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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장 불멸 후의 불교

 1. 불교의 전파와 마우리야 왕조

 부처님이 입멸한 뒤 불교의 교단은 장자 마하카삽파 등이 중심이 되어서 석가가 가르침중 바른 율과 바른 법을 유지하기에 힘썼다. 그 결과 불교는 마가다 지방을 주요한 근거지로 하여 여러 도시의 왕후나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면서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그러할 무렵에 인도 땅에는 획기적인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의 알렛산도 대왕이 페르샤를 정복한 여세을 타고 북부인도에 침입해 온 것이다. 대왕의 인도 원정(BCE 327-325)은 토착의 인도왕의 저항과 원정군의 피로로 판잡지방의 입구에서 저지되고, 그 군대는 그 일대에 몇몇 도시를 건설해놓고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왕의 침입이 가져온 커다란 영향은 인도 사람들 자신으로 하여금 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마우리야제국이란 일대 통일국가를 형성케 한 것이었다.
 마우리야 제국의 시조 찬드라굽타(月護 BCE 321-299 재위)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자이나교도였다고 하며, 다음 왕 빈두사라(頻頭娑羅 BCE 297-264)는 브라만교도였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은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한편 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의 수도 늘어나고 있었다. 대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었고 대체로 각 가정에서는 브라만교에 의한 의례가 채용되고 있었으며 쉬바신이난 비슈누신에 대한 신앙도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자이나교는 각각 성전의 정비와 교권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서서히 주민의 각층에 침투하고 있었다. 
 마우리야왕조 3대왕을 아쇼카(阿育王, BCE 264-227) 왕이라 한다. 그는 부조의 종교를 존숭하기도 하였지만, 자기 스스로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왕은 즉위 제8년에 칼링가 지방을 정복하기 위한 대전쟁을 일으켰으나, 그 전쟁의 참상에 깊이 느끼는 바 있어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전쟁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불교의 정신에 따라 정치를 행했다. 왕은 ‘법에 의한 승리’만이 참된 진리라는 신념 아래 국민에게 그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고 법의 실천을 촉진시키기 위해 법칙을 발포하고 자주 순행을 하는 등 크게 민중교화에 힘썼다. 
 왕은 여러 가지 위업을 남겼지만 특히 불교의 발전에 관해 직접적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교단에 대해서 원조를 하였고, 불적의 보존, 불탑 및 가람의 건립, 경전의 편찬, 그리고 포교사의 파견 등 다방면에 걸친 일을 하였다. 불교를 각 지방으로 전파시키기 위해서 왕은 장로들을 9개 지방으로 파견하고, 각지에서 비교적 평이한 경전의 소설을 중심으로 포교케 했다. 이로써 카슈미르,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지와 바크트리야의 희랍인 거주지, 실론, 버어마 등의 국외 여러 지역으로까지 불교가 처음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실론으로는 그 아들 마힌다 일행을 보냈고, 또 뒤이어 그 딸 상가미타까지 그곳으로 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상가밋타는 부처님의 유골과 어린 보리수를 실론으로 전했다고 한다. 왕의 불교에 대한 열의가 어떠했던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실론은 그 이래 오늘날까지 불교국으로서 번영하여 동남아시아에 있어서의 불교의 기지가 되었다.


 2. 부파불교의 전개와 대승운동

 아쇼카왕 뒤에 마우리야제국은 점차로 쇠퇴하고 머지않아 슝가와 야바나의 시대(서력 BCE 187-30)가 되었다. 슝가왕조는 배불주의 정책을 쓰고 브라만교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한편 야바나에는 메난드로스와 같은 불교 귀의자로서 이름난 왕이 나타났다. ‘야바나’란 말은 희랍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 인도에서 태어난 희랍인 왕인 메난드로스가 불교의 학승 나가세나 장로와의 사이에 교환한 불교의 철학적 논의는 <밀린다 팡하>란 문헌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인도에 살아온 희랍인들은 주로 서북인도에서 세력을 펴고 있었고, 한때는 중인도까지도 진출하였으나, 힌두 제왕의 반격을 받고 곧 후퇴하였다. 그때 (서력 BCE 90) 바로 서쪽 국경을 넘어 샤카족이 침입해 들어왔다. 샤카족은 희랍인들이 있던 곳으로 뚫고 들어와 점차로 그 세력을 증강시켰다. 
 그러는 동안에 불교는 계속하여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갔다. 그러나 불교가 각지로 전파 유통하게 되자 교단의 통솔면에서는 적지않은 문제가 생겼다. 즉 부처님이 돌아간 후 100년경에 전통적 부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계율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고 마침내는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파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이 양파가 각각 분열하여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까지에는 18 또는 20 정도의 부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파의 발생은 학설의 상이에 따르는 것도 있지만 학설보다도 지도적 장로를 중심으로하여 일파를 형성한 것,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파를 이룬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각 부파에서는 각각 자파의 권위를 올리고, 그것이 정통적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자파독자적인 성전을 편찬해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성전은 제1회의 결집 이래 구전으로 암송되어 전해 내려왔는데, 팔리어 성전은 서력 BCE 1세기경 실론의 상좌부에서 비로소 필록된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반드시 불교의 발전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분파에 의하여 불교는 부처님 당시와 같은 순수성 내지는 발자성을 잃고 율이나 경에 대한 해석 즉 아비달마의 학문이 발달해서, 자연히 승원중심·출가중심의 학문불교로 화하고 대중성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면에 저속한 미신적 신앙을 성하게 하는 결과도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불교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시키려는 운동이 생겨났다. 그와 같은 움직임은 특히 진보적인 대중부의 비구들 및 재가의 신도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대승불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BCE 1세기경의 일이라고들 하나 대승 사상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서부터다. 대승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불타관, 보살사상, 수도론 등은 불전 <자타카>, <아바다나> 및 아비달마불교의 우주론 등의 발달과 더불어 조금씩 점차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어 소위 대승경전이 생기게 된 것이다. 
 1세기의 후반에 이르러 새로이 서북인도에 침입한 쿠샤나족은 점차로 세력을 부식하고 쿠샤나 제국을 만들었다. 그 제국의 세 번째 왕인 카니슈카(迦▩色迦, 128-151)는 아쇼카왕 다음가는 불교의 보호자였다. 그는 푸루샤푸라(혹은 페샤와르)에 서울을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 서인도의 북반,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왕의 친우 가운데에는 아슈바고사가 있었는데 그는 불교시인으로서 유명하였으며 <붓다차리타>라는 불전을 지었다.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이나 가람을 건립하고 교단에 대해 공양을 올렸다. 불교는 이 때에 ‘파르티야’나 ‘소그디아나’ 지방에까지 보급되고, 머지않아 그곳의 학승들이 중국으로 가서 불전의 번역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다. 실로 이 때에 쿠샤나 제국의 영토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간다라 지방에서 마투라 지방에 걸치는 지역에는 유부, 대중부, 음광부, 법장부, 화지부 등의 여러 부파가 병립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유부가 가장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유부파가 중심이 되어서 불교의 아비달마적 발전을 더한층 추진시킨 것이다. 그 결과 유부 학설의 일대집성인 <대비바사론>이 카슈미르의 학승들의 손으로 편찬되었고 그 책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부파의 세력 사이에서 대승운동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적어도 4세기 경에는 대승사라고 불리우는 사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특징은 아비달마불교가 훈고학에 치중한데 대하여 실천신앙에 중점을 두고 출가주의보다도 재가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부처님이 출가수도한 본 뜻은 모든 사람들이 그 고뇌에서 해탈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대승은 이 석존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 보살도라고 하는 여섯 개의 완덕의 길을 실천함으로서 모두 다 불과에 도달한 것을 설하는 것이다. 
 푸루샤푸라를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 지방은 쿠샤나 시대의 초기에 희랍풍의 불교미술을 발전시킨 곳으로서 또한 유명하다. 조각과 건축 그밖에 장식의장에 헬레니즘의 영향이 강한 이곳 미술의 경향은 순수한 인도미술과도 다른 한 지방적 미술이기도 하였지만 불상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 후대 아시아 각 지방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준 것, 이러한 점에서 불교미술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사상적 배경으로서 생각되는 것은 종래부터의 부파불교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부파불교에서 대승에로 옮겨가는 전환적인 움직임도 간취된다. 이곳의 미술은 카니슈카왕의 치세에 그 극성기를 맞이했고, 그 후 한동안의 침체기가 있었으나, 4·5세기 경에는 다시 새로운 부흥이 있었다. 그 뒤 그곳에서 불교가 쇠미해지자, 그 미술도 또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3. 불교의 융흥과 그 쇠퇴

 대승불교가 사상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던 BCE 1세기에서 서력 기원후 3세기까지의 사이에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나타났다. 초기 대승경전의 주요한 것들은 <반야경> <유마경> <법화경> <아미타경> <십지경> 등이다.
 당시의 인도에는 정치적으로 남쪽에 안드라, 북쪽에 쿠샤나의 2대국이 세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고 중간에 개재하는 소국의 제왕은 그 어느 한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두 나라는 서인도의 중심 문화도시 웃제니를 통해서 연결된 통로를 거쳐 서로 왕래하고 있었다. 당시 불교가 성하던 지방은 모두 이 통로상에 분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안드라국 안에서는 다냐카타카-프라티슈타나-나아시크를 연결하고 쿠샤나국 안에서는 카피샤아-푸루사푸라-마투라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초기의 대승경전은 처음에 속어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뒤에 대승운동이 각지에 퍼지게 되면서 경전의 용어도 산스크리트어가 채용되게 되었다. 이는 그 시대의 사회적 추세에 따라간 것으로 그 결과 경전의 권위가 높아지게 되고 그리하여 불교는 브라만교의 제종파와 철학적 종교적으로 대항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반야경>은 그 경전의 사상이 남에서 북으로 보급해가는 과정에 극히 오래된 적은 부분에 대하여 새로운 부분이 차례차례로 추가되어 7세기 경에는 일대총서의 형태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 경전에 실린 반야의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기초교리로서 불교의 근본사조를 이루었다. 이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지운 이는 남인도 출신의 나가르주나(龍樹 150-250)이었다. 그는 남인도의 여러 왕가의 귀의를 받았으며 그의 주저 <마디야마카-카리카>는 부파소승이 빠진 그릇된 견해를 비판하고, 부처님이 깨달은 법인 중도를 연기, 무자성, 공이라는 것으로 나타내려고 하였다. 
 3세기에 들어서자 쿠샤나 제국은 쇠망하고 안드라왕국도 또 분열하였다. 남쪽 크리슈나강 이남에는 팟파바왕조가 생기고, 데칸고원의 북부에는 바카타카왕조가 일어났다. 이런 혼란 중에 마가다에는 챤드라굽타(320 즉위)가 나타나 굽타왕조를 창시하였다. 이 왕은 그 마우리야왕조의 빛나는 전통을 부활시키는 자로서 환영받았다. 둘째 왕 사무드라굽타 때에 이르러 이 왕국은 데칸 지방을 그 지배 밑에 넣고 전인도에 군림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나가르주나 이후에 나타난 중기의 대승경전에는 <열반경> <승만경> <해심밀경> <능가경> 등이 있다. 그 중 <해심밀경>의 소설인 유식설은 대략 270년서 480년까지의 사이에 마으트레야, 아상가, 바수반두(世親)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정리된 것이다. 앞서 ‘나가르주나’나 그 제자 아리야데바(提婆, 170-270)의 중관설에서는 제법의 무자성, 공임을 논증하였으나,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마이트레에야의 <마하야나수트라알랑카라, 아상가의 <마하야나상그라하>, 바수반두의 <트림시카 비지납티> 등 일련의 대표적 저작은 식(識, 心)을 주체적으로 취급하므로써 제법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특히 간다라 출신의 바수반두는 처음에 부파소승의 입장에서 <아비달마코샤>를 저작했으나 나중에 형인 아상가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였다. 그리하여 유식에 관한 저작을 비롯하여 <심성론> <정토론> 등 각 방면에 걸친 여러 가지 논서를 내었다. 그는 5세기의 70년대에 굽타왕조의 푸루굽타왕 및 나라신하굽타왕 두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전한다.
 중관과 유식의 두 사상은 바수반두 이후 유력한 학파를 형성하여 계승되고, 7세기에 있어서도 이 두 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주요 학파로서 존재했었다. 중관학파는 붓다팔리타(佛護, 470-540)의 계통과 바바비베카(淸辨, 490-570)의 계통으로 나뉘었으나 전자는 프라상기카라고 불려졌으며, 찬드라키르티(月稱, 600-650) 및 샤안티데바(寂天, 680-740) 및 카말라실라(蓮花戒, 700-750)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 쪽은 바수반두를 계승한 디가나가(陳那, 400-480)의 계통과 구나마티(德慧, 420-500), 스티라마티(安慧, 470-550)의 계통으로 나뉘었다. 전자를 유상유식파라고 부르고, 후자를 무상유식파라고 불렀다. 전자를 계승한 자에 다르마팔라(護法, 530-561), 달마키르티(法稱, 643-673)가 있다. 이런 제학파는 단순히 외교인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제파와 논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안에 있어서도 각파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전개하였다. 
 중국에는 나란다 사원을 무대로 하는 호법, 청변 공유의 논쟁이 단순한 한낱 사전으로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공유의 논쟁은 중관과 유식이 붓다의 입장에 서서 비교연구를 하고 난 뒤 양자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각자의 역사적 사명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이 시대에 나란다 사원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주석서가 만들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에 생긴 것이 주석서뿐이고 새로운 체계의 수립이 없었기 때문에 불교이해를 미궁으로 빠뜨린 결과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 시대의 주석서들은 원전 이해상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인도의 불교는 대승불교가 그 주류를 이루어갔으나 아직도 각지에는 유력한 부파들, 유부, 대중부, 정량부, 상좌부, 법장부 등이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불교는 인도와 실론뿐만 아니라 남해 제지역, 서역 제국, 중국, 우리나라 등 각 지방으로 전파하여 그 여러 지역과 인도 사이를 왕래하는 순례자나 학승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굽타왕조의 쿠마라굽타 일세 때에, 마가다에 앞서 말한 나란다사원이 생겼고 그곳은 불교학의 중심지로서 8세기 경에는 그 극성시대를 이루었다. 그와 같은 중심지는 서부인도의 ‘발라비’나 부처님이 성도한 붓다가야에도 있었다. 붓다가야에서는 앞서 사무드라굽타시대에 실론 불교도의 손으로 설치된 마하보디 비하라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부근 부락의 출신인 붓다고사는 실론으로 건너가 상좌부 불교 발전을 위해 대단한 활약을 했다. 남인도의 아마라바티는 훌륭한 불교미술의 중심지인 동시에 버어마나 말라야 방면과 교섭을 가진 불교기지이기도 하였다. 
 입축구법승인 중국의 법현(法顯, 340-421), 현장(玄▩, 602-664), 의정(義淨, 635-713) 그리고 우리나라의 혜초 등은 그 당시 인도 불교계의 동정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데, 당시 인도에서는 다만 불교만이 성행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불교에 대한 힌두교 각파의 사상적 공세, 의례적 영향은 심한 바가 있었고, 또 타종교인으로부터의 불교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 
 굽타제국은 5세기 말엽에 쇠미하고 인도는 정치적으로 혼란 상태에 들어갔다. 그 뒤 7세기 초에 하르샤왕이 나와 한때 북방인도를 통일하였으나 왕이 죽은 후 다시 분열 상태가 나타났다. 하르샤왕 때에 나란다사원에는 실라바드라 등의 학승이 나타나 활약했고, 한편 판차 라리샤드(無遮會, 5년마다 행하는 법회) 같은 대공양회도 행해졌으나 불교는 옛날의 위세를 잃고 있었다. 
 부처님 자신은 세속 사람들이 주법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특수한 경우에 한해 주어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원시경전 가운데에 <파릿타>라는 것이 있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부나 법장부와 같은 부파는 <경율론삼장> 외에 그러한 주어를 모은 명주장이란 것을 전해 내려왔다. 실론의 상좌부도 상용경전으로서 <파릿타>를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주구를 일걸어 만트라, 다라니(陀羅尼, 呪語)라고 한다. 이런 만트라와 다라니를 송지하고 그것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이 되는 것을 설하는 불교를 밀교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밀교사상이 7세기의 중엽으로부터 말엽에 걸쳐 조직적으로 종합되어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는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경전은 후기의 대승경전으로 분류된다. 이와 같이 밀교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바수반두 이후의 불교가 너무나 철학적, 이론적으로 되어 일반 대중에서 유리하고 그 아비달마불교가 빠진 것과 곡같은 잘못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종교로서의 입장을 되살리려는 기운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운이 당시 인도의 탄트라문학 유행의 일반적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되기에 이른 것이다. 7-8세기에 이르러서는 앞서 말한 중관사상도 밀교한 것이다. 
 밀교는 힌두사회에서 환영되었기 때문에 급속히 보급되었으나 8세기 후반으로부터 대중화함과 동시에 비속화하고 야비한 의례를 도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밀교가 대중화한 것을 바지라야나라고 불렀는데, 그 개조는 인드라부티(因陀羅部底, 8세기 전반)였다. 그 아들 파드마삼브하바는 밀교를 티벳트로 전한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그때 바로 인도로부터는 다수의 고승이 티벳트로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승불교를 전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티벳트에는 중국으로부터도 학승이 와 있었으며 이들과 인도인 학승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는 점들이 있어 혼란이 생겼었다. 그리하여 티손데첸왕은 그 서울 라사에서 회의를 열고 양자를 대결 논의케 하였는데, 결국 인도의 카마라실라측 즉 점문파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의 설은 배척을 받았다. 그 결과 티벳트의 불교는 인도 후기불교의 조류를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인도의 불교는 티벳트에 들어갔으며, 그 티벳트로의 밀교는 머지 않아 라라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때 인도에서는 미맘사파의 쿠마리라나 베단타파의 샹카라가 나와 불교에 대해 논파활동을 행했다. 그들은 열렬한 신앙을 아름다운 찬가로서 표현하고 간명한 사상을 권위있게 대중에게 설하였다. 이에 반하여 불교측에서는 이들에 대항할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때때로 고명한 학승이 나와도 그들은 네팔이나 티벳트의 청을 받아 그 지방들에서 활동했던 모양이다.
 앞서 말한 바지라야나는 팔리왕조(약 750-1199)의 보호를 받아 마가다의 북쪽 간지스 강반의 비크라마실라사원을 근본도량으로 삼고, 주로 마가다지방과 서벵갈지방에서 영향력을 가졌다. 그 후 아티이샤 등의 활동이 있었지만 힌두교나 거의 다를 바 없게 된 불교는 더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머지않아 세계원인으로서의 아디붓다의 신앙이 나타나고, 또 인도에 들어온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칼라챠크라 탄트라’와 같은 것고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1203년에 이슬람교도의 군대에 의해 밀교의 근본도량이 있던 비크라맛실라사원이 그 밖의 다른 사원과 더불어 파괴되고 그때 승려의 대부분은 박해를 받고 죽든가 또는 네팔, 시킴, 티벳트 방면으로 도망했고 인도의 불교는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실론, 버어마, 타이,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티벳트, 중국, 한국, 일본 등 광범한 지역으로 전파된 석가의 가르침은 각지의 민족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문화의 꽃을 피우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불교의 본향 인도에 석가의 정신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의 ‘마하보니 비하라’ 운동과 같은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 

 석가의 전기란 이름을 가진 책은 지금까지 상당히 많이 간행되었다. 서양의 학자들이 특히 근거로 삼는 원전은 팔리어로 된 <자타카> (본생담, 즉 부처님의 생애 이야기)의 서문인 <인연담>이라는 책이다. 이것은 전기로서는 가장 완비된 형태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아마 5세기의 사람인 붓다고사가 지은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존의 시대로부터 약 천년 가까이 떨어져 있는 관계로 그 내용을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로서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큰 의문이다. 
 그 이전의 불전으로서 가장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은 불교시인 아슈바고사(馬鳴, 서기 2세기의 사람)가 지은 <붓다차리타>가 있으나, 이것도 역시 고타마의 시대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아직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또 그 이전의 불전으로서는, 불교 특유의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마하바스투> <라리타비스타라>라든가, 그 중국역 <보요경>, <방광대장엄경> 또는 그 밖에 <과거현재인과경>, <불본행집경>, <중허마하제경>, <불본행경>, <중본기경> 등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너무나 신화적, 전설적인 것이 많고, 석존이 극도로 초인화, 신격화되어 있으므로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경전 속에 불전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나 하는 것을 탐구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팔리어로 된 <대본경>과 그 경에 대당하는 한역에는 과거칠불의 사상이 나타나 있고, 그 중의 비바시불의 전기는 매우 상세하게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후대에 기록된 석존의 전설과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그래서 석존에 관한 전설이 비바시불의 전설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그 역도 가능한 것이다. 즉 과거칠불에 관한 전설이 먼저 생겨, 그것이 불전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공상인가도 역시 분명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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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책의 제목에 ‘석가’란 이름을 달았다. 본래 불교의 개조를 붓다라고 부르는 것이 인도를 비롯해 남아시아 및 서양제국에서의 풍조다. 그 말을 중국에서는 옛날 불교가 중국에 도래할 때 이래로 ‘불’이란 글자로 음사하였고, 후에는 ‘불타’란 두 글자를 썼으므로 그것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붓다를 불타라고 쓰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이 한자에는 아무런 뜻이 없고, 인도말로 ‘붓다’란 ‘깨달은 사람’이란 뜻을 가졌다. 티벳트 사람들은 ‘Sansrgya'라고 번역하는데, 그 뜻은 ’정화발전된 사람‘이란 의미다. 그러므로 이 붓다란 말은 불교의 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불타가 몇 사람있든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무수한 불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불교의 개조 개인을 두고 말할 때에는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란 이름이 쓰인다. 오래된 불전에 씌어 있고, 또 오늘날 서양의 학자들이 많이 이와 같은 호칭을 쓴다. ‘고타마’란 그가 속해 있던 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석가’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약어로서 원래의 인도음 Shakyamuni 또는 Sakyamuni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다. ‘샥카’란 고타마 붓다가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란 ‘거룩한 분’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샤야캬무니라고 하면 샥카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 되므로 고유명사로 쓸 수가 있다.
 한역 경전들에서는 그를 존칭하여 석존이라고 자주 불렀는데, 그것은 석가세존이란 말이 준 것이다. 세존이란 말은 인도말 ‘바가받’의 번역으로 우리 말의 ‘님’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하여튼 ‘높은 어른’을 뜻하는 말이다. 영국 사람들은 ‘Lord', 프랑스 사람들은 ‘Seigneur'라고 번역한다.
 우리는 이 책 안에서 고타마 붓다를 여러 가지로 호칭하였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그 여러 호칭들은 상이한 뉘앙스를 가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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