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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초기경전 ③ 지혜와 자비의 말씀 ③

 


2.3.1.괴로움을 없애려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 혼자 고요한 곳에 앉아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 생·노·병·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생·노·병·사와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어 생(生)이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생이 있는가?’ 그러다가 마침내 참다운 지혜로써 알게 되었다. 즉,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 존재가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는가? 그렇다. 취(取)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취는 사물에 맛들이고 집착하여 돌아보고 생각하여 마음이 거기에 묶이면, 애욕이 더하고 자라나게 된다.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가 있고, 또 욕망을 인연하므로 취가 있다.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켜지고 기름과 심지를 더하면 오래 가게 된다. 그와 같이 사물을 취하고 맛들이고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면 욕망의 무더기는 더하고 자라난다.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어야 노·병·사가 없어질까?’ 그렇다, 생이 없으면 노·병·사도 없을 것이다. 존재가 없으면 생도 없다. 취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욕망을 떠나 마음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묶이지 않으면 욕망도 곧 멸할 것이다. 그 욕망이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존재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도 멸한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는 것이다. 
기름과 심지로 등불을 켜는 것이므로 기름을 더하거나 심지를 돋우지 않으면 등불은 오래지 않아 꺼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덧없이 생멸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욕망을 끊어 버리고 마음이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묶이어 집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괴로움의 무더기도 멸해 없어질 것이다.” 
『雜阿含 佛縳經』
2.3.2.너무 조이거나 늦추지 마라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聲聞) 부처님의 음성(가르침)을 따라 정진하는 출가 수행자.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여,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소오나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으로 해탈한 기쁨을 지니고 부처님을 찾아가 뵈었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의 법 안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번뇌를 다하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습니다. 또 바른 지혜로써 욕심을 떠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取)로부터의 해탈, 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 등 여섯 가지 해탈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만약 조그마한 신심으로 욕심을 떠나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소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써 자기는 성냄에서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성냄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양(利養)을 멀리 벗어나려고 닦아 익힌 것으로써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가리켜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取)로부터의 해탈,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존자 소오나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기뻐하셨고 수행자들도 한결같이 환희에 젖었다. 소오나가 그 곳을 떠나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그와 같이 말해야 한다. 소오나는 지혜로써 말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추켜세우지도 않고 남을 낮추지도 않고 그 이치를 바로 말하였다.” 
『雜阿含 二十億耳經』
2.3.3.법을 보는 이는 여래를 본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성 밖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실 때였다. 그 무렵 박칼리[跋伽梨]라는 비구는 라자가하에 있는 어떤 도공(陶工)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병은 날로 위독해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곁에서 간호하고 있는 스님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스님, 미안하지만 부처님이 계시는 죽림정사에 가서 부처님께 제 말을 전해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내 병은 날로 더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소원으로 저는 부처님을 한번 뵙고 예배를 드렸으면 싶은데, 이 몸으로 도저히 죽림정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의 뜻을 부처님께 좀 사뢰어 주십시오.” 
간호하던 스님은 부처님을 찾아가 박칼리의 소원을 여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그 길로 성 안에 있는 도공의 집으로 오셨다. 박칼리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앓는 몸을 뒤척이었다. 부처님은 박칼리의 머리맡에 앉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그대로 누워 있거라. 일어날 것 없다. 병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 
박칼리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통 먹을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 하여 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박칼리여, 너는 어떤 후회되는 일이나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은 없느냐?” 
“부처님이시여, 저는 적지 않은 후회와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뵙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후회되고 원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정색을 하고 말씀하셨다. 
“박칼리여,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형체를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형체는 덧없는 것입니다.”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도 덧없는 것입니다.” 
“박칼리여, 덧없는 존재는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주체가 없다. 또 덧없는 것에는 나와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봄으로써 내 제자들은 형체와 감각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을 싫어하고 욕심을 떠나 해탈하고 해탈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박칼리는 지혜의 눈을 떴다. 
『雜阿含』
2.3.4.복짓는 사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많은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는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설법 도중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처님은 설법이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여,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않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여,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타이름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의사 자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하셨다. 아니룻다의 증세를 살펴본 자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니룻다님이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쉰다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여,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고,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으며,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리고 여래는 열반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열반은 무엇으로 먹이를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끝내 고집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였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 하였으나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꿰어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하였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부처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여,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더 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한 법의 몸이신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도 복의 힘은 가장 으뜸이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니룻다, 너도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은 너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增一阿含 力品』
2.3.5.바다의 진리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야원에서 오백 명의 비구들과 같이 계실 때였다. 그때 부처님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젊은이를 만나 물으셨다. 
“바다 속에는 무슨 신기한 것이 있기에 너희들은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느냐?” 
젊은이는 대답했다. 
“바다 속에는 여덟 가지 처음 보는 법이 있으므로 저희들은 거기서 즐깁니다. 첫째,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넓습니다. 둘째, 바다에는 신비로운 덕이 있는데 네 개의 큰 강이 각각 오백의 작은 강과 합쳐서 바다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셋째, 바다는 모두 똑같은 한맛[一味]입니다. 넷째, 드나드는 조수가 그 때를 어기지 않습니다. 다섯째, 여러 중생들이 그 속에서 삽니다. 여섯째, 바다는 어떠한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비좁아지지 않습니다. 일곱째, 바다에는 진주와 같은 여러 가지 진귀한 보석이 있습니다. 여덟째, 바다에는 금모래가 있고 네 가지 보배로 된 수미산이 있습니다. 여래의 법에는 어떤 것이 있기에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깁니까?” 
“내게도 여덟 가지 처음 보는 법이 있어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기고 있다. 첫째, 내 법 안에는 계율이 갖추어져 있어 방일한 행이 없다. 그것은 저 바다처럼 매우 깊고 넓다. 둘째, 세상에는 네 가지 계급이 있지만 내 법 안에는 마치 네 개의 강이 바다에 들어가면 한맛이 되듯이 도를 배우게 되면 그들은 그전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셋째, 정해진 계율에 따라 차례를 어기지 않는다. 넷째, 내 법은 결국 똑같은 한맛이니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다섯째, 내 법은 갖가지 미묘한 법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에 여러 중생들이 사는 것처럼 비구들은 그것을 보고 그 안에서 즐긴다. 여섯째, 바다에 온갖 보배가 있듯이 내 법에도 온갖 보배가 있다. 일곱째, 내 법 안에는 온갖 중생들이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고 도를 닦아 열반에 든다. 그러나 내 법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다. 바다에 여러 강이 들어와도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과 같다. 여덟째, 큰 바다 밑에 금모래가 깔려 있듯이 내 법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삼매(三昧)가 있다. 비구들은 그것을 알고 즐기는 것이다.” 
젊은이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거룩하십니다. 부처님 여래의 법 가운데 처음 보는 법들은 바다의 그것보다 백 배 천 배 뛰어나 견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인의 여덟 가지 길입니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차례로 법을 말씀하셨다. 보시와 계율과 천상에 나는 법을 가르치셨고, 탐욕은 더럽고 번뇌는 큰 재앙이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열리고 의심이 풀린 것을 보시고 괴로움[苦]과 그 원인[集]과 없앰[滅]과 없애는 길[道] 등의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增一阿含 八難品』
2.3.6.법다운 보시 
라자가하에 바드리카라는 부호가 있었다. 그는 재산이 남아 주체할 수 없이 많으면서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남에게 조금도 베풀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에 지은 공덕을 까먹기만 하고 새로운 공덕을 쌓을 줄 몰랐다. 그는 어찌나 인색했던지 일곱 개의 문을 겹겹이 닫아 얻으러 오는 사람을 막았고, 그물을 쳐 새들이 뜰에 내려와 모이를 쪼아 먹는 것까지 막았다. 
어느 날 목갈라나, 카샤파, 아니룻다 들이 모여 바드리카를 교화하기로 의논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이때 바드리카는 자기 방에서 혼자 맛있는 떡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바리를 들고 나타난 아니룻다를 보고 놀랐다. 마음으로는 아주 못마땅했지만 아니룻다에게 남은 떡을 조금 주었다. 아니룻다가 돌아간 후에 그는 문지기를 불러 왜 사문을 들여놓았느냐고 꾸짖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문이 굳게 잠긴 것을 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바드리카가 이번에는 구운 떡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때 불쑥 카샤파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또 하는 수 없이 먹던 떡을 조금 떼어 주었다. 카샤파가 돌아간 후에 다시 문지기를 불러 꾸짖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몰라 잔뜩 화가 난 그는 사문들이 요술을 부려 사람을 놀리는 것이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그의 아내가 칫타[質多長者] 비구의 누이동생인데, 남편의 욕설을 듣고 말했다. 
“그렇게 욕설을 마세요. 당신은 두 스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먼저 분은 카필라의 드로노다나왕[途盧檀那, 斛飯王]의 아들 아니룻다 스님입니다. 그분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천안통(天眼通) 온갖 세상 일을 꿰뚫어 보는 능력.
이 으뜸이라고 합니다. 또 한 스님은 카필라 부호의 외아들 카샤파입니다. 그분은 뛰어난 미인을 아내로 맞았다가 함께 출가하여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부처님께 두타(頭陀) 번뇌와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산과 들에 노숙하면서 밥을 빌어 먹고 검박하게 불도를 닦음. 이런 사람을 행각승(行脚僧)이라 한다.
 제일이라고 칭찬받는 스님입니다. 그와 같은 두 스님이 우리 집에 오신 것은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언젠가 그 이름을 들은 것 같군.” 하고 바드리카는 말했다.
이때 목갈라나는 쇠그물을 뚫고 공중에 뜬 채 가부좌(跏趺坐) 좌선(坐禪)할 때 바로 앉는 자세.
를 하고 있었다. 바드리카는 놀랍고 두려워 이렇게 소리쳤다. “너는 천신이냐, 귀신이냐, 간다르바[乾闥婆] 사람이 죽어 다음 생으로 태어날 때까지의 중유(中有)의 몸.
냐, 야차냐?” “천신도 아니요 귀신도 간다르바도 야차도 아니오. 나는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이며 법을 설하기 위해 당신 앞에 나타난 것이오.” 
바드리카는 그가 사문이라는 말을 듣고 보시를 청하는 거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요구가 있더라도 거절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목갈라나는 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법과 재물 두 가지 보시(布施)를 말씀하십니다. 정신 차려 잘 들으시오. 내 이제 법의 보시를 말하리라. 부처님은 다섯 가지로 이 법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 둘째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않는 것, 셋째는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는 것, 넷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 이 다섯 가지가 법의 보시입니다. 당신은 한평생 이 큰 보시를 지켜야 합니다.” 
바드리카는 이 다섯 가지 법보시가 아무 손해될 것 없음에 우선 마음이 놓였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고, 자기는 부자이니 남의 것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않는 것은 좋은 일이며, 더구나 술 마시지 말라니 그것은 돈을 모으는 요긴한 방법이라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부처님은 가르침이 이런 것이라면 즐겨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목갈라나를 청해 처음으로 공양을 내었다. 
공양을 마친 뒤 다시 옷을 공양하기 위해 창고에 들어가 가장 허름한 천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이 저절로 좋은 천으로만 옮겨져 집었다가 놓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이때 문득 목갈라나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남에게 베풀면서 마음과 싸우는 것은 어질고 착한 이로서는 차마 못할 일, 보시란 원래 싸움이 아니니 당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오.” 
바드리카는 이 소리를 듣자 자기 마음이 환히 드러나 보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좋은 천을 가져다 목갈라나에게 공양했다. 목갈라나는 옷감을 받고 그를 위해 다시 보시의 공덕에 대한 법을 설했다. 설법을 들은 바드리카는 비로소 마음의 눈이 띄어 기뻐하면서 한평생 부처님의 신도가 되기를 맹세했다. 
『增一阿含 聲聞品』
2.3.7.피할 수 없는 죽음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파세나디[婆斯匿王]왕은 나라 일로 성 밖에 나가 있었다. 그 때 왕의 어머니는 백 살에 가까운 나이로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불행히도 왕이 나가고 없는 사이에 돌아가셨다. 지혜로운 신하 불사밀은 효성스런 왕이 이 불행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슬퍼할까 염려한 끝에 어떤 방편을 써서라도 왕의 슬픔을 덜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백 마리의 코끼리와 말과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많은 보물과 기녀들을 실은 뒤 만장을 앞세워 풍악을 잡히면서 상여를 둘러싸고 성 밖으로 나갔다. 왕의 일행이 돌아오는 도중에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은 호화로운 상여를 보고 마중 나온 불사밀에게 물었다. 
“저것은 어떤 사람의 장례 행렬인가?” 
“성 안에 사는 어떤 부잣집 어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왕은 다시 물었다. 
“저 코끼리와 말과 수레는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그것들은 염라왕에게 갖다 바치고 죽은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하려고 한답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리석은 짓이다. 목숨이란 멈추게 할 수도 없지만 대신할 수도 없는 것. 한번 악어의 입에 들어가면 구해낼 수 없듯이, 염라왕의 손아귀에 들면 죽음은 면할 수 없다.” 
“그러면 여기 오백 명의 기녀들로 죽은 목숨을 대신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녀도 보물도 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면 바라문의 주술과 덕이 높은 사문의 설법으로 구원하겠다고 합니다.” 
왕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한번 악어 입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것, 생이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겠는가. 부처님께서도 한번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거늘.” 
이때 불사밀은 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대왕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다 죽는 법입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태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왕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착하구나. 불사밀이여, 그대는 미묘한 방편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구나. 그대는 참으로 좋은 방편을 알고 있다.” 
파세나디왕은 성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향과 꽃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공양하고 나서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로 수레를 몰았다. 전에 없이 한낮에 찾아온 왕을 보고 부처님이 물으셨다.
“이 대낮에 웬 일이오?” 
“부처님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백 살에 가까운 어머님은 매우 노쇠했지만 저는 한결같이 공경해왔습니다. 만약 이 왕의 자리로 어머님의 죽음과 바꿀 수 있다면, 저는 왕위뿐 아니라 거기에 따른 말과 수레와 보물과 이 나라까지도 내놓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은 반드시 죽는 법입니다. 모든 것은 바뀌고 변하는 것 아무리 변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렇게 될 수는 없소, 마치 질그릇은 그대로 구운 것이건 약을 발라 구운 것이건, 언젠가 한번은 부서지고 마는 것과 같소. 네 가지 두려움이 몸에 닥치면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이오. 그 네 가지란, 늙음과 질병과 죽음과 무상이오.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소. 마치 큰 산이 무너져 사방에 덮쳐누르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소. 견고하지 못한 것은 아예 믿을 것이 못되오. 그러므로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고 법이 아닌 것을 쓰지 마시오. 법으로 다스려 교화하면 그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천상에 태어나지만, 법 아닌 것으로 다스리면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왕은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 슬픔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나라 일이 많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파세나디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물러갔다. 
『增一阿含 四意斷品』
2.3.8.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마가다나라에 머무르면서 많은 비구들과 함께 강변으로 나가셨다. 때마침 강 한가운데 큰 통나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저기 강물에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보아라. 만일 나무가 이쪽 기슭이나 저쪽 기슭에 닿지 않고 중간에 가라앉지도 않고, 섬에 얹혀지지도 않으며, 사람에게 건져지거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히지도 않으며, 물을 따라 돌아오거나 물 가운데서 썩지 않는다면, 저 나무는 결국 바다로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그와 같아서 만일 도의 강물 위에서 이쪽 기슭이나 저쪽 기슭에 닿지 않고, 중간에 가라앉거나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히지 않고, 물을 따라 돌아오거나 썩지 않는다면, 열반의 바다에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은 반드시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때 난다라는 소치는 사람이 멀리서 이 말씀을 듣고 부처님께 와서 여쭈었다. 
“부처님, 저도 지금부터 그렇게 노력한다면 열반에 이르게 됩니까?” 
“물론 그렇다. 누구든지 그와 같이 하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도 사문이 되어 도(道) 안에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네가 맡아 있는 그 소를 주인에게 돌려준 뒤에라야 사문이 될 수 있다.” 
“이 소는 집이 있는 송아지를 생각하지 때문에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제가 사문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 소는 혼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네가 끌고 가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자 난다는 소를 돌려주고 와서 사문이 되었다. 사문이 된 난다는 부처님께 또 물었다. 
“부처님, 양쪽 언덕은 무엇이며, 중간에 잠기고 섬에 얹히며,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에 잡힌다는 것은 무엇이며, 물을 따라 돌아오고 썩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이쪽 기슭이란 육신을 말하고, 저쪽 기슭이란 육신이 없어짐을 말한다. 중간에 가라앉음은 욕락에 빠지는 일이고, 섬에 얹힌다는 것은 교만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잡힌다는 것은 비구가 재가신도(在家信徒)와 사귀어 세속의 정을 같이 함으로써 도 닦는 마음을 타락케 함이고, 사람 아닌 것에 잡힌다는 것은 비구가 천상에 나기 위해 수행하되 ‘이 계행과 이 고행에 의해 천상에 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을 따라 돌아옴이란 그릇된 의심이고, 썩는다는 것은 비구들이 성질이 악하고 계를 지키지 않으며, 착한 일에 용감하지 못하고 자기 허물을 덮어 높으며, 청정한 수행자가 아니면서도 청정한 수행자인 체하는 것을 말한다.” 
『增一阿含 馬血天子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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