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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생행품(無生行品)

그 때 심왕(心王)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이 삼계의 밖으로 벗어나 헤아릴 수 없는 것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여쭈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은
세간을 벗어나 아무런 모습이 없고
일체의 중생들이
다 번뇌가 끝나게 하셨네.

결박을 끊고 대상과 주체를 비우게 되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것
생김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생김이 없는 법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생김이 없는 법인(無生法忍)의 가르침은 본래 생김이 없는 것이다. 모든 의식의 흐름은 생김이 없는 것이면서도 생김이 없는 의식의 흐름이 아니니라. 생김이 없는 법인을 얻었다면 곧 허망한 것이니라.”
심왕보살이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김이 없는 법인을 얻은 것이 곧 허망한 것이라 한다면 얻을 것도 없고 법인(法忍)도 없는 것은 허망하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왜냐하면 얻을 것도 없고 법인도 없다는 이것이 바로 얻을 것이 있는 것이니라. 얻을 것이 있고 법인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있는 것이니라. 얻는다는 데서 생김을 지니게 되며, 얻게 되는 법을 지니므로 아울러 허망하게 되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일러 법인도 없고 생김도 없는 마음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인도 없고 생김도 없는 마음이란 마음에 형태나 단락(段落)이 없는 것이니, 마치 불의 바탕과 같은 것이니라. 불은 비록 나무 속에 있지만 그것은 결정된 바가 없는 바탕에 있는 것이므로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요, 바탕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니라.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설명을 빌려서 이름으로 삼았지만 이름도 얻을 수 없듯이 마음의 모양도 그러하니라. 그 있는 데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니, 마음이 이러한 것인 줄 알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마음이니라.
선남자여, 이 마음의 바탕과 모습은 또한 ‘아마륵’이란 과일과 같아서 본래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요, 다른 것을 따라서 생긴 것도 아니며, 함께 생긴 것도 아니요, 원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생김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끊임없이 새 것과 옛 것이 교체하는 것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일어나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인연으로 사라지지만 소멸하여지는 것도 아니니, 숨고 나타나는 것은 형상이 없는 것이니라. 근본적인 이치는 적멸하여 있을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머무르는 것도 볼 수 없나니, 결정성이기 때문이니라.
이 결정된 바탕은 또한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요,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늘 있는 것도 아니니라.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나오는 것도 아니요, 생기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니라. 모두 네 가지의 비방(四謗)을 여의었고 말의 길이 끊어졌나니, 생김이 없는 마음의 바탕(心性)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무엇이 생김과 생기지 않음, 법인의 있음과 법인의 없음을 말하는 것인가?
만일 마음에 얻음이 있느니 머묾이 있느니, 또 그 이치를 보느니 하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혜를 얻지 못하리니, 그것은 영원한 어둠이니라.
마음의 성품을 깨달아 아는 자는 마음의 바탕이 이와 같아서 바탕 또한 이와 같이 생김도 없고 행함도 없음을 아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마음은 본래 행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모든 행함은 생김이 없을 것이며, 행함(行爲)을 일으키는 것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 생기지도 않고 행함도 없는 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행함(無生行)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생김이 없는 이치로 생김이 없는 행함을 깨달았느냐?”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왜냐하면 만일 생김이 없는 행함이라면 바탕과 모습(性相)이 공적하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말도 없고 해설도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일진대 어떻게 깨닫는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면 쟁론이 되리니, 다툴 것도 없고 논의할 것도 없는 것이 생김이 없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리의 바탕 속에는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깨달을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으며, 분별할 모습도 없습니다. 분별이 없는 속에서 청정한 바탕에 합일하나니, 그 바탕은 아무것도 혼합되어 있지 않고 말씀과 해설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도 아니며 모르는 것도 아니니, 가지가지의 본받아야 할 행함도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본받아야 할 행함은 있는 곳을 볼 수 없으며, 결정성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얻느니 얻지 못하느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그대가 말한 것처럼 일체의 마음의 흐름(心行)은 모습이 없으며, 주체는 고요하여 생김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느니라.
지니고 있는 가지가지의 식(識)도 이와 같으니라. 왜냐하면 눈과 눈의 감각은 다 공적한 것이며, 식도 공적하여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있을 수 없으며, 안으로 3수(受)가 없으니 3수가 적멸하느니라. 귀·코·혀·몸·마음 그리고 의식과 말나식과 아리야식도 역시 이와 같아서 모두 생기하지 않는 적멸한 마음이며, 생김이 없는 마음이니라.
만일 적멸한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김이 없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생김이 있는 행함이요, 생김이 없는 행함이 아니니라. 보살이여, 안으로 3수(受)와 3행(行)과 삼계(戒)를 일으키느니라.
만일 이미 적멸하여 마음을 내었더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적멸하여 공덕도 없고 쓰임(用)도 없으며, 적멸의 모습(寂滅相)도 깨닫지 못하고, 또한 깨달음이 없는 데도 머무르지 않느니라. 머물 곳이 없는데 있을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모습 없음(無相)을 지니면 3수와 3행과 삼계가 없으니, 모두 적멸하고 청정하여 머묾도 없느니라. 삼매에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좌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니 생김도 없고 행함도 없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선(禪)은 능히 움직임을 섭수하여 가지가지의 허깨비와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거늘 어찌하여 선(禪)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선(禪)은 곧 움직임이니 움직이지도 않고 선(禪)이라 하지도 않는 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니라. 선(禪)의 본성은 생김이 없는 것이니 생김을 여읜 선의 모습(禪相)이요, 선(禪)의 본성은 머묾이 없는 것이니 머묾을 여읜 선(禪)의 움직임이니라. 만일 선(禪)의 근본 바탕(本性)에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없는 줄 안다면, 생김이 없음을 얻으리라. 생김이 없는 지혜는 또한 머무는 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마음 역시 움직이지 않나니, 이러한 지혜 때문에 그러므로 생김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얻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김이 없는 지혜(無生般若)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어디에서도 떠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머물 곳이 없으며, 처소가 없는 데에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습니다. 마음이 생김 없이 머묾(心無生住),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 바로 생김이 없는 머묾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생김이 없이 머무르는 것은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것이거늘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말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심왕보살은 이러한 말씀을 듣고 처음 있는 일이라 찬탄하면서 게송으로 여쭈었다.

큰 지혜 원만하신 세존께서
생김 없는 법을 널리 말씀하시네.
일찍이 듣지 못한 바를 듣게 하시니
아직 설하지 아니한 법 이제 말씀하시네.

마치 깨끗한 단 이슬이
때때로 한 번 나타나듯이
만나기도 어렵고 헤아리기도 어려운데,
듣는 것 역시 어려워라.

위없이 좋은 복전(福田)이요
최상의 미묘한 약(藥)이라.
널리 중생을 건지시려고
이제야 말씀을 펼치시었네.

그 때 대중 속에서 이러한 설법을 듣고, 모두 생김 없는 법과 생김 없는 반야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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