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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 이제 육십 칠,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 삼세 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나는 왜 "백범일지"를 썼던고?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지키기 10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남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동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경사건과 상해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나는 내 가죽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는 뜻으로 쓴 것이 이 "백범일지"다.
 나는 이것을 등사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몇 분 동지에게 보내어 후일 내 아들에게 보여주기를 부탁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땅을 얻지 못하고, 천한 목숨이 아직 남아서 "백범일지" 하권을 쓰게 되었다. 이때에는 내 두 아들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그날을 위하여서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를 은감으로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하권을 쓸 때의 정세는 상해에서 상권을 쓸 때의 것보다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때로 말하면 임시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위원과 십수 인의 의정원 의원 외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정부였었다. 
 그런데 하권을 쓰는 오늘날로 말하면 중국 본토에 있는 한인의 각당 각파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옹호할 뿐더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만여 명 동포가 이 정부를 추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상납하고 있다. 또 외교로 보더라도 종래에는 중국, 소련, 미국의 정부 당국자가 비밀한 찬조는 한 일이 있으나 공식으로는 거래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씨가, "한국은 장래에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될 것이라." 고 방송하였고 중국에서도 입법원장 손과씨가 공공한 석상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함에 있다."고 부르짖었으며, 우리 자신도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외교와 선전에 힘을 쓰고 있고, 또 군정으로 보더라도 한국 광복군이 정식으로 조직되어 이청천으로 총사령을 삼아 서안에 사령부를 두고 군사의 모집과 훈련과 작전을 계획 중이며, 재정도 종래에는 독립운동의 침체, 인심의 퇴축, 적의 압박, 경제의 곤란 등으로 임시정부의 수입이 해가 갈수록 감하여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지경이던 것이 홍구 포탄 사건 이래로 내외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서 점차로 정부의 수입도 늘어, 민국 23년도에는 수입이 53만원 이상에 달하였으니, 실로 임시정부 설립 이래의 첫기록이었다.
 이 모양으로 임시정부의 상태는 이 책 상권을 쓸 때보다 나아졌지마는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부일 노병과 노쇠를 영접하기에 골몰했다. 상해시대를 죽자고나 하던 시대라 하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 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와 인천 축항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매산, 명근 형도 모처럼 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 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5. 3.1 운동의 상해 ①
 기미년 3월, 안동현에서 영국 사람 쏠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학교 의논을 하고 헤어지고는 10여 년 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에 광복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았던 선생의 좋던 신수는 10여 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민족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인사들이 임시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등 부서가 있어 광복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정부 문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 때였다.
 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
 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때에 범죄자의 처벌이 설유방송이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의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려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는 보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복과 사복의 경호원 20여 명을 썼다. 이로써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 조제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 온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왜구 전중의 일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마두에서 오성륜이 그에게 포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이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에 일본, 영국, 법국 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을 앞세우고 내 침실로 들어섰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며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치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를 아울러 모두 석방해 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에는 나가지 아니하였다.
 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고동 정탐 선우갑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 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강인우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구한군 내무대신 동농 김가진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의한의 처의 종형 정필화를 보내어 동농 선생을 귀국케 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정가를 검거하여 심문한즉 낱낱이 자백하므로 처교하였다.
 황학선은 해주 사람으로 3.1 운동 이전에 상해에 온 자인데 가장 우리 운동에 열심이 있는 듯하기로 타처에 오는 지사들을 그 집에 유숙케 하였더니 그 자가 이것을 기화로 하여 일변 왜 영사관과 통하여 거기서 돈을 얻어 쓰고 일변 애국 청년에게 임시정부를 악선전하여 나창헌, 김의한 등 십수 명이 작당하여 임시정부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고 범인은 전부 경무국의 손에 체포되었다가 그들이 황학선의 모략에 속은 것이 분명하므로 모두 설유하여 방송하고 그때에 중상한 나창헌, 김기제는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황학선이가 왜 영사관에서 자금과 지령을 받아 우리 정부 각 총장과 경무국장을 살해할 계획으로 나창헌이 경성의전의 학생이던 것을 이용하여 삼 층 양옥을 세 내어 병원 간판을 붙이고, 총장들과 나를 그리로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이던 것이 판명되었다.
 나는 이 문초의 기록을 나 창헌에게 보였더니 그는 펄펄 뛰며 속은 것을 자백하고 장인 황학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황학선은 처교된 뒤였다. 나는 나. 김 등이 전연 악의가 없고 황의 모략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한 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경무국장 면회를 청하기로 만났다. 그는 나를 대하자 곧 낙루하며 단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 앞에 내어 놓으며, 자기는 수일 전에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왔는데 왜 영사관에서 그의 체격이 건장함을 보고 김 구를 죽이라 하고 성공하면 돈도 많이 주려니와 설사 실패하여 그가 죽는 경우에는 그의 가족에게는 나라에서 좋은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도록 할 터이라 하고, 만일 이에 응치 아니하면 그를 '불령선인'으로 엄벌한다 하기로 부득이 그러마 하고 무기를 품고 법조계에 들어와 길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자기도 대한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상하랴 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단총과 수첩을 내게 바치고 자기는 먼 지방으로 달아나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놓아 보냈다.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거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을 말라.'는 것을 신조로 하여 살아왔거니와 그 때문에 실패한 일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한태규 사건이 그 예다.
 한태규는 평양 사람으로서 매우 근실하여 내가 7, 8년을 부리는 동안에 내외국인의 신임을 얻었었다. 내가 경무국장을 사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계원 노백린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뒤 노변에 한복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하기로 나가 본즉 그것은 명주의 시체였다.
 명주는 상해에 온 후로 정인과, 황석남이 빌어 가지고 있는 집에 식모로도 있었고 젊은 사내들과 추행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 여자다. 어느 날 밤에 한 번 한태규가 이 여자를 동반하여 가는 것을 보고 한 군도 젊은 사람이니 그러나 보다 하고 지나친 것이 얼마 오래지 아니한 것이 기억되었다.
 시체를 검사하니 피살이 분명하다. 머리에 피가 묻었으니 처음에는 때린 모양이요, 목에는 바로 매었던 자국이 있는데 그 수법이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 진사에게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가르쳐 준 그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얻어 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범인이 한태규인 것이 판명되어 그 프랑스 경찰에 말하여 그를 체포케 하여 내가 배심관으로 그의 문초를 듣건대, 그는 내가 경무국장을 사임한 후로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왜에게 매수되어 그 밀정이 되어, 명주와 비밀히 통기하던 중, 명주가 한이 밀정인 눈치를 알게 되매 한은 명주가 자기의 일을 내게 밀고할 것을 겁내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명주는 행실이 부정할망정 애국심은 열렬한 여자였다. 그는 종신징역의 형을 받았다. 후에 나와 동관이던 나우도 한태규가 돈을 흔히 쓰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의심은 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고하면 내가 동지를 의심한다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아니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후에 한태규는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양력 1월 1일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제가 도리어 감옥 당국에 밀고하여 간수들이 담총하고 경비하게 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매 여러 감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칼. 몽둥이. 돌멩이. 재 같은 것을 가지고 죄수들이 뛰어 나오는 것을, 한태규가 총을 쏘아 죄수 여덟 명을 즉사케 하니, 다른 죄수들은 겁은 내어 움직이지 못하매 이 파옥 소동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하는 마당에 한태규는 제가 쏘아 죽인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증인으로 출정하더란 말을 들었고, 또 그 후에 한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같은 죄수 여덟 명을 죽인 것이 큰 공로라 하여 방면이 되었고, 전에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니 다시 써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듣건대 이 편지에 대한 회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본국으로 도망하여 무슨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런 흉악한 놈을 절대로 신임한 것이 다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서 심히 고민하였다.
 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던 일은 여기에서 끝내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신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가기를 청하기로 따라 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 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백만 루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데 2백만 루우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례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백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차 분으로 40만 루우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우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회의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코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코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코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란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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