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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석가의 젊은 시절


 1. 유년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만에 그 생모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슬픈 일이 그후 젊은 태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태자는 그의 이모인 마하프라쟈파티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이 사람은 비구니 교단의 최초의 입단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전들에 의하면, 석가가 입멸하기 얼마 전에 차마 그 입멸을 직접 눈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하여 먼저 입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연령상, 이 이가 태자의 계모가 된 것은 아직도 젊은 시절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녀는 정반왕의 후처이며, 나중에 난다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후 석존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마하프라자파티가 태자의 양육을 맡은 사실은 오랜 경전에도 나오나, 그녀가 태자의 이모였다는 것은 다만 후대의 경전들만이 전하는 사실이다.
 샤캬족에는 태자 탄생 이후 다른 공자들이 많이 태어났다. 대부분 사촌 동생들인 그 공자들 가운데에는 데바닷타, 아난다, 아누룻다, 마하나마 등이 있었다.
 석존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오랜 불전들 속에 거의 언급된 것이 없다. 팔리어로 된 네 개의 <니카야>와 <율장>에는 출가 이전에 관한 기록이 거의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다. 후대에 만들어진 과장 많은 불전들은 태자가 일곱 살 때에 벌써 무척 감상적인 관찰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정반왕은 가문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밭으로 나가, 봄바다 열리는 축제를 참관했다. 일군의 보습이 밭을 갈아갈 때 그 보습 속에 한 적은 벌레가 묻혀 나왔다. 언제 보았는지, 날아가던 새가 그 벌레를 주둥이로 물고 달아나 버렸다. 태자는 그 광경을 보고 '살아있는 것들은 저렇게 서로 먹고 먹히고 하는구나'라고 말하고 감회에 젖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경전들 가운데는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던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도 있다.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나간 모양이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의 오랜 조각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진 것도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글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가 생각하는 것이다.


 2. 태자의 교육

 고타마 싯다르타는 당시의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에 나온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을 한 것은 일곱 살 경서부터일 것이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도의 습관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서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아사리에 따라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태자는 후세의 불전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일곱 살 때 배우기 시작해서 열아홉 살 때 일단 공부를 끝내고 그 때에 결혼을 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가 있다. 이 12년간이라는 기간은 세 개의 <베다> 혹은 후세에 와서는 네 개의 <베다> 중의 한 <베다>의 학습 기간이지만 이 기간 중에 이른바 베단따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를 학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베단따라는 말은 <베다>의 보조학이라는 뜻으로서,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 한편 쟈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 문법학 등을 열거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의 암송,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에 관한 학문, 사전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석존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하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다. 석존의 '나'에 대한 관점, 상주관, 열반관, 해탈관 등에는 이 <우파니샤드>의 교양이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의 방면만이 아니라, 무의 방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후세의 불전에서는 크샨티데바란 사람한테서 태자가 무예백반을 배워 29종의 묘술을 속히 습득했다는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있으나 그것은 그 불전이 씌어질 당시의 것을 소재로 하여 꾸민 이야기이므로 그대로 신용할 수는 없지만 무사계급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쇼다라비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다.


 3.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그 태자비가 라훌라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모든 불전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비의 이름은 남방성전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고, 또 한편 북방성전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방의 팔리어 전기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지금 우리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석존의 제자나, 비구니나, 그 밖의 신자들 중에도 이와 같이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쇼다라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다. 그 말뜻은 '명예를 지닌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야쇼다라에 관한 이야기로, 석가가 성도하고 옛 왕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영한 것, 그리고 후에 그 이모 마하프라쟈파티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비구니가 된 것, 이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남방의 성전인 <붓다밤사> 속에서는 처음부터 그 비의 이름을 밧다캇챠나라고 하고 있으며, 올덴베르그 같은 독일의 불교학자는 이 이름이 태자의 정비의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성전은 매우 후대에 속하는 문헌이므로 그렇게 믿어서 좋을지는 의문이다. 이 밧다캇챠나란 이름은 빠알리어 <증일니카야>의 제자품 속에서는 '라훌라모'의 후신이라고 하고 있다. 북방성전인 <랄리카비스타나>에서는 비의 이름을 '고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가계에 대해서도 경전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팔리어 전기들에서는 천비성의 숩파굽다와 아미타와의 사이에 태어난 분이라고 하고, 데바닷타가 그 오빠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한역에서는 이것이 여러 가지로 되어 있어, 혹은 집장(執杖, 단다파아니)의 딸이라고도 하고 선각의 딸이라고도 하고, 또 혹은 마하나마의 딸이라고도 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 정하기가 쉽지 않다. 데바닷타에 관해서도 팔리어 계통에서는 태자비의 오빠라고 하고 있으나, 한역에서는 모두 아난의 형이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이름이 분명치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태자비가 전형적인 인도의 귀부인으로서 남편에 대해서 종순하고, 표면에 나타날만한 어떤 좋지 않은 인간성을 전혀 가지지 않았던 사람임을 짐작케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았고 성전의 작자들이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가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다만 후대의 불전작자들만이 그녀에 관한 것을 무엇이든 쓰지 않을 수 없어서 되는대로 그 이름을 날조했던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태자가 결혼한 나이는 남방의 전설에 의하면 16세 때였다. 물론 그가 연애를 했는지는 오랜 경전이 아무것도 적어 두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다. 태자의 비에 관해서는 또 한 사람뿐이었다는 설과 세 사람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것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풍속이 일부다처였던 것은 확실하다.


 4. 젊은 날의 고민

 석가는 후년에 사위국(舍衛國, 사밧티, 슈라바스티)의 급고독원(給孤獨園, 고독자에게 은혜를 베푼 이의 동산)에 있을 때, 그의 청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모든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한다.
 "나는 매우 즐겁게,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무척 즐겁게 살았다. 아버님 궁전에는 연못이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곳에는 파란 연꽃이 심어져 있었고, 또 어떤 곳에는 빨간 연꽃이, 또 다른 곳에는 흰 연꽃이 심어져 있었는데, 이것이 모두 나만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나는 카시 산의 전단향 이외에는 절대 쓰질 않았다. 내 옷감도 카시의 것이었다. 샤스도 그랬다. 내복도 그랬다. 추위나 더위, 먼지나 풀, 이슬이 내 몸에 닿지 않도록 언제나 나만을 위한 흰 산개가 밤이나 낮이나 한결같이 쳐있었다.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다. 하나는 겨울을 위해 있었고, 또 하나는 여름을 위해, 그리고 또 하나는 장마철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넉 달 동안의 장마철에는 장마철에 적당한 궁전에서 여자들만이 노는 기악 속에 파묻혀 있어, 결코 궁전에서 내려와 본 일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다른 사람 네집들에서는 노복이나, 일꾼, 심부름꾼들에게 양식에다, 신 죽[酸粥]을 주고 있었지만, 아버님 댁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쌀밥과 고기를 주었다.
 나는 이와 같이 유복하고, 이와 같이 무척 즐거웠으나, 이런 생각을 하였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 늙어가며, 그 늙는 것을 면치 못하였는데, 노쇠한 다른 사람을 보고 생각에 잠겨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염증을 일으키고 있다. 나도 늙어가며 그 늙는 것을 면치 못한다. 나야말로 늙어가고 있으며, 또 그 늙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노쇠한 다른 사람을 보고는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염증을 일으킬 것이 아니냐? 이렇게 되는 것은 내가 할바가 못된다.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청년시절에 있어서의 청년의 의기는 전혀 사라지고 말았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 앓는 것이며, 그 앓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앓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도는 생각에 잠겨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염증을 일으키고 있다. 나도 또 앓는 것이며, 그 앓는 것을 면치 못한다. 나야말로 앓는 것이며, 그 앓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앓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고는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염증을 일으킬 것이 아내냐? 이렇게 하는 것은 내가 할 바가 못된다.
 이와 같이 관찰했을 때, 건강한 시절에 건강한 의기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스스로 죽는 것이며 그 죽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죽은 다른 사람을 보고는 생각에 잠겨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염증을 일으키고 있다. 나도 또한 죽는 것이며 그 죽는 것을 면치 못한다. 나야말로 죽는 것이며, 그 죽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는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염증을 일으킬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하는 것은 내 할 바가 못된다.
 이렇게 관찰했을 때, 살아있을 때의 그 생존의 의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니카야 성구경이란 문헌에는 한층 더 절실하게 태자의 이와 같은 심정이 전해지고 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결국 구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구하는 데에 착하게 구하는 것과 악하게 구하는 것이 있다. 악하게 구하는 것이란 자기 스스로 태어나게끔 된 존재이면서 남이 태어나는 것을 바라며, 자기 스스로 늙어가게끔 된 존재이면서 남이 늙는 것을 바라며, 자기 스스로 앓게끔 마련인 존재며, 죽어가고 있는 존재며, 슬픔에 잠겨있는 존재며, 더러움에 물들어 있는 존재이면서, 자기와 같이 병든 자, 죽어 가는 자, 슬픔에 잠겨 있는 존재며, 더러움에 물들어 있는 존재이면서 자기와 같이 병든 자, 죽어 가는 자, 슬픔에 잠겨있는 자, 더러움에 물든 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처자나, 심부름꾼이나, 가축이나, 금은 등 모두가 이 생겨나고, 늙고, 앓고, 사라지며, 슬픔에 잠기며, 더러움에 물드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스스로 멸망해 가는 존재이면서 그것들이 멸망해 가는 것을 찾아 헤매며, 집착하고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대로 착하게 구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며, 늙어 가는 존재며, 늙어 가는 자며, 앓는 자, 죽는 자, 슬픔에 잠기는 자, 더러움에 물드는 자이면서 생·노·병·사나 슬픔이나 더러움을 떠나지 못하고, 멸망해 가는 자의 화를 보고 생·노·병·사를 모르며 슬퍼하지 않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법, 무상안온의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기도 착하게 구하는 일을 하지않는 사람 중의 하나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제부터는 죽음과 슬픔과 더러움을 떠난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 얼마나 간결하고 또 명쾌한 말이냐? 누구든지 살아가는 도중에 이와 같은 의혹과 불안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자기가 살고 있는 인생 자체를 그대로 긍정만 해버리는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태자는 누구보다도 이것을 통감하고, 여기서 벗어나려고 했던 분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말도 남기었다.
 "나는 아직 정각(正覺)을 얻지 못한 구도자였을 때, 이렇게 생각했었다. 이 세계는 참으로 고난에 가득 차 있다.
 태어나 늙고, 쇠약해지고, 죽어서 또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이 늙음과 죽음의 고통에서부터 멀리 떠나 헤어날 줄을 모른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무슨 연고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
 젊은 태자는 의연히 이 노사의 문제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미 석가가 태자 시절에 연기에 관한 깊은 통찰을 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정각을 얻기 전 구도자였을 때, 쾌락적인 욕망이 고통 많고 기쁨이 적은 고뇌에 가득 찬 화 많은 것임을 그대로 잘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욕망, 이 좋지 않은 법 외의 희락을 알지 못하며 그것보다 나은 다른 것에 도달해 있지 못했으므로 그 동안 나는 쾌락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석가의 젊은 나날을 앗시지의 성인에 비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나, 얼핏보면 석가의 태자 시절의 생활이 탕아의 그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는 하겠으나, 석가의 경우 그의 젊은 날의 쾌락적 생활이 결코 반성 없는 무자각한 탐닉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일 것 같다. 우리는 그에게 이미 얼마 안 가서 정각할만한 충분한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참된 것을 구하는 정신이 누구보다도 깊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그의 귀는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밝았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후세의 불전이지만 <방광대장엄경>에는 이 대 왕궁에서 연주되던 음악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미녀가 부르는 노래는 욕망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그러나 더러움 없는 사람은 그 소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듣는다.
 거룩한 자여, 고통에 잠긴 사람들을 보고, 원을 일으켜 행을 거듭하신 옛 일을 회상하소서.
 집을 떠날 때는 지금이다. 큰 자비로써 삼독(三毒)의 사람들을 구하라.
 그러면 구름이 걷히고, 달이 빛나듯 몸의 빛이 사방의 나라들을 비추리라. 삼계(三界)는 고뇌다. 성난 불과 같이, 든 구름과 같이, 물 위의 달, 골짜기의 산울림, 환각의 물거품과 같더라.
 어리석은 자는 젊음을 좋아하나 머지않아 늙음과 병과 죽음 때문에 부서진다.
 비컨대 꽃에 뒤덮인 가지의 꽃이 떨어지면 버림받음과 같으리라.
 공후의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 현과 손이 합쳐 소리를 내어도 그것은 본래 온 것도 아니고 간 것도 아니다.
 연속에 소리는 잡히지 않으며, 연을 떠나서 또한 소리는 없도다.
 모든 것은 공적하여 나도 남도 없도다.
 거룩한 자는 일찍이 부처님을 만나, 벌써 참된 진리를 아셨노라.
 감로의 가르침을 빗발치게 뿌릴 때는 지금이다.


 4. 출가

 태자가 결혼한 후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이 때에 이른바 사문출유란 사실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문출유의 이야기는 팔리어 성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과거불 비팟신과 관련된 이야기로서 나타나 있다. 즉 이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아직 왕자일 때, 수레를 타고 궁전 밖으로 나와 유원으로 가는 도중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보도 심각한 반성을 하여 그 수레를 끌고 가던 차부와 대담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하여 사문출유의 전설이 되었다. 그 전설에 의하면 태자는 왕성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하여 각각 노인, 병자, 죽은 사람, 그리고 수도자를 만났다는 것이며, 또 벌레나 새가 서로 먹고 먹히는 광경을 보고, 세상이 비참하고 의지할 바 못됨을 통감하고 머지않아 출가를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성의 동쪽 문을 나섰을 때, 태자는 백발을 늘이고, 허리는 굽고,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걷는, 다 죽어 가는 노인을 보았다. 차부에게 태자는 나도 저렇게 될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물론 늙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고 대답하자, 태자는 이 말을 듣고 슬픈 마음이 생겨 출유를 단념하고 왕성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에는 병자를 보았고, 남문으로 나갔을 때에는 장례의 행렬에 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태자는 수레를 뒤로 돌려 궁전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부왕 숫도다나는 초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태자가 출가하고자 하는 것을 막으려고 태자에게 여러 가지로 충고와 책망을 되풀이했다. "이 나라의 법에, 아들을 낳고, 가사나 국사를 맡길 수 있게 된 이후에 출가수도에 전념하는 것은 허락이 되지만, 젊어서 세상을 버리고 가사나 국사를 돌보지 않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제발 마음을 돌려서 이 나라, 이 가문의 일을 걱정하도록 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태자는 도리어 "왕으로서 만약에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이별이 없다는 이 네 가지 조건을 보장해 주시면, 출가할 마음을 단념하겠습니다. 아니 후세에 도 다시 생을 얻는 일이 없다는 한 가지 조건만 보장해 주실 수 있다면, 출가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여러 가지 불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부자간의 실제상 대화는 아닐 것이라고 보고, 이러한 대화를 비유로 해서 부처님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세간을 생각하는 마음과 세간을 초월한 마음[出世間心] 사이의 싸움을 그린 것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깊이 있는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태자는 마지막으로 북문으로부터 출유하였다. 이번에는 길가에서 한 사람의 사문(沙門)을 만났다. 퇴색한 옷에 몸을 담고, 위의가 바르며 행동이 단정한 스님이다. 태자는 이 수도자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이것이 내가 갈 길이라고 최후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날은 기꺼이 놀이터에 들어가 화려한 옷을 입고, 하루를 즐기었다. 아미 이것이 이 세상일을 마지막으로 결말짓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놀이가 끝나고 피곤하여 태자가 망가라 못가의 의자에 기대고 있을 때, 야쇼다라가 왕자를 낳았다는 소식이 왔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장애가 생겼군, 계박이 생겼어." 이렇게 말하였으므로, 사신은 왕궁에 가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고, 그때부터 이 갓난 왕자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이 사문출유는 씌어진 이야기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있기는 있었을 터이지만, 그보다도 더 태자의 인생관을 묘출하려는 의도에서 이와 같이 각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태자가 출가하기 직전에 왕자가 탄생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일 것이다. 태자는 실로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도의 관습으로는 아들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가계가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종교적으로도 죄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라훌라가 생겼군"한 말은 다르게 말하면 "출가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생겼군"하는 말이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심은 이미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태자는 궁성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에서 크샤트리아족 출신의 한 처녀 키사고타미가 태자의 행렬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쏠리는 마음으로 얼핏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저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행복하겠네,
 저런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행복하겠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받드는 부인은 행복하겠네.
 노랫소리를 들은 태자는 그 처녀를 바라다 보며, 자기의 반지를 빼 주었다.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란 말이었으며,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태자는 궁성에 돌아가자 그 거실로 들었다. 채녀는 악기를 들고 노래하며 춤추고 태자의 마음을 위로하려 한다. 그러나 태자의 마음이 그런 것쯤에 동요되거나 유혹당할 리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채녀들도 피로하여 그대로 깊은 잠에 들어갔다. 태자가 얼마 후 잠을 깨어보니 그 잠든 광경이 난잡하고 처량하기란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악기를 든 채 잠든 사람도 있고, 악기를 껴안고 잠든 자도 있었다. 태자는 그 광경을 보고 '마치 무덤과 같다'고 느끼고 출가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전한다.
 이러한 묘사는 흔히 불전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으로서 유명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단순한 판단일 것이다. 태자에게 이제 이 광경을 보기 전부터 벌써 몇백 번 '무덤과 같다'고 느낀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출가의 동기를 뚜렷하게 그려보고자 한 그 의도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날 밤 태자는 조용히 밤이 깊어 가는 것을 기다렸다. 사랑하는 처와 갓난 왕자에게 무언의 작별을 하기 위해 태자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밤이 깊어지자 태자는 마부 챤나에게 사랑하는 말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 이 말을 타고 몰래 성을 빠져나왔다. 불전작자들은 이 대목에서도 과장된 표현을 하기를 좋아했다. 애마 칸타카가 태자를 따라 그 거룩한 출가에 동반할 수 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발을 구르며 소리를 내자 신들은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며, 신들은 또 성문을 여는 요란한 소리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성문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여 갈 때, 악마는 "태자, 돌아가시오" 하고 유혹을 해왔다. 태자는 "악마는 물러가라, 내게 지상의 것은 필요가 없다"고 책망했다. 악마는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군" 이렇게 두려워하며, "그러나 언젠가는 이 사람에게도 마음의 틈이 생길 것이다. 그 때야 말로 내가 그 틈을 탈 때다" 이렇게 생각하며 이때부터 악마는 그림자처럼 태자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자는 밤길을 서둘러 아누피아 읍 근처에 있는 아노마강을 건너, 새벽에 강가에 서서 보석으로 장식된 왕자의 옷을 벗고 걸식사문의 옷으로 갈아 입고, 긴 머리칼을 자르며 그 밖의 모든 장식을 다 버리고 말았다. 마부 챤나는 계속해서 태자를 따라가기를 원했으나 태자는 왕자의 의복을 그에게 맡겨 왕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애마 칸다카는 이별의 슬픔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고 전한다.
 태자는 이제는 한낱 사문이다. 이날부터 그는 육신을 살리기 위해 바리를 들고 걸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집 저집에서 얻어 모아온 음식이 목구멍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토하려고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가란 당시의 풍조라고도 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성실하게 인생에 고민을 가진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이 출가의 길을 취해 수도의 생활에 나섰다. 나중에 불제자가 된 사람들 중 태자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출가한 사람에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있다. 마하카삽파도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출가했었다. 야사나 라다와라도 사치스럽던 그 생활에 고민을 품고 출가했다. 출가가 도대체 수도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경전에는 이러한 설명이 실려 있다.
 "재가의 생활은 장애 많은 먼지의 길이다. 출가의 생활은 큰 하늘과 같은 것이다. 정해진 대로 모두 원만하게 청정한 행을 하고자 하면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알맞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염을 밀고 머리칼을 잘라 없애고, 누런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사문이 되는 것이다."
 재가의 생활에 장애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출가의 생활이 성질상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유리한 조건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출가가 반드시 증오의 필연적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누차 석가도 말한 일이다. 석가는 자주 "재가도 출가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석가의 참 뜻으로 말하면 출가의 의미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捨], 출리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처자의 은애와 패반을 끊고 지위, 명예, 재산의 속박을 다 버리고 한 뜻으로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희생적 생활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태자가 출가한 나이에 관해서는 19세 설과 29세 설의 두 가지가 있으나 문헌상으로도 29세 설이 오래 되었으므로 지금은 19세 납비, 29세 출가설을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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