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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초기경전 ② 지혜와 자비의 말씀 ②

 


2.2.1.탐욕의 재앙
부처님께서 카필라성 밖에 있는 니그로다 숲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사캬族의 왕 마하나마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는 오랫동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의 더러움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사히 받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와 같은 번뇌가 제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인가 제 마음에서 버려져야 할 것이 아직 버려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소, 마하나마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아직도 당신 마음에서 가셔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만약 마음속에 그와 같은 번뇌가 말끔히 가셔졌다면 당신은 가정에서 살지 않을 것이며, 또 갖가지 탐욕에 허덕이지 않을 것이오. 탐욕이란 어디를 가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오. 탐욕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오. 우리들을 절망의 구렁으로 떨어뜨리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오. 바른 지혜로써 그것이 그른 줄 알더라도 평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탐욕에 쫓기고 마는 것이오. 그것이 그른 것인 줄 바르게 알고 탐욕을 떠나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은 내 경험이오만,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 탐욕이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리고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임을 알기는 알았었소. 그러나 평안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탐욕에 쫓기면서 지내왔던 것이오. 그 후 그것이 그른 줄 바르게 알고 평안한 경지에 이른 그때부터 비로소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오. 탐욕에는 즐거움과 재앙이 있소. 탐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이 그것이오. 이 다섯 가지 탐욕에 대해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데 이것이 탐욕의 즐거움이오. 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추위와 더위, 바람과 비, 벼룩·모기·뱀들에 시달림을 받고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받소. 그래서 낙담과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 아니, 그처럼 애쓰고 고생한 끝에 부자가 됐다 합시다. 이제 그는 부(富)를 지키기 위해 전에 없던 걱정 근심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왕에게 몰수당하지 않을까.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불에 타지 않을까. 물에 떠내려 보내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귀찮은 친척들에게 뜯기지 않을까.’ 이와 같이 온갖 걱정을 하지만 마침내는 몰수당하고 빼앗기고 떠내려 보내고 뜯기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내 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도 내 것이 아니구나 하고 비탄에 빠지오. 이것이 탐욕의 재앙이오. 우리가 겪는 현재의 괴로움은 모두 탐욕에 기인한 것이오. 
그리고 그 탐욕 때문에 왕은 왕과 다투고 바라문은 바라문과 다투며 부모는 자식과 다투고, 형제끼리 친구끼리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오. 다투고 싸우고 욕질하다가 마지막에 몽둥이를 들거나 칼을 휘둘러 서로 죽이기까지 하니 이것이 탐욕의 재앙이오. 
또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몸을 망치고 함부로 빼앗으며 간음을 행합니다. 왕은 이들을 붙들어 온갖 형벌을 가합니다. 채찍으로 갈기고 몽둥이로 치며 팔과 다리를 끊고 귀와 코를 자르오. 또 목에서 발끝까지 가죽을 벗기고 팔과 무릎을 쇠기둥에 못 박아 불을 지르오. 끓는 기름을 몸에 부어 굶주린 개에게 주고, 몸을 말뚝에 매어 칼로 목을 베오. 이와 같은 고통이 모두 탐욕의 재앙인 것이오. 
마하나마여, 사람들은 이 탐욕 때문에 몸과 말과 생각으로 갖가지 악을 지어 죽은 후에는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소. 이것이 다 탐욕의 재앙으로서 미래의 고통 또한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오.” 
마하나마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中阿含 小苦蘊經』
2.2.2.세속에서 뛰어나는 법
부처님께서 강가강[恒河]을 건너 앙가국 아바나라는 마을 밖 숲속에 머물러 계실 때였다. 하루는 거리에 들어가 밥을 빌고, 숲으로 돌아오니, 장자(長者) 인도에서 좋은 가문에 나서 많은 재산과 덕을 갖춘 사람을 부르는 말.
 포타리야가 양산을 받고 신을 신은 채 숲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을 보자 가까이 와서 인사한 뒤 앉지도 않고 머뭇거렸다. 부처님은 그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장자님, 자리가 있으니 앉으시오.” 
포타리야는 장자라고 불린 것이 못마땅해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이 거듭 권하자 입을 열었다. 
“부처님 나를 장자라고 부른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장자의 차림을 하고 있지 않소?” 
“나는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처자와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소?” 
“나는 내 재산 전부를 아들에게 물려 준 뒤 아무 간섭 없이 다만 옷과 먹을 것만 받으면서 숨어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림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세속을 떠났다는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 가르침에서는 여덟 가지 법으로 세속을 떠나오. 그 여덟 가지란,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고, 화합을 깨뜨리지 않으며, 탐욕을 버리고 성내지 않으며, 시기하지 않고, 그리고 교만을 버리는 일 등이오. 그러나 이것으로도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오.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법은 따로이 있소.” 
“그 법도 말씀해 주십시오.” 
“장자님, 이를테면 굶주린 개에게 살이 조금도 붙어 있지 않은 뼈를 던져 준다면 개는 굶주림을 달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뼈로 인해 피로와 고달픔은 더할 것이오. 내 제자는 이 뼈의 비유처럼 바른 지혜로 쾌락을 잘 살펴 그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라고 사실대로 알아 오욕(五欲)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오. 
독수리나 솔개 같은 날짐승이 고깃덩이 하나를 가지고 날아갈 때 다른 사나운 개가 쫓아와 그것을 덮치려 한다면, 새들이 그 고깃덩어리를 버리지 않는 한 서로 싸워 죽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것이오. 또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때 그 횃불을 버리지 않는 한 손을 데거나 타 죽게 될 것이오. 
향락은 꿈과 같아 깨어 보면 아무것도 없소. 무서운 독사를 보고 손을 내밀어 물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남의 돈을 함부로 빌려 쓰면 마침내는 빚쟁이에 몰려 곤란을 당할 것이오. 나무 열매가 익은 것을 보고 올라가 따먹고 있을 때 누가 도끼로 나무 밑동을 찍는다고 합시다. 그때 나무에 오른 사람이 얼른 내려오지 않으면 손발을 다치거나,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될 것이오. 
이것이 모두 욕락(欲樂)에 대한 비유입니다. 내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이런 비유와 같이 욕락을 관찰하고, 그것은 고통과 불행의 씨라고 바른 지혜로써 사실 그대로를 알아 세상 욕심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소. 내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얻은 청정으로 이 세상에서 해탈을 얻소. 이것을 내 가르침에서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는 법이라 하오. 당신도 이와 같이 세속을 떠났습니까?” 
“부처님,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전에 다른 가르침에 빠져, 모르는 것을 안다 하고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줄 알고, 아는 것을 아는 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사문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존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도가 되겠습니다.” 
『南傳 中部 포타리야經』
2.2.3.백골로 돌아갈 육신
부처님께서 쿠루수의 서울 캄마싯담마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 있느니 곧 사념처법(四念處法)이다. 과거 모든 여래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비구는 그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 이 네 가지에 대해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이 몸을 바로 관찰하는 법인가. 비구가 숲속이나 나무 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바로하고 앉아 오로지 한 생각으로 호흡을 조절하되,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짧다는 것을 알아라. 온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이 몸을 관찰하되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 때에는 앉고 누웠다는 상태를 바로 보아 생각이 그 몸의 동작 밖에 흩어지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다만 이 몸 관찰하는 데에 머물게 하여라. 이와 같이 이 몸의 굴신과 동작의 상태를 사실대로 관찰하여 한 생각도 흩어지지 않게 되면, 몸에 대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 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이 세상 어떤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몸이 애초에 무엇으로써 이루어졌는지 사실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된 것임을 밝게 보아야 한다. 솜씨 있는 백정이 소를 잡아 사지를 떼어 펼쳐놓듯이 비구도 이 몸을 네 요소로 갈라 눈앞에 드러내 놓아야 한다. 
숲속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이 몸도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형상이 눈앞에 역력하면 모든 허망한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숲속에 버려진 시체의 백골, 한두 해 지나 무더기로 쌓인 백골, 다 삭아 가루가 된 해골을 보는 것과 같이 비구들도 그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저 꼴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관찰하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는 몸에 대해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때와 장소를 따라 그 느끼는 작용에 대해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괴로움을 느끼는 작용, 즐거움을 느끼는 작용,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는 작용이다. 즐거움을 누릴 때는 즐거운 줄 알고, 괴로움을 당할 때는 괴로운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또한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타인의 느낌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 느낌이 눈앞에 나타난다. 느낌이 시시로 변해 고정된 괴로움이나 즐거움, 고정된 불고(不苦) 불락(不樂)이 없음을 알아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가 느낌에 대해 관찰하는 법이다. 
또 어떤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법인가. 마음에 탐심이 일어나면 ‘이것이 탐심이구나’라고 알고, 탐심을 버리면 버린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낱낱이 안팎으로 살피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관(觀)하여 눈앞에 대하듯 하면 세상의 어떤 집착이라도 놓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바로 관찰하는 법이다. 
끝으로 어떤 것이 관찰하는 것인가.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며, 또 탐욕이 일지 않았더라도 일어난 것으로 관하고, 일어났을 때에는 없어진 것으로 관하며, 이미 없어진 것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졸음, 산란함 마음, 의혹 등도 안팎으로 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그것이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관을 단 한 달만이라도 법대로 닦으면 탐욕과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성인의 길에 들게 될 것이다. 이 사념처관은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져내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비구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中阿含 念處經』
2.2.4.최상의 법륜(法輪)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곳 녹야원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도 또 어느 곳에서도 굴린 적이 없는 최상의 법륜을 처음으로 굴렸었다. 그것은 네 가지 진리[四聖諦]인데, 곧 고(苦)·집(集)·멸(滅)·도(道)이다. 
비구들이여,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를 잘 섬기고 받들어라. 그들은 지혜로워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사리풋타는 너희들의 생모(生母)와 같고 목갈라나는 양모(養母)와 같으리라. 사리풋타는 처음 발심하여 수행하는 이를 잘 길러주고, 목갈라나는 그들을 이끌어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제 사리풋타가 너희들에게 네 가지의 진리를 잘 가리어 말해 줄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뜨셨다. 
사리풋타는 모인 대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이 녹야원에서 일찍이 어떤 사람도 또 어느 곳에서도 굴린 적이 없는 최상의 법륜을 굴리셨으니, 그것은 곧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고의 진리[苦諦]입니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苦)요, 원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 고요, 사랑에는 이별이 있으니 그것이 고요,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고요, 걱정 근심과 번민과 슬픔이 고입니다. 한 말로 한다면 인생의 존재 그 자체가 고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나는 것[生]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중생들이 각기 그 종류를 따라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목숨을 이룬 후 세상에 태어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나와 그 생명을 보존하고 키워 가려면 천만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이것을 태어남의 고라 합니다. 늙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털이 희어지고 이가 빠지며 얼굴이 쭈그러지고 등이 굽으며 기력이 쇠해집니다. 몸은 날로 무거워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다닐 때는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니 이것을 늙음의 고라 합니다. 병드는 것을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온몸은 균형을 잃고 기혈이 순조롭지 못해 두통이나 치통, 요통을 앓으며 눈이 어둡고 귀가 먹습니다. 혹은 열병 냉병 풍병 습병으로 사지가 뒤틀리고 온갖 고통이 엄습하니 이것을 병고라고 합니다. 죽음의 고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중생들이 그 몸의 기력이 다하고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아직 끊어지지 않은 잔명이 죽음의 막다른 길에 이르러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죽음의 고라 합니다. 또 원수를 만나는 고라 함은, 일찍이 서로 미워하며 원한을 품고 해치거나 죽이려 했던 자와 만나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사랑에 이별이 있는 고라 함은,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부모와 처자라도 언젠가는 서로 이별하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고라 함은, 모든 중생은 나지 않으려고 해도 업에 따라 나게 되며, 나거든 늙거나 병들어 죽지 말든지 죽거든 나지 말든지 해야 할 텐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원하고 온갖 재난과 슬픔이 없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것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일단 생명을 받아 태어난 것은 결국 모든 고통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이것이 고(苦)의 진리입니다. 
다음 어떤 것이 집의 진리[集諦]입니까. 그와 같은 고의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이 다음 생의 업보를 부르게 되는 애욕과 번뇌를 말합니다. 
어떤 것이 멸의 진리[滅諦]입니까. 저 애욕과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도의 진리[道諦]입니까. 멸에 이르는 방법 즉 여덟 가지의 바른 길입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八正道],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선정[正定]입니다.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보는 지혜요,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이요,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부질없는 잡담을 떠난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이요,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고 올바른 계행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른 생활이란 출가자의 생활 방법으로 부정한 장사나 점술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을 얻어 생활하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은 없애버리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억이란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선정이란 모든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어감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진리입니다.
『中阿含 分別聖諦經』
2.2.5.정견(正見)과 사견(私見)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세 가지 그릇된 견해를 가진 외도(外道)가 있는데, 슬기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밝게 가려내어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견해를 따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그릇된 견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괴롭든 즐겁든 모두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자재천(自在天) 색계(色界)의 정상(頂上)에 있는 천신의 이름.
의 뜻에 의한 것이다.’라고 한다. 셋째, 혹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고 말한다. 
나는 언제나 무엇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의견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하고 거짓말하고 탐욕과 성냄과 삿된 소견을 갖는 것도 모두 전생에 지은 업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또 모든 것은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약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살생하는 것도 자재천의 뜻이고,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그릇된 소견을 갖는 것도 자재천의 뜻에 의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그리고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살생하는 것에도 인과 연이 없고 그릇된 소견을 갖는 것에도 인과 연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에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일을 해야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필요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정당한 사문 혹은 바라문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판했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비판이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되고 마침내는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이와 같이 그릇된 의견을 잘 가려내어 버림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이치로써 차근차근 설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셨다. 
사리풋타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어떤 것이 부처님 제자의 바른 견해이며, 진리에 대해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통달할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불제자는 먼저 어떤 것이 불선법(不善法)인지, 불선법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이 선법(善法)인지, 선법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제자의 바른 견해로 그 보는 바가 올바르고 절대적인 신념으로 진리에 통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불선법이란 산목숨을 죽이는 일,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일, 사음(邪淫), 거짓말, 악담, 이간질, 꾸미는 말, 탐욕, 성냄, 그릇된 소견 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불선법의 근본은 또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선법이란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을 하지 않고 거짓말과 악담과 이간질과 꾸미는 말을 하지 않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버린 것을 말하며, 이러한 선법의 근본은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지 않음에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이와 같은 불선법과 그 근본을 알고 또 선법과 그 근본을 알면, 그는 탐욕과 성냄의 번뇌를 없애며 ‘나’를 내세우려는 아만을 버리고 무명(無明)을 끊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 현실의 괴로움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제자의 바른 견해로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올바른 진리를 통달하게 되는 길입니다.” 
비구들은 사리풋타의 말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中阿含 三度經』
2.2.6.뗏목의 비유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독수리 잡기를 좋아하는 아리타 비구는 나쁜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언젠가 말씀한 ‘장애(障碍)’라는 법도 그걸 직접 실행해 보니 그렇게 장애가 되지 않더라고 말했다. 다른 비구들은 그릇된 그의 소견을 고쳐 주려고 토론도 하고 타이르기도 해보았지만 아무 보람이 없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부처님을 아리타를 불러 꾸짖으신 후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땅꾼이 큰 뱀을 보고 그 몸뚱이나 꼬리를 붙잡았다고 하자. 그때 뱀은 몸을 뒤틀어 붙잡은 손을 물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뱀 잡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여래의 교법을 배우면서도 가르침의 뜻을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토론할 때 말의 권위를 세우려고 곧잘 여래의 교법을 인용하지만 그 뜻을 몰라 난처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여래의 가르침을 들으면 그 뜻을 깊이 생각하여 진리를 바르게 알기 때문에 항상 기쁨에 싸여 있다. 이를테면 어떤 땅꾼은 큰 뱀을 보면 곧 막대기로 뱀의 머리를 꼭 누른다. 그때 뱀이 자기를 누르는 손이나 팔을 감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그 때문에 물려 죽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뱀 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또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갈까?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겠군.’ 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그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바다를 건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뗏목에 대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야 자기 할 일을 다 하게 되겠는가. 그는 바다를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워 놓고 이제 나는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서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敎法)을 배워서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자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 
『南傳 中部 蛇喩經』
2.2.7.네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뗏목의 비유를 말하고 난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소견이 일어날 수 있는 다섯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물질[色]과 감각[受]과 생각[想]과 의지 작용[行]과 의식[識]이다. 무지해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은 이 다섯 가지 경우에 대해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나’다’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많이 배우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 다섯 가지에 대해서 그와 같이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하여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이때 어떤 비구가 물었다. 
“부처님, 어떤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이것이 전에는 내 것이었는데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다시 내 소유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래서 그는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고 운다. 이것이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떠는 일이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지 않는다면 그는 외계의 사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부처님, 그렇다면 마음속의 어떠한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세계와 나 자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나는 없다’고 하는 여래의 가르침을 들으면 슬퍼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 것이다. 이것이 마음속의 어떠한 것으로 인해 바른 생각을 잃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다. 너희들은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되는 것을 가지고 있거나 본 일이 있느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는 ‘나’에 집착하면 항상 근심과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있다면 내 것이 있을 것이고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 것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계와 내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소견이다. 이 가르침을 안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들어서 물질과 분별을 싫어하고 욕망을 버리고 해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구를 가리켜 장애를 벗어난 자, 장애를 부순 자, 번뇌의 기둥을 빼어버린 자, 걸림이 없는 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자, 속박을 벗어난 성자라 부른다. 
이와 같이 말한 내게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저 사문 고타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없어져 버린다고 가르치는 자다’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이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현재의 고뇌를 말하고 그 고뇌를 끊어 없애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남들이 비난하고 욕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 또 누가 칭찬하고 공경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기뻐하거나 우쭐거리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칭찬하거나 나는 ‘그들이 내게 이렇게 하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너희 것이 아니란 것은 무엇인가. 물건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물질을 버려라. 감각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감각을 버려라. 생각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을 버려라. 의지 작용(意志作用)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의지 작용을 버려라. 의식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 의식을 버려라. 어떤 사람이 이 숲속에 와서 풀과 나뭇가지를 날라다 불사른다고 하자. 너희들은 이때 그는 우리 물건을 날라다 마음대로 불사른다고 생각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너희는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南傳 中部 蛇喩經』
2.2.8.욕심이 없는 사람이 얻는 도
부처님께서 베사카라 숲에 계실 때 아니룻다[阿那律]는 파치나 숲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선정(禪定)에 들어 생각하였다. 
‘아, 이 도(道)는 욕심이 없는데서 얻는 것이고 욕심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구나. 이 도는 만족할 줄 아는 데서 얻는 것이고 족할 줄 모르면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군중을 멀리 떠남으로써 얻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번거로움 가운데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바른 생각으로써 얻는 것이고 그릇된 생각으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고요 속에서 얻는 것이고 시끄러운 속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도는 지혜로운 사람이 얻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때 아니룻다의 생각을 아시고 아니룻다 앞에 나타나셨다. 
“착하다, 아니룻다. 너는 대인(大人)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있구나. 그 다음 한 가지는 부질없는 궤변을 하지 않는 일이다. 너는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해 수행하는 동안 욕심과 옳지 못한 것을 버리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맛보아 초선(初禪)을 거쳐 제이, 제삼, 제사 선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네가 이 대인의 깨달음을 생각하고 제사선(第四禪)의 기쁨에 들어가면, 여인들이 여러 가지 옷을 옷장에 가득 채워 두고 즐거워하듯이 만족함을 느끼고 기쁨에 넘쳐 다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열반의 길을 가는 너는 남루한 옷도 마음에 들 것이고, 빌어먹는 밥도 맛이 있을 것이며, 나무 밑 풀자리에 앉아도 마음은 늘 즐거울 것이고,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썩은 거름으로 만든 약이라도 만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다시 베사카라 숲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을 가르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해서 나는 욕심을 적게 가졌다고 말하지 마라. 만족함을 알았다고 해서 나는 만족할 줄 알았다고 말하지 마라.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해서 나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궤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궤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이것이 욕심을 적게 가지는 법이다. 
또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주나 약을 얻더라도 그것을 만족하게 여김이다. 멀리 떠나는 법이란 비구의 처소에 어떤 비구·비구니·신남(信男)·신녀(信女) 혹은 왕이나 이교도가 오더라도 비구는 멀리 떠나는 것을 즐기는 마음에서 진실한 법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진하는 법은 비구가 나쁜 법을 버리고 좋은 법을 얻기 위해 정진할 때에 확고하게 선법(善法)에 대한 책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생각하는 법이란 비구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이전에 해 온 온갖 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을 돌이켜보고 새로운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법이란 법의 흥성하고 쇠함을 지혜로 살펴 네 가지 진리[四聖諦]의 도리를 잘 아는 것이다. 궤변을 즐기지 않는 법이란 그 마음이 궤변 없는 경지로 나아가 부질없는 이론이 끊겨진 경지에 이르러 마음이 해탈하는 것이다.” 
『中阿含 八念經』
2.2.9.검은 업과 흰 업
용모가 뛰어난 가미니는 이른 아침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을 섬깁니다.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바라문은 마음대로 죽은 이를 천상에 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원컨대 법의 주인이신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이 목숨을 마치거든 천상에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미니여,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아는 대로 대답하여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게다가 산목숨을 죽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사음을 행하며, 거짓말을 하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업만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십시오’ 라고 했다고 하자. 가미니여, 이렇게 여러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게으른 그가, 더구나 온갖 나쁜 업을 지은 그가 축원을 받았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못가에 모여서 ‘돌아, 떠올라라’ 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없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쁜 업은 검은 것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밑으로 내려가 반드시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고 온갖 착한 업을 닦는다고 하자. 그가 목숨을 마칠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당신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묘한 법을 실행하여 온갖 착한 업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에 가서 지옥에 떨어지십시오.’라고 저주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과연 그들의 저주대로 지옥에 떨어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착한 업은 흰 것이어서 그 갚음으로 저절로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름병을 깨뜨려 못물에 던지면 부서진 병 조각은 밑으로 가라앉지만, 기름은 물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한 육신은 흩어져 까마귀와 새가 쪼아 먹고 짐승들이 뜯어 먹거나 혹은 태우거나 묻히어 마침내는 흙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마음의 업식(業識)만은 항상 믿음에 싸이고 정진(精進)과 보시(布施)와 지혜에 싸여 저절로 위로 올라가 좋은 곳에 나는 것이다. 
가미니여,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특한 소견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이 있다. 이른바 팔정도(八正道)가 위로 오르는 길이며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가미니와 여러 비구들이 다들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中阿含 伽彌尼經』
2.2.10.설법과 침묵
 부처님께서 어느 날 오후 아난다를 데리고 아지타바티[跋提河]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셨다. 목욕을 끝낸 후 부처님은 아난다의 청을 받아들여 바라문 람마카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 마침 람마카의 집에서는 많은 비구들이 모여 설법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문 밖에 서서 비구들의 설법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이윽고 설법이 끝난 것을 안 부처님은 문을 두드렸다. 곧 비구들이 나와 문을 열고 부처님을 맞아들였다. 부처님은 자리에 앉은 뒤 물으셨다. 
“너희는 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였으며 무슨 일로 여기 이렇게들 모였느냐?” 
“부처님, 조금 전에 저희들은 법을 설하였으며, 그 법을 설하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착하다. 비구들이여, 너희는 모여 앉으면 마땅히 두 가지 일을 행해야 한다. 하나는 설법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中阿含 羅摩經』
2.2.11.독 묻은 화살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말룽캬 존자는 홀로 조용한 곳에 앉아 이렇게 생각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부처님은 이러한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겠다.’ 
말룽캬는 해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로 갔다. 아까 혼자서 속으로 생각한 일들을 말씀드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님께서는 저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기탄없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물으셨다. 
“말룽캬, 내가 이전에 너를 위해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따라 수행을 하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그 밖의 의문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에 너를 위해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다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따라 도를 배웠느냐?” 
“아닙니다.” 
“말룽캬여, 너는 참 어리석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너에게 말한 일이 없고 너도 또한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너는 어째서 부질없는 생각으로 나를 비방하려고 하느냐?” 
말룽캬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 깃이 매 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며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펴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中阿含 箭喩經』
2.2.12.길을 가리킬 뿐이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자모 강당(鹿子母講堂)에 계실 때였다. 바라문 출신인 수학자 목갈라나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의 한 사람인 목갈라나(目連)와는 다른 사람이다.
가 부처님을 찾아와 말했다. 
“부처님, 여쭐 말씀이 있는데 들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목갈라나, 마음대로 물어서 의문을 풀도록 하시오.” 
“부처님, 이 녹자모 강당의 층계는 일층을 오른 뒤에 이 삼사 층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층계를 따라 차츰차츰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도 순서를 따라 길들일 수 있습니다. 바라문들도 차례를 따라 베다를 배웁니다. 우리들이 수를 배우고 수학으로써 살아가는 것도 또한 순서에 따라 차츰차츰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부처님이 법과 율에는 어떠한 순서가 있어 차츰차츰 성취하게 됩니까?” 
“목갈라나여, 바른 주장이라면 그것은 순서대로 차츰차츰 성취하게 될 것이오. 나는 이 법과 계율을 순서대로 성취하였소. 만약 나이 어린 비구가 처음으로 와서 도를 배우고자 하여 법과 계율에 들어오면 나는 먼저 이렇게 가르치오. ‘너는 와서 목숨을 다해 몸을 지켜 청정하게 하고 말과 뜻을 지켜 청정하게 하라.’ 그가 시킨 대로 하면 나는 다시 그 다음을 가르치오. 
‘너는 홀로 멀리 떠나 나무 밑이나 숲속 혹은 무덤 사이 같은 한적한 곳에서 살아라. 그런 곳에 가서 단정히 앉아 원을 바로 세워 생각이 다른 데로 팔리지 않도록 하여라. 남의 재물과 가구를 보더라도 탐심을 내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가져라. 성냄과 수면에도 그렇게 하고 의심을 끊고 미혹을 막아 그 마음을 깨끗이 지켜라.’ 
목갈라나여, 그러나 장로 비구나 학덕이 높은 바라문에게는 더 깊은 것을 가르치오. 구경(究竟)에 가서는 모든 번뇌가 다하고 지혜를 얻는다고 가르치오.” 
“부처님, 그와 같이 가르치고 훈계하면 제자들은 다 구경의 지혜를 얻어 반드시 열반을 얻게 됩니까?” 
“누구나 한결같을 수는 없소.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소.” 
“열반은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은 현재 그 길을 가리키시는 분인데, 어째서 그들은 구경의 열반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합니까?” 
“목갈라나여, 당신에게 묻겠소. 당신은 라자가하를 알고 거기로 가는 길도 알고 있소?”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라자가하와 그 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당신은 아는 대로 가르쳐 줄 것이오. 그러면 그는 가르쳐 준 길대로 따라가면 거기에 도달할 것이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 길을 들거나 게으름을 부린다면 끝내 그 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오. 라자가하가 있고 그 곳으로 가는 길도 있으며 그리고 당신은 그 길잡이였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가지 못하오?” 
“부처님, 저는 그 일에 책임이 없습니다. 제 가르침을 따른 사람은 도달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소. 나도 또한 책임이 없소. 열반이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어 나는 길잡이로서 비구들에게 가르치고 훈계하였지만, 열반을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한 이도 있소. 그러니 그것은 저마다의 행동에 달린 것이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고 그의 행동에 달린 것이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고 그의 행동을 보고 ‘마침내 번뇌가 다하였다’고 인정할 따름이오.” 
수학자 목갈라나는 모든 의심이 풀렸다. 
“부처님,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에 귀의합니다. 원컨대 저를 받아 신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부터 이 몸이 다하도록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학자 목갈라나와 비구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中阿含 算數目犍連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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