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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래장품(如來藏品)

그 때 범행 장자가 본제(本際)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생긴다는 뜻이므로 소멸하지 않으며, 소멸한다는 뜻이니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여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보리의 바탕이 바로 분별없는 것이며, 분별없는 지혜는 그 끝이 없음을 분별하나니, 다함 없는 모습은 분별이 소멸한 것일 뿐이라 이러한 뜻의 모습은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가운데는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체 법의 수량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으나 끝이 없는 법의 모양은 하나의 실다운 뜻의 바탕이며, 오직 하나뿐인 성품에 머무르게 된다는 그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불가사의하니라. 내가 설한 가지가지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자를 위하기 때문이며 방편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니라. 일체 가르침의 모습은 하나요, 실다운 뜻의 지혜이니라.
왜냐하면 마치 한 시장에 네 개의 대문(四大門)을 열어 놓으면, 이 사대문은 모두 하나의 시장으로 돌아가듯이, 저 중생들이 마음대로 들어가게 되는 가지가지 가르침의 맛 또한 이와 같으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가르침이 만일 이러하다면, 제가 한가지 맛에 머무르면 마땅히 일체의 모든 맛을 포섭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왜냐하면 한가지 맛의 진실한 뜻은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일체의 흐름이 들어가지 않음이 없느니라. 장자여, 일체 가르침의 맛은 오히려 저 뭇 흐름과 같아서 이름과 수량은 비록 다르지만 그물은 다르지 않느니라. 만일 큰 바다에 들어가면 여러 흐름을 통괄하여 한가지 맛에 머무르게 되나니, 곧 가지가지의 맛을 끌어안기 때문이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모든 가르침이 한가지 맛이라면 어찌하여 삼승의 길(三乘道)과 그 지혜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비유하자면 강(江)과 하수(河水)와 회수(淮水)와 바다(海)는 크고 작음이 다르기 때문이며, 깊고 얕음의 차이 때문이며, 이름과 글자의 구별 때문이니라. 물이 강 가운데 있으면 강물이라 부르고, 하수 가운데 있으면 하수라 부르고, 회수 가운데 있으면 회수라 부르지만 물이 함께 바다 가운데 있으면 바닷물이라 부르는 것처럼 가르침 또한 이와 같아서 함께 진여에 있으면 단지 부처의 길(佛道)이라 부를 뿐이니라.
장자여, 유일한 부처의 길(佛道)에 머무르면 세 가지 행(三行)을 통달하느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세 가지 행(三行)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행이란, 첫째는 현상에 따라 취하는 행(隨事取行)이며, 둘째는 식에 따라 취하는 행(隨識取行)이며, 셋째는 진여에 따라 취하는 행(隨如取行)이니라.
장자여, 이와 같은 세 가지 행은 많은 방법들을 모두 다 섭수(攝受)하고 있으며, 일체 가르침의 방법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이 행에 들어오는 자는 공이란 모습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이렇게 들어오면 여래장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여래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들어가되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싹이 열매를 맺은 것과 같아서 들어가는 곳이 없습니다. 줄기와 뿌리의 이로운 힘이 이롭게 그 근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근본 실제를 얻으면 그 지혜는 얼마나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는 끝이 없으나,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결정된 지혜이니 여여함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결정되지 않은 지혜(不定智)이니 방편으로 병(病)을 꺾어 부수는 것이며, 셋째는 열반의 지혜이니 전각(電覺)의 실제를 제거함이며, 넷째는 마지막 지혜(究竟智)이니 실상에 들어가 부처의 길을 갖추는 것이니라.
장자여, 이와 같이 네 가지 중요한 작용(用)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라. 이것은 큰 다리이자 커다란 나루터이므로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면 마땅히 이 지혜를 사용해야 하느니라.
장자여, 이 커다란 작용을 사용하는 데는 다시 세 가지 중대한 사업이 있느니라.
첫째는 세 가지 삼매에서는 안과 밖이 서로 빼앗지 않으며, 둘째는 대(大)·의(義)·과(科)에서는도리에 따라 간택하여 소멸시키며, 셋째는 진여의 지혜와 선정에서는 대자비로써 이익을 함께 하느니라.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보리를 성취시키느니라. 이 일을 실행하지 않으면 능히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에 흘러 들어갈 수 없으며, 가지가지의 커다란 마군이 그 유리한 기회를 얻게 되리라.
장자여, 너희들 대중은 성불할 때까지 항상 닦고 익히되 잠시도 실수해서는 안 되느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세 가지의 삼매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삼매란 공삼매(空三昧)․무상삼매(無相三昧)․무작삼매(無作三昧)이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대(大)·의(義)·과(科)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는 사대(大)를 말하며, 의는 오온(陰)·18계(界)·6입(入)을 말하며, 과는 근본식(本識)을 말함이니, 이것을 대·의·과라 하느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의 공용(功用)은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삼계의 경지를 넘어가며,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의 모습은 생하고 소멸하는 법이니,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분별을 여의면 법은 마땅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여래께서는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분별을 따라 생기고
다시 분별을 따라 도리어 없어지네.
가지가지 분별하는 법을 없애 버리면
이 법은 나고 없어지는 법이 아니네.

그 때 범행 장자는 이 게송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그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 적멸한 것
적멸은 또한 생김이 없나니
이 모든 나고 없어지는 법
이 법은 생김 없는 것도 아니어라.

저것이 바로 이것과 함께하지 않나니
단멸(斷)과 상존(常)을 지니기 때문이네.
이것은 바로 두 가지를 떠났지만
또한 하나의 머묾에도 있지 않네.

만일 법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이 모습은 털바퀴와 같은 것
마치 아지랑이와 물이 뒤바뀌듯이
모두가 허망하기 때문이라네.

만일 법이 없다고 본다면
이 법은 마치 허공과 같으리니
장님은 해(日)를 볼 수 없듯이
법을 설명해도 거북의 털과 같네.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법에는 두 가지 견해가 없음을 알았으며
또한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기에
머묾 없음에 따라 뜻을 받아 지니네.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머묾 없음을 따르나니
나도 머묾 없는 곳을 따라서
이곳에서 여래를 예배합니다.

여래의 모습에 경건히 예배하는 것은
허공처럼 움직이지 않는 지혜이며
처소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머묾 없는 몸에 경례합니다.

저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옵나니
오직 원하옵건대 모든 여래께서는
저를 위해 영원한 법 말씀하소서.

그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선남자들이여,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영원한 법(常法)을 말하리라.
선남자여, 영원한 법이란 영원한 법이 아니니라.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니라. 가지가지의 망령됨과 단멸의 경계를 떠난 것이니라. 이 법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니라. 식(識)을 투철하게 보면 항상하는 것이지만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하다는 것 또한 적멸하느니라.
선남자여, 법의 적멸을 인식하는 자는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항상 적멸하느니라. 적멸을 얻는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된 관찰(觀)에 있느니라.
가지가지의 명색(名色)은 오직 이 어리석은 마음일 뿐임을 아나니,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 모든 법을 분별하기 때문에 명색에서 벗어나는 어떤 다른 일이 없느니라. 법이 이와 같음을 알고 문자와 말에 따르지 않으며, 마음은 뜻을 핵심으로 삼아 나(我)를 분별하지 않고 나라는 것이 가명인 줄을 알면 바로 적멸을 얻을 것이니, 만일 적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그 때 장자 범행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름의 모습(相)과 분별하는 일과
법을 셋이라 부르며
진여와 바르고 묘한 지혜는
그것과 다섯을 형성했네.

저는 이제 이 법이
단견과 상견에 얽매여
나고 없어지는 길에 들어간 줄 아나니
이것은 단견(斷見)이요 상견이 아니어라.

여래께서 공한 법을 말씀하시니
단견과 상견에서 멀리 떠나 있도다.
인연은 없는 것이니 생기지 않는 것
생기지 않으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이어라.

인연에 집착하여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허공 속에서 꽃을 따려는 것과 같고
석녀(石女)의 아기를 구하려는 것과 같아서
필경에는 얻을 수 없으리라.

모든 인연을 떠나서 취하고
또한 다른 것을 따르지 않고 소멸한다.
자신의 5온 12처 18계와 4대에 미쳐서는
진여에 의지하므로 실상을 얻으리.

이러므로 진여의 법은
항상 자재하여 여여하나니
일체 모든 법은
진여가 아니라 식이 변화한 것일세.
식을 여의면 모든 법은 공한 것
이러므로 공한 곳을 따라서 말하나니
생기고 없어지는 모든 법을 없애고
언제나 열반에 머묾이여.

대비가 빼앗는 바이며
열반은 없어져서 머무르지 않나니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변화시켜
여래장에 들어가게 하시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뜻에 대한 설명을 듣고 모두 바른 생활을 얻어 여래의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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