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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대승경전 ⑥ 지식과 지혜


3.6.1.분별을 떠나야 부처를 본다 
부처님께서 바다를 건너 랑카[楞伽]성이 있는 섬에 들어가 마라야산 숲속에 계실 때였다. 랑카성 주인 나파나왕은 부처님께서 자기 나라에 오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궁전으로 맞아들였다. 부처님께서 성안으로 들어서자 그 고장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처님 곁에 몰려와 절하고 법문을 듣고자 하였다. 이때 나파나왕은 대혜(大慧)보살에게 자기들을 위해 부처님께 법을 물어 달라고 청했다. 대혜보살은 왕을 대신하여 부처님께 깨달은 경지를 물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수많은 군중과 동산이 일시에 사라지고 나파나왕만이 홀로 궁중에 남아 있었다. 왕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에 보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설법을 듣고 있던 것은 누구였던가? 부처님과 성과 산과 숲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가? 꿈인가 생시인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참 동안 의문에 잠겼다가 왕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모든 법은 다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모든 대상은 내 마음의 분별에서 나온 것이다. 범부들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볼 수도 없고 볼 것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고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 것도 모두가 분별이다. 내가 조금 전에 본 것은 참으로 부처님을 뵌 것이 아니다.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부처님을 뵙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나파나왕은 문득 마음이 열려 마음속에 번뇌를 여의고 분별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 모든 것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공중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소, 대왕. 도를 닦는 사람들은 다 대왕과 같이 부처를 보아야 합니다. 안으로 행(行)을 닦고 밖으로 집착하는 소견을 내서는 안 되오. 쓸데없는 이론을 즐기지 마시오. 자유자재하다고 해서 왕위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나’라는 생각에서 떠나 바른 지혜를 가지고 도를 닦으면 최상의 깨달음에 들어갈 것이오.” 
『楞伽經 羅婆那 勸請品』
3.6.2.분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왕의 마음을 아시고 다시 몸을 나타내셨다.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법도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 하셨습니다. 어째서 법과 비법(非法)을 버려야 하며, 또 법과 비법은 무엇을 가리킨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병은 깨어지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는 것이오. 그런데 사람들은 병의 실체가 있는 줄로 압니다. 이와 같이 보는 법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오. 안으로 자기 마음의 본성을 보면 밖으로 집착할 것이 없소. 이와 같은 바른 견해로 법을 보는 것이 곧 법을 버리는 것이오. 비법이라고 하는 것은 토끼 뿔이라든지 석녀(石女)의 자식처럼 사실은 없는 것을 가리키오. 이처럼 집착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여래의 법은 모든 분별과 쓸데없는 논란을 떠나서 있소. 진실한 지혜만이 이것을 증득합니다.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고 차별을 떠난 지혜를 여래라고 합니다. 여래는 진실한 지혜와 하나이기 때문에 분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소.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은 그 대상에 따라 빛깔과 형상을 인식하지만, 여래는 분별을 떠났기 때문에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오. 
벽에 걸린 그림 속 사람에게 감각이 없듯이, 중생들도 꼭두각시와 같아 업(業)도 없고 과보(果報)도 없는 것이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바른 견해라 하고, 이와 같이 달리 보는 것을 분별의 소견이라 합니다. 분별에 의하기 때문에 법과 비법에 집착하는 것이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물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고 혹은 등불이나 달빛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를 보고 분별을 일으켜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법이라든가 비법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분별에 지나지 않소. 분별에 의지하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허망한 것에 팔려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오. 열반이란 여래의 장(藏)이오,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 깨달음의 선정(禪定)을 얻어야 합니다.” 
『楞伽經 羅婆那 勸請品』
3.6.3.모든 것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저희들을 위하여 모든 법의 생멸(生滅)하는 모양을 말씀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는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란 이른바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 내법(內法)과 외법(外法) 등이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의식의 훈습에 의해 늘고 자라는 것이오, 모든 범부는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意識)의 훈습(薰習)에 의해 늘고 자라는 것이오. 모든 범부는 마음과 뜻과 의식의 훈습에 의해 선법과 불선법을 분별하는 것이오. 그러나 성인은 현재 삼매에 들어가 번뇌가 없는 선행(善行)의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이것을 선법이라 합니다. 
또 선법과 불선법이란 여덟 가지 알음알이인데 아뢰야식(阿賴耶識) 우주 만유를 전개하는 근본식(根本識).
과 의(意)와 의식과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비식(鼻識)과 설식(舌識)과 신식(身識)입니다. 뒤의 다섯 가지 알음알이가 의식과 어울려 선법과 불선법이 차별되어 자꾸 이어가지만 그 자체에는 차별이 없소. 생기는 법을 따라 생겼다가 도로 없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제 마음이 허망한 경계를 나타낸 것인 줄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다가 그것이 없어질 때는 그 형상의 크고 작음과 낫고 못함에 집착하는 것이오. 
그 의식은 다섯 가지 알음알이와 어울려 생기는 것인데 그것은 찰나도 머무르지 않소.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것이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모든 존재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견해에만 집착하여 ‘무루(無漏)의 법도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니, 그것은 진여(眞如)의 법인 여래장(如來藏) 미혹한 세계의 진여(眞如)는 그 덕이 숨겨져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고, 중생이 여래의 성덕(性德)을 갖추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함.
을 깨뜨리는 말이오. 
다섯 가지 알음알이는 육도(六道)에도 나지 않고 고(苦)와 낙(樂)을 받지 않으며 또 열반의 인(因)도 짓지 않소. 여래장은 고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인(因)이 아니지만 다른 법은 생사와 어울리는 것이오. 그런데 범부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릇된 소견에 젖어, 모든 법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오. 
금강의 여래장과 여래의 증득한 법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 법이 아니오. 만일 여래가 얻은 법이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떠한 성인도 성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오. 금강은 한 겁 동안 머물러 있어도 무게와 부피가 그대로 있어 늘지도 줄지도 않소. 그런데 어째서 어리석은 범부는 모든 법을 분별하여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그들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해 안팎의 모든 법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오.” 
『楞伽經 刹那品』
3.6.4.육바라밀을 성취하려면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완전히 성취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육바라밀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밀에는 세 가지가 있소. 즉 세간의 바라밀과 출세간의 바라밀과 출세간 최상의 바라밀이오. 세간의 바라밀이란 어리석은 범부가 나와 내 것에 집착하고, 그 두 가지 치우친 소견에 떨어져 훌륭하고 묘한 경계를 얻기 위해 바라밀을 행하고 물질적인 현상과 과보를 구하는 것이오. 어리석은 범부는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 등 여섯 바라밀을 행하여 범천(梵天)에 나기도 하고 세간의 법인 다섯 가지 신통[五神通]을 구하기도 하니 이것을 세간의 바라밀이라 합니다. 
출세간의 바라밀이란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이 성문과 독각에 알맞은 열반의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는 바라밀이오. 어리석은 범부들이 제 몸을 위해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려고 세간의 바라밀을 행하는 것처럼, 성문과 독각도 제 몸을 위해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려고 출세간의 바라밀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는 것은 구경(究竟)의 즐거움이 아니오. 대혜보살, 출세간 최상의 바라밀이란 자기 마음의 허망한 분별로써 바깥 경계가 나타난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니, 그때에는 오직 그 마음만이 안팎의 법을 나타낸 것임을 여실히 압니다. 왜냐하면, 허망한 분별로 분별하지 않고 안팎의 마음과 물질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오. 
보살은 모든 법을 똑바로 알면서도 일부러 보시바라밀을 행하니, 그것은 일체 중생에게 두려움이 없는 평안한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시바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모든 법을 관찰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서도 맑고 시원한 법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계바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또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고행을 참으면서 그 경계가 진실이 아님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어떻게 정진의 행을 닦는가 하면, 초저녁과 밤중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항상 부지런히 수행하여 진여(眞如)의 법을 그대로 따라 온갖 분별을 끊소. 그러므로 그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합니다. 보살은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 저 이교도들의 ‘취할 수 있다’ ‘취할만하다’는 경계의 모양을 따르지 않소. 그러므로 그것을 선정바라밀이라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지혜바라밀인가 하면, 보살은 제 마음의 분별하는 모양을 분명히 관찰하여 분별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으므로 두 가지 치우친 견해에 떨어지지 않소. 진실한 수행에 의해 한 법도 나거나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고 제 마음으로 증득한 거룩한 행을 닦소. 그러므로 그것을 지혜바라밀이라 합니다. 바라밀의 이치를 이와 같이 완전히 성취하면 그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소. 이것이 출세간 최상의 바라밀이오.” 
『楞伽經 刹那品』
3.6.5.분별심은 지혜가 아니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범부의 분별심은 어째서 성인의 마음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범부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법을 따르며 갖가지 모양을 보고 나와 내 것이라는 그릇된 견해에 떨어져 모든 존재에 집착하고, 무명(無明)의 어둠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탐심을 일으키고 성냄과 어리석은 업을 짓게 됩니다.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 분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몸을 얽어 육도(六道) 중생의 업에 따라 윤회하는 여섯 가지 길.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의 큰 바다에 떨어짐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오. 중생들은 나와 내 것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소. 
분별이란 어떤 존재에 의해 불려지는 이름이며 모양에 따라 분별하는 것이오, 이를테면 코끼리·말·수레·걸음걸이·인민 등 갖가지 모양을 분별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분별이오. 바른 지혜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의 모양이나 이름을 관찰할 때 이것은 실체가 없으며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관찰해야 하오. 그렇게 해서 모든 이교도와 성문과 독각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소. 이것을 바른 지혜라 하오. 보살은 바른 지혜에 의해 사물의 모양이나 이름을 보고 <있다>고 하지도 않고, 모양이나 이름이 없는 데서도 <없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있고 없는 견해를 떠났기 때문이오. 모양과 이름을 보지 않음은 바른 지혜이므로 나는 그것을 진여(眞如)라 하오. 
바른 지혜를 따르시오. 바른 지혜는 단멸(斷滅)도 아니요 영원한 것도 아니오. 또 분별도 없고 분별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증득한 지혜로서 모든 외도와 성문과 독각의 바르지 못한 견해를 떠난 것이오.” 
『楞伽經 五法門品』
3.6.6.강가강[恒河] 갠지스강을 가리킴.
의 모래처럼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가 강가강의 모래와 같다고 함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를테면 강가강에 있는 모래는 자라·거북·소·염소 등 온갖 짐승들이 밟을지라도 분별을 내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또한 나를 괴롭게 한다는 생각도 내지 않소. 그것은 분별이 없고 때를 깨끗이 씻어버렸기 때문이오. 여래는 거룩한 지혜를 얻어 모든 능력과 자제한 공덕이 강가강의 모래와 같소. 
이교도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내는 마음으로 여래를 헐뜯고 비방하더라도 여래는 동하지 않고, 분별을 내지 않으며 본 원력으로 중생을 삼매에 들게 하여 즐겁게 할 뿐이오. 
그러므로 내가 강가강의 모래와 같다고 한 것은 평등하여 다른 분별이 없는 것이니 애착의 몸을 떠났기 때문이오. 그것은 강가강의 모래가 땅을 떠나지 않음과 같소. 불이 대지를 태울지라도 대지는 달라지지 않소. 어리석은 범부는 전도된 망상으로 스스로 분별하여 말하기를 ‘땅이 불에 타게 된다.’고 하지만 땅은 타지 않소. 여래도 이와 같이 법신(法身)의 자체는 강가강의 모래처럼 멸하지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소. 강가강의 모래가 한량없고 가없는 것처럼. 
강가강의 모래가 강가강에서 난다고 해도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간다 해도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며, 모래는 ‘내가 강가강에서 나오고 들어간다.’고도 생각하지 않소.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도 제도된 중생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법은 몸이 없기 때문이오. 몸이 있는 것은 모두 덧없고 무너지는 것이지만 여래는 법신이므로 덧없거나 무너지지 않소. 
어떤 사람이 향유(香油)를 만들려고 강가강의 모래를 아무리 눌러 짤지라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은 모래에 향유가 없기 때문이오. 여래는 고뇌의 압박이 있더라도 성내지 않소. 본 원력을 버리지 않고 중생에게 기쁨을 주어 대자 대비를 베풀려고 하기 때문이오. 강가강의 모래는 물을 따라 흐르고 물을 거슬러 흐르지 않소. 중생을 위한 여래의 설법도 이와 같이 열반을 따라 순종하고 거슬러 흐르지 않소. 그러므로 여래가 강가강의 모래와 같다는 것이오.” 
『楞伽經 恒河沙品』
3.6.7.육식은 곧 살생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희들을 위해 고기 먹는 허물과 먹지 않는 공덕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는 한량없는 허물이 있소. 보살이 큰 자비를 닦으려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오. 그러면 먹는 허물과 먹지 않는 공덕을 말하겠소. 중생이 시작없는 옛적부터 고기 먹는 습관으로 고기 맛에 탐착하여 번갈아 서로 살해하며 어질고 착한 이를 멀리하고 생사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오. 고기를 먹지 않는 이는 바른 가르침을 듣고, 보살 지위에서 참답게 수행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또한 중생들을 여래의 경지에 들게 할 것이오. 
고기를 먹는 이는 곧 중생의 큰 원수이며 여래의 종자를 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내 제자가 내 말을 듣고도 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곧 백정의 자손이오. 그는 내 제자가 아니며 나는 그의 스승이 아니오. 
보살은 마땅히 모든 고기를 부모의 피와 살로 생각하고 그와 같이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중생이 고기 먹는 사람을 보면 놀라고 두려워하니 고기를 먹는 것은 중생과 큰 원한을 맺는 것이오. 보살은 자비를 베풀고 중생을 거두어 주기 위해서라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중생들은 보살을, 여래의 자비한 종자이며 중생의 귀의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중생들은 보살이라는 말만 듣고도 의심과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게 되고, 친구라는 생각과 선지식이라는 생각과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냅니다. 그리고 의지할 곳을 얻었으며 편안한 곳을 얻었으며 좋은 스승을 만났다고 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신심을 내게 하는 것이오. 만약 고기를 먹는다면 중생들은 곧 믿는 마음을 버리고 ‘세상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의 믿는 마음을 지켜 주기 위해서라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보살은 청정한 불국토를 구하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고기는 사람의 시체와 같이 생각하고 눈으로 보려고도 말고 냄새를 맡으려고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어찌 입속에 넣겠소. 모든 고기도 이와 같소. 시체를 불태우면 냄새가 나는 것처럼 고기를 구워도 냄새가 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청정한 불국토를 구하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중생을 살해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오.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고기를 구하고 또 사게 되니 자연히 죽여서 파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이오. 이것은 모두 먹는 사람이 있어 죽인 것이므로 고기를 사 먹는 이도 죽이는 이와 다를 게 없소. 
사냥꾼과 백정과 고기 먹는 사람들은 악독한 마음이 배어 있어 차마 할 수 없는 일도 손쉽게 저지르게 되오. 모양이 곱고 살찐 중생을 보면 ‘이놈은 잡아먹음직하다’고 생각하면서 참지 못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나는 고기 먹는 사람은 자비의 종자를 끊는다고 말한 것이오. 
내가 보건대 세상에 있는 고기치고 생명 아닌 것은 없소. 손수 죽이지도 말 것이요,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됩니다. 만일 고기가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내가 왜 사람들이 먹는 것을 막겠소. 그러므로 나는 고기 먹는 것을 죄라고 말하며 여래의 종자를 끊기 때문에 먹는 것을 허락할 수 없소. 
내가 열반한 후 뒷세상에 나의 제자라고 자칭하면서 ‘여래도 고기를 먹었다’ ‘계율 가운데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고기 먹는 것을 허락했다면 내 입으로 어떻게 큰 자비와 참다운 수행을 말하고 중생 보기를 외아들처럼 보라고 하겠소.” 
『楞伽經 遮食肉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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