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3편 대승경전 ⑦ 마음과 생각

 


3.7.1.마음은 어디에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물으셨다. 
“아난다, 너는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여 처음으로 도를 구하려고 발심했다 하니, 무엇으로 보았으며 무엇이 기뻐했느냐?” 
아난다가 대답했다. 
“제 눈으로 보고 제 마음이 기뻐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런데 그 눈과 마음이 생사 윤회의 허물이다. 그러므로 윤회를 벗어나려면 먼저 그것이 있는 곳부터 알아야 한다. 이제 네게 묻겠다. 눈과 마음이 어디 있느냐?” 
“세상 모든 중생의 눈은 얼굴에 있고, 의식하는 마음은 몸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난다, 마음이 몸 속에 있다면 몸 속의 것들을 분명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중생이나 먼저 몸 속을 보고 나중에 바깥 것을 보는 사람이 있겠느냐? 몸 속의 것을 알지 못한다면 바깥 것은 어떻게 아느냐? 그러므로 마음이 몸 속에 있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의 그러한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은 몸 밖에 있겠습니다.” 
“네 마음이 만일 몸 밖에 있다면, 몸과 마음이 따로 있어 서로 관계가 없을 것이다. 즉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은 알지 못하고 몸이 아는 것을 마음은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부처님의 말씀처럼 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서로 분리돼 있지 않으므로 몸 밖에도 있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마음은 한곳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있는 곳이 어디냐?” 
“이 마음이 속을 알지 못하면서 바깥 것을 잘 보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마치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이 마음이 눈 속에 들어 있겠습니다.” 
“네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 같다면, 산과 강을 볼 때는 어째서 눈을 보지 못하느냐? 유리를 눈에 대고 볼 때 유리도 보고 산과 강도 보지 않느냐.”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제가 부처님을 보는 것은 바깥 것을 본다하고, 눈을 감고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은 몸 속의 것을 본다 하면 어떻겠습니까?” 
“네가 어두운 것을 볼 때 그 어둠이 눈앞에 있을 텐데 어떻게 몸 속이라 하겠느냐? 또 눈이 어둠과 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이 몸 속을 보는 것이라는 이치는 당치 않다.” 
아난다가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마음이 움직여 형상이 생기고 형상이 생기어 여러 가지 마음이 움직인다’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곧 생각하는 자체가 내 마음일 것이므로 대상과 합하는 것을 따라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대상과 합하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마음이 자체가 없으니 무엇과 합하겠느냐. 그러니 그 말도 옳지 못하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다시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몸 속을 보지 못하므로 속에 있다고는 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 때문에 밖에 있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서로 알면서도 안으로는 보지 못하니 그것은 중간에 있겠습니다.” 
“네가 중간이라 말하니 그 중간이 어디 있느냐?” 
“부처님께서는 보는 감관과 대상이 연(緣)이 되어 눈의 인식을 낸다 하셨습니다. 보는 감관은 분별하는 작용이 있고 대상은 그것이 없는데, 눈의 인식이 그 중간에서 생긴 것이니 이것을 마음이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만일 감관과 대상의 중간에 있다면 이 마음의 자체가 둘을 겸했느냐, 겸하지 않았느냐? 겸했다면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여 어지러운 것이며, 대상은 감관이 아니므로 서로 양립할 것이니 어떻게 중간이 되겠느냐? 또 겸하지 않았다면 알고 모름도 아니어서 바탕이 될 만한 성질이 없는 것이니 중간이란 무슨 모양이겠느냐? 그러므로 중간에 있다는 것도 옳지 못하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예전에 ‘알고 분별하는 마음이 안이나 바깥 또는 중간에 있지 아니하여 아무데도 있는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온갖 것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 한 것이니,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 할까요?”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알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무데도 있는 곳이 없다 하니, 이 세상과 허공의 온갖 것에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 함은 사물이 있다는 것이냐? 없다면 무엇을 두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냐? 형상이 없으면 아주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아니라면 형상이 있는 것이니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집착하는 것이다. 어떻게 집착이 없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온갖 것에 집착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 하는 것도 옳지 않다.” 
『首楞嚴經 1』
3.7.2.보는 것은 마음
아난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 부처님의 사랑을 받고 출가했습니다. 귀여워해 주심을 믿어 많이 듣기만 하고 번뇌를 끊지 못했습니다. 사특한 주문에 홀려 음실(婬室)에 들어갔으니 그것은 참 마음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한 탓입니다. 바라건대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 가엾이 여기시고 저희에게 사마타[奢摩陀, 止]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망녕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일.
 길을 보여 주시며 저 잇찬티카[一闡提] 신앙심이 없고 선근(善根)이 끊어진 무지 몽매한 인간.
들에게도 어리석고 미천함을 깨드리게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여러 가지로 뒤바뀌어 업의 씨앗을 버리지 못하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것은 모두가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해 잘못 닦아 익혔기 때문이다. 마치 모래를 삶아 음식을 만들려는 것과 같이 아무리 오랜 세월을 수행한다 할지라도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시작 없는 생사의 근본이니, 지금 너와 중생들이 반연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작 없는 보리 열반의 원래 청정한 본체이다. 그런데 이 본래 밝은 것을 잃어버린 탓으로 종일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로 깨닫지 못하고 억울하게 여러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아난다, 네가 지금 사마타의 길을 알아서 생사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다시 묻겠다.” 
부처님께서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것을 보느냐?” 
아난다가 대답하였다. 
“봅니다.” 
“무엇을 보느냐?” 
“부처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쥐시고 저의 마음과 눈에 비춥니다.” 
“네가 무엇으로 보았느냐?” 
“저와 대중은 모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네가 지금 대답하기를 ‘손가락을 구부려 쥔 주먹을 마음과 눈에 비춘다’ 하니, 네 눈은 알겠지마는 무엇을 마음이라 하여 내 주먹이 비춤을 받느냐?” 
“부처님께서 지금 마음이 있는 데를 물으시니, 제가 마음으로 헤아리고 찾아봅니다. 이렇게 헤아리고 찾아보는 것을 마음이라 합니다.” 
“아니다, 아난다. 그것은 네 마음이 아니다.” 
“이것이 저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대상의 허망한 모양을 생각하여 너의 참 마음을 의혹케 하는 것이다. 네가 시작 없는 옛적부터 금생에 이르도록 도둑을 잘못 알아 자식으로 여기고, 너의 본래 항상 있는 것은 잃어버린 탓으로 윤회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저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공경하여 출가하였으니 제 마음이 어찌 부처님 한 분만 공경하겠습니까. 많은 국토를 다니면서 여러 부처님과 선지식을 섬기며 용맹심을 내어 모든 어려운 법을 행하는 것도 이 마음으로 할 것이며, 또 법을 비방하고 선근(善根)에서 영원히 물러나는 것도 역시 이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저는 마음이 없어 흙이나 나무토막과 같을 것이며, 이렇게 깨닫고 알고 하는 것을 떠나서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아니라 하십니까?” 
이때 부처님은 아난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법은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인과(因果)와 세계의 티끌까지도 마음으로 인해 그 자체가 된다고 하였다. 모든 세계의 온갖 것 중에 풀과 나뭇잎과 실오라기까지도 그 근원을 따지면 모두 그 자체의 성질이 있고 허공까지도 이름과 모양이 있는데, 어째서 청정하고 미묘하고 밝은 마음이 자체가 없겠느냐? 
만일 네가 분별하고 생각하며 분명하게 아는 것을 고집하여 마음이라 한다면 이 마음이 온갖 물질·냄새·맛·감촉의 모든 객관적인 것을 떠나 따로 완전한 성품이 있어야 할 것이다. 네가 지금 내 법문을 듣는 것은 소리로 인해 분별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을 없애고 속으로 무엇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경험했던 사실을 분별하는 것이다. 
내가 네게 마음이 아니라고 고집하라는 것은 아니다. 네가 속으로 잘 생각해 보아라. 만일 대상의 세계를 떠나 분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네 마음이다. 분별하는 성품이 대상을 떠나 그 자체의 성질이 없다면 그것은 대상을 분별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대상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변하고 없어질 때는 거북이털이나 토끼뿔처럼 마음도 없어지고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네 법신(法身)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무엇이 생멸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겠느냐?” 
그때 아난다와 대중들이 무엇을 잊어버린 듯 말이 없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겨우 아라한을 이루는 것은 모두 이 생사(生死)하는 망상에 집착하여 진실한 것인 줄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많이 듣기만 했지 성과(聖果)를 이루지는 못했다.” 
아난다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출가한 뒤로부터 부처님의 위신력만 믿고, 애써 닦지 않아도 부처님께서 삼매를 얻게 하여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몸과 마음은 본래 대신 할 수 없는 줄을 알지 못하여 제 본심을 잃었으니, 몸은 비록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마치 가난한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습니다. 집을 나간 가난한 아들이 부자인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인 줄 모르고 두려워 달아났다는 『법화경』의 말씀. 우리 마음이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에 비유.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할지라도 몸소 수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음식 이야기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배부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저희들이 지금 두 가지 장애에 얽힌 것은 항상 고요한 마음을 알지 못한 탓입니다. 바라건대 부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미묘하고 밝은 마음을 밝혀 저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자리를 고쳐 앉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를 위해 큰 법회를 열어 일체 중생들이 미묘하고 비밀한 성품과 깨끗하고 밝은 마음과 청정한 눈을 얻게 하겠다. 네가 아까 대답하기를 주먹을 본다고 하였으니 그 주먹의 광명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무엇으로 보았느냐?” 
아난다가 대답했다. 
“부처님의 전신은 금빛이고 보배산과 같이 빛나므로 광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광명을 눈으로 보았고,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쥐었으므로 주먹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만으로도 안다. 내 손이 없으면 주먹을 쥘 수 없듯이 네 눈이 없으면 너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네 눈을 내 주먹에 견준다면 이치가 같겠느냐?” 
“그렇습니다. 제 눈이 없으면 저는 볼 수 없습니다. 제 눈을 부처님이 주먹에 견준다면 이치가 같겠습니다.” 
“네가 서로 같다고 말했지만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손이 없는 사람은 주먹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눈 없는 사람이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길에 나가 소경들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물어보아라. 어두운 것만 보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상이 어두울 뿐이지 보는 것이야 무슨 다름이 있겠느냐?” 
“소경들이 어두운 것만 보는 것을 어떻게 본다고 하겠습니까?” 
“소경들이 어둠만 보는 것과 눈 밝은 사람이 어둔 방에 있는 것과 그 어둠이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어둔 방에 있는 사람과 저 소경들의 깜깜함은 다르지 않습니다.” 
“아난다, 만일 눈먼 사람이 앞에 깜깜하다가 문득 눈을 뜨면 여러 가지 형체를 보게 된다. 이때 눈이 보는 것이라면, 저 어둔 방 속에 있는 사람이 깜깜한 것만 보다가 문득 등불을 켜면 역시 앞에 나타난 갖가지 형체를 볼 것이다. 이것을 등불이 본다고 하겠느냐? 등불이 보는 것이라면 등불이라 할 수 없으며, 또 등불이 본다면 네게는 아무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등은 형체를 나타낼 뿐 보는 것은 눈이요 등이 아님을 알아라. 눈은 대상을 비출 뿐 보는 성품은 마음이다.” 
『首楞嚴經 1』
3.7.3.생멸이 없는 마음
그때 아난다와 대중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쁨이 솟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시작없는 옛적부터 본심을 잃어버리고 대상 세계를 분별하는 그림자를 본심인 줄 잘못 알았다가 오늘에야 깨달은 것이다. 마치 젖을 잃었던 아이가 어미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들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이 몸과 마음의 참되고 허망한 것을 나타내어 생멸하고 생멸하지 않는 두 가지 성질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하였다. 이때 파세나디왕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물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전에 이교도 카타야나[迦旃延]와 산자야를 만났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부처님을 뵈러 왔으니 그 의혹을 풀어 이 마음이 생멸하지 않는 경지를 알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직도 번뇌가 남아 있는 대중들은 모두 듣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파세나디왕에게 말씀하셨다. 
“왕의 몸이 있으므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소. 그런데 왕의 몸은 강철처럼 굳어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변하면 없어진다고 생각하시오?” 
“부처님, 이 몸은 결국 없어지고 맙니다.” 
“왕이 일찍이 없어져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없어질 것을 아시오?” 
“무상하게 변하는 제 몸이 비록 없어져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수시로 변하고 달라지는 것이 마치 불이 타 재가 되듯이 늙어 갑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늙어 가므로 이 몸은 언젠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건 그렇다고 합시다. 왕의 나이가 많은데 얼굴은 어린 시절과 비교해 어떻소?” 
“부처님, 제가 어렸을 때에는 피부가 고왔고 장성해서는 혈기가 왕성했으나, 지금은 늙어 살결에 주름이 잡히고 정신은 혼미합니다. 머리는 백발이 되고 얼굴은 쭈그러져 앞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어렸을 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얼굴이 갑자기 늙지는 않았을 것 아니오?” 
“부처님,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제가 깨닫지는 못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이렇게 늙었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 때에는 젊었다고는 하나 열 살 때보다는 늙었고, 서른 살 때는 스무 살보다 늙었으며, 지금은 예순두 살인데 쉰 살 때를 생각하니 그때는 매우 건강하였습니다. 조금씩 달라지던 것이 이렇게 많이 늙어 버렸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그 변천하는 것이 어찌 십년 이십 년뿐이겠습니까.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아니 한 찰나도 멎지 않고 달라 가니 이 몸은 필경 없어질 것입니다.” 
“변천하여 멎지 않는 것을 보고 필경은 없어질 줄을 안다 하니, 없어질 때 왕의 몸 가운데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 줄을 아시오?” 
파세나디왕은 합장하고 대답했다. 
“그것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생멸하지 않는 성질을 보여 주겠소. 왕은 몇 살 때 강가강을 보았소?” 
“제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기바천 사당에 가셨습니다. 그때 강을 건넜는데 그것이 강가강인 줄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럼 강가강이 세 살 때 보던 것과 열세 살 때 보던 것과 어떻습디까?” 
“세 살 때나 열세 살 때나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순두 살이지만 역시 다름이 없습니다.” 
“왕은 지금 머리가 세고 얼굴이 쭈그러짐을 슬퍼하고 있소. 지금 강가를 보는 것이 어려서 강가를 보던 것보다 늙었겠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왕의 얼굴은 쭈그러졌을망정 보는 그 성질은 쭈그러지지 않았소. 쭈그러지는 것은 변하지만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오. 변하는 것은 없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원래 생멸이 없는 것이오. 그런데 어찌 그것이 생사를 받겠소. 이교도들이 말하는 이 몸이 죽은 뒤에 아주 없어져버린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죽은 뒤에도 다른 세상에 태어날 것을 알고 여러 대중과 함께 기뻐하였다. 
『首楞嚴經 2』
3.7.4.마음은 돌려보낼 수 없다
아난다가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미묘하고 밝은 마음이 원래 원만하고 상주(常住)하는 것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처님의 설법하는 음성을 듣고 또 이렇게 뵙는 것은 반연하여 일어나는 마음[緣心] 입니다. 미묘하고 밝은 마음을 얻었다고 하나 그것이 본래의 심지(心地)라고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의심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위없는 도에 들어가게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반연하는 마음으로 법문을 듣기 때문에 이 법문도 또한 연(緣)이 되어 법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일 때, 곁에서는 그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 한다면 그는 달만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손가락마저 보지 못한다. 또한 손가락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밝은 것과 어둔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의 밝은 성질이라 하기 때문이다. 밝은 것과 어둔 것을 둘 다 모르는 너와 그와 같다. 
만일 설법하는 음성을 분별하는 것을 네 마음이라 한다면 그 마음이 분별할 음성을 떠나서도 분별하는 성품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나그네는 여관에 투숙할 때 잠깐 쉬었다가 곧 떠나 끝까지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여관 주인은 떠나지 않으므로 주인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참으로 네 마음이라면 떠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음성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질이 없겠느냐. 이런 것이 어찌 음성을 분별하는 마음뿐이겠느냐. 내 얼굴을 분별하는 것도 빛이나 형상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 이와 같이 대상 세계를 떠나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면 너의 심성이 모두 각각 돌려보낼 데가 있으니 주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만일 저의 심성이 각각 돌려보낼 데가 있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묘하고 밝은 본래의 마음은 어째서 돌려보낼 데가 없습니까?” 
“자세히 들어라. 이제 너에게 돌려보낼 데 없음을 보여 주겠다. 이 큰 강당에 동쪽이 환히 열리어 해가 뜨면 밝게 비추고, 구름 낀 그믐밤은 어둡고, 창틈으로는 트임을 보고, 담장에서는 막힘을 보고, 분별한 곳에서는 연(緣)을 보고, 허공은 빈 것이요, 바람이 불어 먼지가 날면 흙비가 오는 것이요, 맑게 개어 구름이 걷히면 맑음을 보게 된다. 
아난다, 네가 이 여러 가지 변화하는 모양을 보았으니 내가 이제 본래 관계된 곳으로 돌려보내겠다. 어디가 본래 관계된 곳인가. 이 여러 가지 변화에서 바라는 것은 해에 돌려보낸다. 해가 없으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밝은 인(因)은 해에 있다. 그러므로 해에 돌려보낸다. 어둠은 그믐밤에 돌려보내고, 통함은 창틈으로, 막힘은 담장에, 연(緣)은 분별에, 허공은 빈 것에, 흙비는 먼지에, 맑은 것은 갠 데에 제각기 돌려보낸다. 세간의 온갖 것이 이런 종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네가 이 여덟 가지를 보는 견(見) 참 마음을 가리킴.
의 밝은 성질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느냐? 만일 밝은 데로 돌려보낸다면 어두운 것이 여러 가지로 차별되나 견(見)은 차별이 없다. 돌려보낼 수 있는 것은 네가 아니지만,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그러므로 네 마음이 본래 미묘하고 밝고 깨끗하지만, 네가 스스로 혼미하여 본래 미묘한 것을 잃어버리고 윤회하면서 생사 속에서 항상 떠다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가엾다고 한 것이다.” 
『首楞嚴經 2』
3.7.5.맺힘을 푸는 일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세상에서 맺힌 것 푸는 사람을 보면 맺힌 그 근원을 모르고는 풀지 못합니다. 저와 이 자리에 있는 성문(聲聞)들도 시작없는 옛적부터 무명과 함께 생하고 멸해 왔습니다. 비록 많이 들은 선한 인연으로 출가는 했으나 하루거리 학질을 앓는 사람과 같으니 자비로써 거두어 주십시오. 오늘 이 몸과 마음이 어찌하여 맺혔으며 어떻게 하면 풀리겠습니까? 중생들로 하여금 윤회에서 벗어나고 삼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다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착하다, 아난다. 무명이 너로 하여금 윤회케 하는 생사의 맺힌 근원은 너의 여섯 감관[六根]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최상의 보리(菩提)가 너로 하여금 안락과 해탈을 얻게 하는 것도 여섯 감관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아난다가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감관과 대상의 근원은 같고, 속박과 해탈이 둘 아니며, 분별하여 헤아리는 바탕이 허망하여 허공의 꽃과 같다. 대상으로 말미암아 알음알이를 내고, 감관으로 인해 형상이 있으니, 형상과 보는 것은 그 실체가 없이 서로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견(知見)에 알음알이를 두면 곧 무명의 근본이 되고, 지견에 분별 망상을 내지 않으면 곧 열반이니, 이 가운데 다시 무엇을 용납하겠느냐.” 
아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눈이 열려 기뻐하면서 다시 말했다. 
“부처님,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하고 영원하다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섯이 풀리면 하나까지 없어진다는 매듭 푸는 차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수건을 가지고 한 개의 매듭을 맺어 아난다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아난다,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매듭입니다.” 
부처님이 그 매듭 위로 또 한 매듭을 맺으시고 다시 아난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도 매듭입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여섯 개의 매듭을 만드시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이 수건이 원래는 하나이지만 내가 여섯 번 맺어 여섯 매듭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수건은 한 수건인데 맺음 때문에 다르게 된 것이다. 너의 여섯 감관도 그와 같아 한 근원에서 다른 것이 생겼다. 그러므로 여섯이 풀리면 하나마저 없어질 것이다. 네가 시작없는 옛적부터 심성(心性)이 들떠 알음알이가 허망하게 생기고 견(見)을 피로케 하여 대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치 눈이 피로하면 맑은 허공에 환상의 꽃이 보이는 것과 같다. 산하 대지(山下大地)와 생사  열반도 모두 잘못되어 생긴 뒤바뀐 환상의 꽃이다.” 
“그러면 그 매듭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매듭진 수건을 이리저리 당긴 뒤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왼쪽으로 당기고 오른쪽으로 당겨도 풀리지 않으니 어디 네가 그 방법을 생각해 보아라. 어떻게 하면 풀리겠느냐?” 
“매듭진 복판에서 풀어야 합니다.” 
“그렇다. 맺힌 것을 풀려면 매듭 복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아난다, 그러므로 네 마음대로 여섯 감관에서 선택하여라. 어느 한 감관의 매듭이 풀리면 매듭의 덩이가 풀리고 말 것이다. 온갖 허망한 것이 없어지면 어찌 참되지 않겠느냐. 아난다, 여섯 매듭이 동시에 풀릴 수 있겠느냐?” 
“그 매듭이 차례로 맺힌 것이므로 차례로 풀어야 합니다. 여섯 매듭의 근본은 같지만 맺힌 것이 각기 다르므로 한꺼번에 풀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섯 감관을 푸는 것도 그와 같다. 이 감관이 처음 풀리면 먼저 무아의 경지에 이르고, 공(空)의 성질이 밝아지면 법에서 해탈하고, 그런 뒤는 모두 공함을 얻을 것이다.” 
아난다와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의혹이 없어졌다. 
『首楞嚴經 5』
3.7.6.도를 얻은 체험담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처음으로 발심하여 깨달을 때에 어떤 방법으로 삼매에 들어갔느냐?” 
콘단냐[憍陳如] 비구가 부처님께 예배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녹야원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최초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음성에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저희들 중에 먼저 알았다고 인가(印可)하시어 <안냐타[阿若]>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음성으로 아라한이 되었으므로 음성이 으뜸이 되겠습니다.” 
향엄동자(香嚴童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부처님께서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자세히 살피라는 말씀을 듣고 조용히 방안에 앉아 정진하다가 비구들이 침수향 사르는 향기를 맡았습니다. 이 향기는 나무도 아니고 연기도 아니며 불도 아니므로, 가도 닿는 데가 없고 와도 온 데가 없음을 생각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생각이 사라져 번뇌가 없어지고 미묘한 향기가 그윽하였으니 저는 향기로부터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으뜸이 되겠습니다.” 
필린다밧사[畢陵伽婆蹉]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처음 발심하여 부처님을 따라 수행할 때에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즐겁지 못한 일을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면서, 성중에서 밥을 빌다가 가시에 발을 찔려 온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분별이 있기 때문에 아픈 줄을 안다. 아픈 줄 아는 것과 아픈 것이 있더라도 각(覺)의 청정한 심성에는 아픈 것도 없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한 몸에 어떻게 두 가지 각(覺)이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한 지 오래지 않아 몸과 마음이 문득 공해지고 삼칠일(三七日) 동안에 온갖 번뇌가 없어져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저는 각(覺)을 순일하게 하고 몸을 잊어버리는 방편으로 도를 얻었습니다.” 
이때 대세지(大勢至)보살이 오십이 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이와 같이 말했다. 
“제가 생각하니 과거 초일월광(超日月光) 부처님은 저에게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사람은 전심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다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고 보아도 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두 마음이 간절하면 이 생에서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시방세계의 여래(如來)가 중생을 생각하는 것도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지만, 자식이 멀리 달아나 버리면 생각한들 무엇 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한다면, 어미와 자식이 여러 생을 지내도록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현세에나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을 볼 것이며, 방편을 빌지 않고라도 저절로 마음이 열릴 것이다. 그것은 마치 향을 다루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과 같으리니 이것을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수행 시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 생멸이 없는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머물러 흔들리지 않음.
에 들어갔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섭수(攝受)하여 정토(淨土)에 왕생하게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어느 한 감관만을 가릴 것이 아니라, 여섯 감관을 모두 거두어 깨끗한 생각이 서로 잇따라 삼매를 얻는 것이 제일이겠습니다.” 
『首楞嚴經 6』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