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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방랑의 길 ②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웠다. 용담은 다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었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어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용담께 시중하는 상좌 혜명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 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 년도 다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7, 80 노인이시니 그 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백 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징적멸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 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러 망쳐 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에 고 후조 선생(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다)도 뵙고 싶고, 그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데야 할 수 있느냐."
 하시고 즉석에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동안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주셨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을 받아 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였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때까지 서울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장단 화장사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수양산 신광사 부근의 북암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사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었더니 바로 4월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월 13일에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으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는 두 분이 꿈자리만 사나와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하신 지 이태 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다고 하셨다.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오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관동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잔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 번 수작을 붙여 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소승 문안 드리오."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 전우의 문인 최재학으로 호를 극암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은 이었다. 나는 공주 마곡사 중이란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에 전 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몇 마디 도리의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극암은 전참령에게,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시오?"
 하고 나를 추천한다.
 전참령은,
 "거 좋은 말씀이요.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 의향이 어떠시오? 내가 내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 막심하던 중이요."
 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소승의 방랑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하고 한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고 싶었던 까닭이다.
 전참령은 평양서윤 홍순욱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으로 영천사 방주를 차정함'하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영천암은 평양서 서쪽으로 약 40리, 대보산에 있는 암자로서 대동강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혜정과 같이 영천암으로 가서 부모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시게 하고 나는 혜정과 같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학생이란 것은 전효순의 아들 병헌, 그의 사위 김윤문의 세 아들 장손, 중손, 차손과 그 밖에 김동원 등 몇몇이 있었다. 전효순은 간일하여 좋은 음식을 평양에서 지워 보내고 또 산밑 신흥동에 있는 육고에서 영천사에 고기를 대기로 하여 나는 매일 내려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끓이고 굽고 하여 중의 옷을 입은 채로 터놓고 막 먹었다. 때때로 최재학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서도 사숭재에서 시인 황경환 등과 시화나 하고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막 먹었다. 그리고 염불은 아니하고 시만 외우니 불가에서 이르는 바 '손에 돼지 대가리를 들고 입으로 경을 읽는' 중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 시승 원종이라는 칭호는 얻었으나 같이 와 있던 혜정에게 실망을 주었다. 혜정은 내 심신이 쇠하고 속심만 증장하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고기 안주에 술 취한 중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불심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영천암을 떠난다 하여 행리를 지고 나서서 산을 내려가다가는 차마 나와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되돌아오기를 달포나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로 간다고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를 깎는 것을 원치 아니하셔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하고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고, 창수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 저지르기를 하지나 않나 하고 친한 이는 걱정하고 남들은 비웃었다. 그 중에도 준영 계부는 아무리 하여도 나를 신임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지금은 마음을 잡아서 그 중씨이신 아버지께도 공순하고 농사도 잘하시건마는 내게 대하여는 도리없는 난봉으로 아시는 모양이어서,
 "되지 못한 그놈의 글 다 내버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한다면 장가도 들여 주고 살림도 시켜 주지만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는 몰라요."
 하고 부모님께 나를 농군이 되도록 명령하시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농군을 만드실 뜻이 없으셔서 그래도 무슨 큰 뜻이 있어 장래에 이름난 사람이 되려니 하고 내게 희망을 붙이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내가 농군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버지 형제분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동안에 기해년도 다 가고 경자년 봄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계부는 조카인 나를 꼭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하신 모양이어서 새벽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여 가지고는 가래질터로 끌고 나갔다. 나는 며칠 동안 순순히 계부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붙지 아니하여 몰래 강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고 선생과 안 진사를 못 찾고 가는 것이 섭섭하였으나 아직 내어놓고 다닐 계제도 아니므로 생소한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김두래라고 변명하고 강화에 도착하여서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으니 김주경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하고 그 세째 아우 진경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나를 접대하였다.
 "나는 연안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백씨와 막역한 동지일러니 수년간 소식을 몰라서 전위해 찾아온 길일세."
 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경진은 나를 반가이 맞아 그동안 지낸 일을 말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주경은 집을 떠난 후로 3, 4년이 되어도 음신이 없어서 진경이가 형수를 모시고 조카들을 기르고 있다고 했다. 집은 비록 초가나, 본래는 크고 넓게 썩 잘 지었는데 여러 해 거두지를 아니하여 많이 퇴락되었다.
 사랑에는 평소에 주경이 앉았던 보료가 있고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친히 벌하기에 쓰던 것이라는 나무 몽둥이가 벽상에 걸려 있었다. 나와 노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주경의 아들인데 이름이 윤태라고 했다.
 나는 진경에게 모처럼 그 형을 찾아왔다가 그저 돌아가기가 섭섭하니 얼마 동안 윤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였더니 진경은, 그렇지 않아도 윤태와 그 중형의 두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건마는 적당한 선생이 없어서 놀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곧 그 중형 무경에게로 가서 조카 둘을 데려왔다. 나는 이날부터 촌 학구가 된 것이었다. 윤태는 "동몽선습", 무경의 큰 아들은 "사략초권", 작은 놈은 "천자문"을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차차 학동이 늘어서 한 달이 못 되어 삼십 명이나 되었다. 나는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이렇게 한 지 석 달을 지낸 어느 날, 진경은 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글쎄 유인무도 우스운 사람이야. 김창수가 왜 우리 집에를 온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도 진경은 내게 설명하였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__
 유인무는 부평 양반으로서 연전에 상제로 읍에서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이우해 와서 3년쯤 살다가 간 사람인데, 그때에 김주경과 반상의 별을 초월하여 서로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는데 김창수가 인천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후에 여러 번째 해주 김창수가 오거든 급히 알려 달라는 편지를 하였는데 이번에 통진 사는 이춘백이라는 김주경과도 친한 친구를 보내니 의심 말고 김창수의 소식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진경이가 내 행색을 아나 떠보려고,
 "김창수가 그래 한 번도 안 왔나?"
 하고 물었다. 진경은 딱하다는 듯,
 "형장도 생각해 보시오. 여기서 인천이 지척인데 피신해 다니는 김창수가 왜 오겠소?"
 한다.
 "그럼 유인무가 왜놈의 염탐군인 게지."
 나는 이렇게 진경에게 물어 보았다. 진경은,
 "아니오. 유인무라는 이는 그런 양반이 아니오. 친히 뵈온 적은 없으나, 형님 말씀이 유 생원은 보통 벼슬하는 양반과는 달라서 학자의 기풍이 있다고 하오."
 하고 유인무의 인물을 극구 칭송한다. 나는 그 이상 더 묻는 것도 수상쩍을 것 같아서 그만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5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윤태를 보고,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 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윽고 진경이가 윤태를 앞세우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백씨 소식 못 들었지?"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네, 어제 받았습니다."
 주객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란 양반이 지각이 없으시지,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 우리 집에 왜 오리라고 자꾸 편지를 하는 거야요?"
 "자네 말이 옳지마는 여기밖에 알아 볼 데가 없지 아니한가. 그가 해주 본 고향에 갔을 리는 없고 설사 그 집에서 김창수 있는 데를 알기로서니 발설을 할 리가 있겠나.
 유인무로 말하면 아랫녁에 내려가 살다가 서울 다니러 왔던 길에 자네 백씨가 김창수를 구해 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부지거처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나네 백씨의 의기를 장히 여겨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김창수를 건져 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나, 법으로 백씨가 할 것을 다하여도 안 되었으니 인제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서 열 세 명 결사대를 조직하였던 것일세.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야. 그래서 인천항 중요한 곳 7,8처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불을 놓고 그 소란통에 옥을 깨뜨리고 김창수를 살려 내기로 하고 유인무가 나에게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에 가서 감옥 형편을 알아오라 하기로 가 본즉, 김창수는 벌써 사흘전에 다른 죄수 네 명을 데리고 달아난 뒤라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일세. 그러니 유인무가 자네 백씨나 김창수의 소식을 알고 싶어 할 것이 아닌가. 그래 정말 김창수한테서 무슨 편지라도 온 것이 없나?"
 "편지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기다릴 만하면 본인이 오지요."
 "그도 그러이."
 "이 생원께서는 인제 서울로 가시렵니까?"
 "오늘은 친구나 몇 찾고 내일 가겠네. 떠날 때에 또 옴세."
 이러한 문답이 있고 이춘백은 가 버렸다.
 나는 유인무를 믿고 그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내게 그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는지 모른다 하여도 군자는 가기이방이라 의리로 알고 속은 것이 내 허물은 아니다. 이만큼 하는 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진경에게 이튿날 이춘백이 오거든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진경에게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자백하고 유인무를 만나기 위하여 이춘백을 따라서 떠날 것을 말하였다. 진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님이 과시 그러시면 제가 만류를 어찌합니까."
 하고 인천옥에 사령반수로서 처음으로 김주경에게 내 말을 알린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하고 학동들에게는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를 가시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하여 돌려보냈다.
 이윽고 이춘백이 왔다. 진경은 그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나도 서울을 가니 동행하자고 하였더니 이춘백은 보통 길동무로 알고 좋다고 하였다. 진경은 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에 들어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춘백과 함께 진경의 집을 떠났다. 남문통에는 30명 학동과 그 학부형들이 길이 메이도록 모여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도무지 아무 훈료도 아니 받고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친 것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모양이어서 나는 기뻤다.
 우리는 당일로 공덕리 박진사 태병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얼마 있더니 키는 중키가 못 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검소한 옷을 입은 생원님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내가 유인무요, 오시기에 신고하셨소. 남아하처불상봉이라더니 마침내 창수 형을 만나고 말았소."
 하고 유인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춘백을 보며,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손 낙심할 것이 아니란 말일세. 끝끝내 구하면 반드시 얻는 날이 있단 말야. 전일에도 안 그러던가."
 하는 말에서 나는 그네가 나를 찾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는 유인무에게,
 "강화 김주경 댁에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근로하신 것을 알았고, 오늘 존안을 뵈옵거니와 세상에서 침소봉대로 전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제 실물로 보시니 낙심되실 줄 아오. 부끄럽소이다."
 하였다.
 "내가 내 과거를 검사하였더니 용두사미란 말요."
 유인무는,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보겠지요."
 하고 웃었다.
 주인 박태병은 유인무와 동서라고 하였다. 나는 박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문안 유인무의 숙소로 가서 거기서 묵으면서 음식점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돌아다녔다. 며칠을 지나서 유인무는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 나를 충청도 연산 광이다리 도림리 이천경의 집으로 지시하였다.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에게 보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지례군 천곡 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 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 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 호를 연하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유인무는 큰 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이었고 무주 군수 이탁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유인무와는 다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하고 한탄하였다.
 나는 유인무의 깊은 뜻에 감사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2월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연산 이천경의 가대로 이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유인무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어서 강화 버드러지 주 진사 윤호에게로 보내었다. 나는 김주경 집 소식을 염문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주 진사는 내게 백동전으로 4천냥을 내어 주고 노자를 삼으라고 하였다. 대체 유인무의 동지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들은 편지 한 장으로 만사에 서로 어김이 없었다. 주 진사 집은 바닷가여서 동짓달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생선이 흔하여서 수일간 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백동전 4천 냥을 전대에 넣어서 칭칭 몸에 둘러 감고 서울을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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