 썼다. 이 죄수들이 일하러 옥 밖에 끌려 나갈 때에는 좌우 어깨를 아울러 쇠사슬로 동여서 이런 것을 둘씩둘씩 한 쇠사슬에 잡아매어 짝패를 만들고, 쇠사슬 끝매듭이 죄수의 등에 가게 하였는데, 여기를 자물쇠로 채웠다. 이렇게 한 죄수를 압뢰(간수)가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처음 인천옥에 갇힐 때에 나는 도적으로 취급되어서 아홉 사람을 함께 채우는 기다란 차꼬에 다른 도적 8명의 한복판에 발목을 잠갔다. 한 달 전에 잡혀왔다는 치하포 주인 이화보가 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날 내가 토전양량을 죽인 이유를 써서 이화보의 집 벽에 붙인 것을 한 사람이 떼어서 감추고 나를 완전히 강도로 몬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옥문 밖까지 따라오셔서 눈물을 흘리고 서 계신 것을 나는 잠깐 고개를 돌려서 뵈었다. 
 어머니는 향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과감하시고, 더욱 침선이 능하시므로 감리서 삼문 밖 개성 사람 박영문의 집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고 그 집 식모로 들어가셔서 이 자식의 목숨을 살리시려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인천항에서 유명한 물상객주로, 살림이 크기 때문에 식모, 침모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시는 값으로 하루 삼시 내게 밥을 들이게 한 것이었다. 하루는 옥사정이 나를 불러서 어머니도 의접할 곳을 얻으시었고 밥도 하루 삼시 들어오게 되었으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다른 죄수들이 퍽 나를 부러워하였다. 나는 옛 사람이 '애애부모 생아구로 욕보기은 호천망극(哀哀父母 生我劬勞 欲報基恩 昊天罔極)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고생하심이 커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하나 하늘처럼 높아 다할 길이 없음이 슬프도다.' 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천겹 만겹의 고생을 하셨다. 불경에 부모와 자식은 천천생의 은애의 인연이라는 말이 진실로 허사가 아니다. 
 옥 속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아직도 여름이라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장질부사가 들어서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한 번은 나는 자살을 할 생각으로 다른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끊어진 동안의 일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고향으로 가서 내가 평소에 친애하던 재종제 창학과 놀았다. '고원장재목 혼거불수초(故園長在目 魂去不須招) 오랜 세월 고향을 눈앞에 그리며 지내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내 영혼은 이미 가 있구나.'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드니 옆에 있는 죄수들이 죽겠다고 고함을 치고 야단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은 것을 걱정하여 그자들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마 인사불성 중에 내가 몹시 요동을 하여서 차꼬가 흔들려서 그자들의 발목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사람들이 지켜서 내가 자살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나 자신도 병에 죽거나 원수가 나를 죽여서 죽는 것은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일은 아니하리라고 작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병은 나았으나 보름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어보지 못하여서 기운이 탈진하여 갱신을 못하였다. 그런 때에 나를 심문한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생각하였다. 해주에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겪으면서도 입을 닫고 함구불언한 뜻은 내부에 가서 대관들을 대하여 한 번 크게 말하려 함이었지마는, 이제는 불행히 병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를 죽인 취지를 다 말하리라고.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서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도적 문초하는 형구가 삼엄하게 벌여 놓인 것을 보았다. 옥사정이 업어다가 내려놓은 내 꼴을 보고 경무관 김윤정은 어찌하여 내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옥사정은 열병을 앓아서 그리 되었다고 아뢰었다. 
 김윤정은 나를 향하여, "네가 정신이 있어, 족히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느냐?" 하고 묻기로 나는, "정신은 있으나 목이 말라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니 물을 한 잔 주면 마시고 말하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즉 김 경무관은 술을 들이라 하여 물 대신에 술을 먹여주었다. 
 김 경무관은 청상에 앉아 차례대로 성명, 주소, 연령을 물은 뒤에, 모월 모일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 하나를 살해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있소."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 일인을 왜 죽였어? 그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죽였다지?"하고 경무관이 묻는다. 나는 이때로다 하고 없는 기운이건마는 소리를 가다듬어,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 1명을 때려죽인 사실은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사실은 없소."하였다. 그런즉 청상에 늘어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하였다. 
 옆 의자에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 하고 있던 일본 순사(뒤에 들으니 와타나베라고 한다)가 심문 벽두에 정내에 공기가 수상한 것을 보았음인지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양인 것을 보고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이놈!" 하는 한 소리 호령을 하고 말을 이어서,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하고 소리를 높여 꾸짖었더니 와타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을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하여졌다.  배석하였던, 총순인지 주사인지는 분명치 아니하나, 어떤 관원이 경무관 김윤정에게 이 사건이 심히 중대하니 감리 영감께 아뢰어 친히 심문하게 함이 마땅하다는 뜻을 진언하니, 김 경무관이 고개를 끄덕여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윽고 감리사 이재정이 들어와서 경무관이 물러난 주석에 앉고 경무관은 이 감리사에게 지금까지의 심문 경과를 보고한다. 정내에 있는 관속들은 상관들의 분부 없이 내게 물을 갖다가 먹여준다. 
 나는 이 감리사가 나를 심문하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나 김창수는 하향(遐鄕) 일개 천생이건마는 국모 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말)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구절은 잊어버리고 한갓 영귀와 총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감리사 이재정, 경무관 김윤정,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모두 양심에 찔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 말이 끝난 뒤에도 한참 잠자코 있던 이 감리사가 마치 내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은 언성으로,  "창수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감을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참괴한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주시오." 하고 말에도 경어를 썼다. 
 이때에 김윤정이 아직 내 병이 위험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이 감리사에게 수군수군하더니, 옥사정을 명하여 나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했다. 내가 옥사정의 등에 업혀 나가노라니 많은 군중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얼굴에 희색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마 군중이나 관속들에게서 내가 관청에서 한 일을 듣고 약간 안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말씀이거니와 그날 내가 심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어머니는 옥문 밖에 와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업혀 나오는 꼴을 보시고 '저것이 병중에 정신없이 잘못 대답하다가 당장에 맞아 죽지나 않나'하고 무척 근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감리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는 둥, 내가 일본 순사를 호령하여 내쫓았다는 둥, 김창수는 해주 사는 소년인데 민 중전마마의 원수를 갚느라고 왜놈을 때려죽였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셨다고 하셨다. 나를 업고 가는 옥사정이 어머니 앞을 지나가며, "마나님, 아무 걱정 마시오. 어쩌면 이런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 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감방에 돌아오는 길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나를 전과 같이 다른 도적과 함께 차꼬를 채워두는 데 대하여 나는 크게 분개하여 벽력같은 소리로, "내가 아무 의사도 발표하기 전에는 나를 강도로 대우하거나 무엇으로 하거나 잠자코 있었다마는 이왕 내가 할 말을 다 한 오늘날에도 나를 이렇게 홀대한단 말이냐. 땅에 금을 그어놓고 이것이 옥이라 하더라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 달이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겠느냐. 너희 관리들은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한단 말이냐." 
 하면서 어떻게나 내가 몸을 요동하였던지 한 차꼬 구멍에 발목을 넣고 있는 8명 죄수 모두가 말을 더 보태어서, 내가 한 다리로 차꼬를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자기네 발목이 다 부러졌노라고 떠들었다. 이 소동을 듣고 경무관 김윤정이 들어와서,  "이 사람은 다른 죄수와 다르거늘 왜 도적 죄수와 같이 둔단 말이냐. 즉각으로 이 사람을 좋은 방으로 옮기고 일체 몸은 구속치 말고 너희들이 잘 보호하렷다." 하고 옥사정을 한편 책망하고 한편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옥중에서 왕이 되었다. 
 그런지 얼마 아니하여서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말씀이, 아까 내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김 경무관이 돈 150냥(30원)을 보내며 내게 보약을 사 먹이라 하였다 하며, 어머니께서 우거하시는 집주인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손님들까지도 매우 나를 존경하여서,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엇을 자시고 싶어하거든 말만 하면 해드리리다."하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홉 사람의 발목을 넣은 큰 차꼬를 한 발로 들고 일어났다는 것은 이화보를 여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가 잡혀 와서 고생하는 이유가 살인한 죄인을 놓아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밥 일곱 그릇 먹고 700리 가는 장사를 어떻게 결박을 지우느냐고 변명하던 그의 말이 오늘에야 증명된 것이었다. 
 이튿날부터는 내게 면회를 구하는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감리서, 경무청, 순검청, 사령청의 수백 명 관속들이 내게 대한 선전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에서 세력 있는 사람 중에도, 또 막벌이꾼 중에도 다음 번 내 심문날에는 미리 알려달라고 아는 관속들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둘째 심문날에도 나는 전번과 같이 압뢰의 등에 업혀서 나갔는데, 옥문 밖에 나서면서 둘러보니 길에는 사람이 가득 찼고, 경무청에는 각 관아의 관리와 항내의 유력자들이 모인 모양이요, 담장이나 지붕이나 내가 심문을 받을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올라가 있었다. 
 정내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 슬쩍 내 곁으로 지나가며,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한다. 김윤정은 지금은 경기도 참여관이라는 왜의 벼슬을 하고 있으나 그 때에 나는 그가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설마 관청을 연극장으로 알고 나를 한 배우로 삼아서 구경거리를 만든 것일 리는 없으니, 필시 항심 없는 무리의 일이라 그때에는 참으로 의기가 생겼다가 날이 감에 따라서 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 심문에서 나는 할 말은 전번에 다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고 한마디로 끝내고, 뒷방에 앉아서 나를 넘겨다보고 있는 와타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퍼부었다. 
 그 이튿날부터는 더더욱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내 의기를 사모하여 왔노라, 어디 사는 아무개니 내가 출옥하거든 만나자, 설마 내 고생이 오래랴, 안심하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을 한 상씩 잘 차려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가져온 사람이 보는 데서 한두 젓가락 먹고는 나머지는 죄수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었다. 
 그때의 감옥 제도는 지금과는 달라서 옥에서 하루 삼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짚신을 삼아서 거리에 내다 팔아서 쌀을 사다가 죽이나 끓여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온 좋은 음식을 얻어먹는 것은 그들의 큰 낙이었다. 
 제 3차 심문은 경무청에서가 아니요, 감리서에서 감리 이재정 자신이 하였는데, 인천 인사가 많이 모인 모양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방청이다. 감리는 내게 대하여 매우 친절히 말을 묻고, 다 묻고 나서는 심문서를 내게 보여 읽게 하고 고칠 것은 나더러 고치라 하여 수정이 끝난 뒤에 나는 '백(白)' 자에 이름을 두었다. 이날은 일본인이 없었다. 
 수일 후에 일본인이 내 사진을 박는다 하여 나는 또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이날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김윤정은 내 귀에 들리라고,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딱 부릅뜨고 박히시오." 한다. 
 그러나 우리 관원과 일본인 사이에 사진을 박히리, 못 박히리 하는 문제가 일어나서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청사 내에서 사진을 박는 것은 허할 수 없으니 길위 노상에서나 박으라 하여서 나를 노상에 앉혔다. 일인이 나를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 모양을 하여달라고 요구한 데 대하여 김윤정은, "이 사람은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계하죄인인즉 대군주 폐하께서 분부가 계시기 전에는 그 몸에 형구를 댈 수 없다." 하여서 딱 거절하였다. 
 그런즉 일인이 다시 말하기를,  "형법이 곧 대군주 폐하의 명령이 아니오? 그런즉 김창수를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얽는 것이 옳지 않소?"하고 기어이 나를 결박하여 놓고 사진박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김윤정은, "갑오경장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는 형구는 폐하였소." 하고 잡아뗀다. 그런즉 왜는 또, "귀국 감옥 죄수들을 본즉 다 쇠사슬을 하고 다니는데……."하고 깐깐하게 대들었다.  이에 김 경무관은 와락 성을 내며, "죄수의 사진을 찍는 것은 조약에 정한 의무는 아니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세세한 일에 내정 간섭은 받을 수 없소"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는다. 둘러섰던 관중들은 경무관이 명관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길에 앉은 대로 사진을 박게 되었는데, 일인이 다시 경무관에게 애걸하여서 겨우 내 옆에 포승을 놓고 사진을 박는 허가를 얻었다.  나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회복되었으므로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왜놈들이 우리 국모 민 중전마마를 죽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왜놈의 독이 궐내에만 그칠 줄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죽이시오. 왜놈을 죽여야 우리가 사오."하고 나는 고함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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