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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족에 내놓은 몸 ③


 그 다음의 악형은 화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 놓고 그것으로 벌거벗은 사람의 몸을 막 지지는 것이다. 그 다음의 악형은 세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만한 모난 막대기를 끼우고 그 막대기 두 끝을 노끈으로 꼭 졸라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을 거꾸로 달고 코에 물을 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형을 당하면 나도 악을 내어서 참을 수도 있지마는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밥을 부쩍 줄여서 겨우 죽지 아니할 만큼 먹이는 것인데 이리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밥을 받아서 먹는 고기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늘 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박영효의 부친이 옥중에서 섬거적을 뜯어 먹다가 죽었다는 말이며, 옛날 소무가 전을 씹어 먹으며 19년 동안 한나라 절개를 지켰다는 글을 생각할 때에 나는 사람의 마음은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차입밥!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그러나 왜놈들이 원하는 자백을 아니하면 차입은 허하지 아니한다.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저희들의 비위에 맞는 소리로 답변을 해야만 차입을 허하는 것이다. 나는 종내 차입을 못 받았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김구 밥 가져 왔어요."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때마다 왜놈이,"깅 가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시이래 일이 오브소다."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대였다. 내가 아내를 팔아서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경무총감 명석의 방으로 나를 불러들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더할 수 없는 하지하천의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에게 이 우대가 기쁘지 않음이 아니었다.
 명석이 놈이 내게 한 말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가 신부민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만 표시하면 즉각으로 자기가 총독에게 보고하여 옥고를 면하게 할 터이요, 또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순전히 일본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높은 조선 인사를 얻어서 정치를 하게 하려 하니 그대와 같이 충후한 장자로서 대세의 추이를 모를 바 아닌즉 순응함이 어떠냐. 그런즉 안명근 사건에 대한 것은 사실대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석에게 대하여, "당신이 나의 충후함을 인정하거든 내가 자초로부터 공술한 것도 믿으시오." 하였다. 그놈은 가장 점잖은 체모를 가지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오늘 내가 불려 나와서 처음에 당장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이놈의 방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었다.
 이놈은 국우라는 경시다. 그는 제가 대만에 있을 때에 어떤 대만인 피의자 하나를 담임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집하다가 검사국에 가서야 일체를 자백하였노라 하는 편지를 국우에게 보내었다 하며, 나도 검사국에 넘어가거든 잘 자백을 할 터이니 그러면 검사의 동정을 얻으리라 하고 전화로 국수장국에 고기를 많이 넣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것을 내 앞에 놓고 먹기를 청한다. 나는 나를 무죄로 한다면 이 음식을 먹으려니와 나를 유죄로 한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고 숟가락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런즉 그놈이, “김구씨는 한문병자야. 김구는 내게 동정을 아니하지마는 나는 자연히 김구씨께 동정이 간단 말요.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마 드리는 대접이니 식기 전에 어서 자시오.” 한다. 그래도 나는 일향 사양하였더니 국우는 웃으면서 한자로,
 '(군의치독부)  그대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가.'
 하는 다섯 자를 써 보이며, 이제는 심문도 종결되었고 오늘부터는 사식 차입도 허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그 장국을 받아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이라 하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서 사식을 들여 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그와 한 방에서만 먹으면 그를 나눠줄 수도 있겠지마는 사식은 딴 방에 불러내어서 먹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들어와서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뿐이요, 이튿날 나는 종로 구치감으로 넘어갔다. 방은 독방이라 심심하나 모든 것이 총감부보다는 편하고 거기서 주는 감식이라는 밥도 총감부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내 사건은 사실대로만 처단한다 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극형이라 하여 징역 일년밖에 안될 것이지마는 나를 억지로 안명근의 강도사건에 끌어다 붙이려 하였다. 내가 억지로라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서간도에 이민을 하고 무관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이동녕을 파견할 회의를 한 날짜가 바로 안악에서 안명근, 김홍량 등이 부호를 협박할 의논을 하였다 하는 그 날짜이므로 나는 도저히 안악에서 한 회의에 참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안악 양산학교 교직의 아들 이원형이라 하는 14세 되는 어린아이를 협박하여 내가 그 자리에 참예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거짓 증언을 시켜서 나를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옭아 넣었다. 애매하기로 말하면 김홍량이나 도인권이나 김용제나 다 애매하지마는 그래도 이들은 그날 안악에는 있었으니 회의에 참예했다고 억지로 우겨댈 수도 있겠으나 5백 리 밖에서 다른 회의에 참예하였다고 저희 기록에 써놓은 내가, 같은 날에 안악의 회의에도 참예했다는 것은 요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내게 대한 유일한 증인인 이원형 소년이 내가 심문 받는 옆방에서 심문 받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는 안명근과 김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이도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하는 말에 원형은, "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하였다.
 검사정에서도 이원형을 증인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 소년이, "네." 하는 대답이 있자마자 다른 말이 더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 곧 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5백 리를 새에 둔 회의에 한 날에 참예하는 김구를 만드노라고 매우 수고롭겠다고 검사에게 말하였더니 검사는 그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종결!" 하고 심문이 끝난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경무총감부에 갇혀 있을 그때 의병장 강기동도 잡혀 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의병으로 다니다가 귀순하여서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형을 당할 의병 10여명이 갇힌 감방을 수직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감방문을 열어 의병들을 다 내어놓고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꺼내어 일제히 무장을 하고 그도 같이 달아나서 경기, 충청, 강원도 등지로 왜병과 싸우고 돌아다니다가 안기동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원산에 들어가 무슨 계획을 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다. 그는 육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김좌진도 애국운동으로 강도로 몰려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을 하였다.
 하루는 안악 군수 이모라는 자가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서 양산학교 집과 기구를 공립보통학교에 내어놓는다는 도장을 찍으라고 하므로, 나는 집은 나랏집이니까 내어놓지마는 기구는 사삿 것이니 사립학교인 양산학교에 기부한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공립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양산학교는 우리들 불온분자들의 학교라 하여 강제로 폐지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다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특별히 손두환과 우기범 두 학생이 생각났다. 재주로나 뜻으로나 특출하였고 어리면서도 망국 한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여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던 김홍량도 자기가 안명근의 부탁으로 신천 이원식에게 권고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으니 도저히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심혈을 다 바치던 교육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믿고 사랑하던 동지도 이제는 살아 나갈 길이 망연하니 분하기 그지 없었다. 어머니는 안악에 있던 가장집물을 다 팔아 가지고 내 옥바라지를 하시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처와 딸 화경이는 평산 처형네 집에 들렸다가 공판날이 되어서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어머니가 손수 담으신 밥그릇을 열어 밥을 떠 먹으며 생각하니 이 밥에 어머니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나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니 혼자셨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
 이렁저렁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 지방 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화경이를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우리는 2호 법정이라는 데로 끌려 들어갔다. 법정 피고석 걸상에 앉은 차례는 수석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세째로는 나 그리고는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모두 열 다섯 명이 늘어앉고 방청석을 돌아보니 피고인의 친척, 친지와 남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변호사, 신문기자석에도 다 사람이 있었다. 한필호 선생이 경무총감부에서 매맞아 별세하고 신석충 진사는 사리원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에서 투신 자살을 하였단 말을 여기서 들었다.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징역 종신이요, 김홍량, 김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일곱 명은 징역15년(원행섭, 박만준은 궐석이었다), 도인권, 양성진이 10년,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각각 7년, 또는 5년이니 이것은 강도사건 관계요, 보안법사건으로는 양기탁을 주범으로 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과 이름은 잊었으나 김용규의 족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판결되기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징역 2년이요, 나머지는 1년으로부터 6개월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지 아니하고 소위 행정처분으로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영옥 등 19인은 무의도, 제주도, 고금도, 울릉도로 일년간 거주 제한이라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홍량이나 나는 강도로 15년, 보안법으로 2년, 모두 17년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판결이 확정되어 우리는 종로 구치감을 떠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미결수였으나 이제부터는 변통없는 전중이었다. 동지들의 얼굴을 날마다 서로 대하게 되고 이따금 말로 통정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위로였다.
 7년, 5년 징역까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마는 10년,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에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옥중에 있는 동지들은 대개 아들이 있었으나 나는 딸이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이 없었다. 김용제 군은 아들이 4형제나 되므로 그 세째 아들 문량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한다고 허락하였다. 나도 동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꼭지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 보는 동안에 모두 좀 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내력을 다 뚫어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한 자인 것 같다.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허위 이강년 같은 큰 애국지사의 부하로 의병을 다니다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인물로나 식견으로나 보잘 것 없음을 볼 때에는 낙심도 되지마는 이재명, 안중근 같은 의사의 동지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의 애국심이 불같고 정신이 씩씩한 것을 보면, 교육만 하면 우리 민족은 좋은 국민이 될 것을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저 무지한 의병들도 일본에 복종하는 백성이 되지 아니하고 10년, 15년의 벌을 받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고후조 선생 같은 어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랴.
 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심리가 차차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엇에나 저를 책망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은 어디까지나 용서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태도가 변하여서 일본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나 미워하고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결심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다른 죄수들과 같이 왜놈 간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척 괴롭고 부끄러웠다. 다른 죄수들은 대의를 몰라서 그러하거니와 너는 고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고 양심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밭갈고 길쌈함이 없이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왔다. 그 먹은 밥과 입은 옷이 누구에게서 나왔느냐, 우리 대한 나라의 것이 아니냐. 나라가 나를 오늘날까지 먹이고 입힌 것이 왜놈에게 순종하여 붉은 요에 콩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식인지식의인 소지평생막유위)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내가 대한 나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아 왔으니 이 수치를 참고 살아나서 앞으로 17년 후에 이 은혜를 갚을 공을 세울 수가 있느냐.
 내가 이 모양으로 고민할 때에 안명근 군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고 내게 말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할 수 있거든 단행하시오." 하였다. 그날부터 안명근은 배가 아프다고 칭하고 제게 들어오는 밥은 다른 죄수에게 나눠주고 4,5일을 연해 굶어서 기운이 탈진하였다. 감옥에서는 의사를 시켜 진찰케 하였으나 아무 병이 없으므로 안명근을 결박하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 등속을 흘려 넣어서 죽으려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었다. 죽을 자유조차 없는 이 자리였다.
 "나는 또 밥을 먹소,"하고 안명근은 내게 기별하였다.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 총독 암살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진행 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에 뭉우리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것으로 될까?
 내가 복역한 지 칠팔 삭 만에 어머니께서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로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간수 한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 주랴?" 하시고 어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니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참말 갸륵하셨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발부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루 두 번 들여 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눠 주었다. 그들은 받아 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 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그때에 내게 얻어 먹는 편이 들고 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 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대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통통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기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끄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끄른 자리에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군은 옴이 올라서 옴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말간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였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져서 최명식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동이라 하는 간수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내어 세워 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헷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였다. 그리고 만기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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