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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방랑의 길 ③

서울에 와서 유인무의 집에 묵다가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황천이라고 쓰라시는 꿈을 꾸고 유인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계시다가 조금 나으신 것을 뵙고 떠나서 서울에 와서 탕약 보제를 지어 우편으로 보내 드리고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러한 흉몽을 꾸니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튿날로 해주 길을 떠났다. 나흘만에 해주읍 비동 고 선생을 뵈오니 지나간 4, 5년간에 그다지 노쇠하셨는지, 돋보기가 아니고는 글을 못 보시는 모양이셨다. 나와 약혼하였던 선생의 장손녀는 청계동 김사집이란 어떤 농가집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었다 하고, 나더러 아재라고 부르던 작은 손녀가 벌써 10여 세가 된 것이, 나를 알아 보고 여전히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왜를 죽인 일을 고 선생께서 유의암에게 말씀하여 유의암이 그의 저인 "소의신편"의 속편에 나를 의기남아라고 써 넣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의병에 실패하고 평산으로 왔을 때, 고 선생은 내가 서간도에 다녀왔을 때에 보고했던 것을 말씀하여 의암이 그리로 가서 근거를 정하고 양병하기로 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거기서 공자상을 모시고 무사를 모아서 훈련하니 나도 그리로 감이 어떠냐 하셨으나 존중화양이적이란 고 선생 일류의 사상은 벌써 나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내 신사상을 힘써 말하였으나 고 선생의 귀에는 그것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어서,
 "자네도 개화꾼이 되었네 그려."
 하실 뿐이었다. 나는 서양 문명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그 문명을 수입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함이 아니고는 국맥을 보존할 수 없는 연유를 설명하였으나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적의 도는 좇을 수 없다 하여 내 말을 물리치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이미 나와는 딴 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 선생 댁에서는 당 성냥 하나라도 외국 물건이라고는, 쓰지 않는 것이 매우 고상하게 보였다. 고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 떠난 것이 선생과 나와의 영결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 선생은 그 후 충청도 제천의 어느 일가 집에서 객사하셨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날까지 30여년에 나와 용심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의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하신 교훈의 힘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자애가 깊으신 존안을 뵈올 수 없으니 아아, 슬프고 슬프다.
 나는 고 선생을 하직하고 떠나서 당일로 텃골 본집에 다다르니 황혼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부엌으로 나오시며,
 "아이 네가 오는구나.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시다. 아까 아버지가 이 애가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서 있느냐 하시기로 헛소리로만 여겼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하셨다.
 내가 급히 들어가 뵈오니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시기는 하나 병세는 과연 위중하였다.
 나는 정성껏 시탕을 하였으나 약효를 보지 못하고 열 나흘만에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가셨다. 내 손목을 꼭 쥐셨던 아버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시더니 곧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나의 평생의 지기인 유인무, 성태영 등의 호의대로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 이제 아주 다시 못 돌아오실 길을 떠나시니 천고의 유한이다.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 데다가 빈한한 우리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을 쓸 처지도 못 되어서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단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나도 단지나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리라 하였으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넙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는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 듯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저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 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것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 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유인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였더니 유인무는 서울에 없었다 하여 성태영이 혼자 나귀를 달려 5백 리 먼 길에 조상을 왔다.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 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 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 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 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말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 등이었다.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이라는 끝의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여서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나를 방에 들여 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하여도 당자 대면 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처자를 향하여 인사말을 붙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나는 다시,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내가 지금 상중이니 일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고 빈정거리셨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될 사람을 가르쳤다.
 어느덧 일년도 지나서 계묘년 2월에 아버지의 담제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 김윤오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이 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진사 인형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 아들 기원, 오봉형의 아들 둘, 오면형의 아들과 딸, 오순형의 딸 형제와 그 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로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세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어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일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친 것은 장연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아직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에 명성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뒤에 목사가 되었다)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한 번은 군수 윤구영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 정창극이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백 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을 타라는 것이었지만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나에게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일흔 냥을 쓰고 일백 서른 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집세기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면 적어도 2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 배를 부리기 이태만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었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에 능통하여 종교서적을 보고 강단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윤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복간도 관리사 서상무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지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유,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 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 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여러 번 혼약이 되고도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 낸 두 딸 중의 막내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 영수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 군예분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이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로 공부를 보내어 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진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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