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대승경전 ② 유마힐의 설법
3.2.1.좌선
부처님께서는 베살리의 장자(長者) 유마힐(維摩詰)이 앓아 누워 있는 것을 아시고 사리풋타[舍利弗]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문안을 하여라.”
사리풋타는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그에게 문병하는 일을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숲속 나무 아래 앉아 좌선하던 옛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유마힐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풋타님,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坐禪)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삼계(三界) 생사 유전이 계속되는 미혹의 세계를 셋으로 나눈 것.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그 작용이 쉬어버린 무심한 경지에 있으면서도 온갖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진리에 나아가는 길을 버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범부의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좌선입니다. 마음이 안으로 고요에 빠지지 않고 또 밖으로 흩어지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앉을 수 있다면 이는 부처님께서 인정하시는 좌선일 것입니다.’
부처님, 저는 그때 이런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維摩經 弟子品』
3.2.2.설법
부처님께서 목갈라나[目連]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문안을 하여라.”
“부처님, 저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베살리 성 안에서 많은 신도들에게 법을 설하던 옛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유마힐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갈라나님, 설법은 법답게 해야 합니다. 법은 중생을 가리지 않습니다. 중생의 허물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은 ’나‘의 허물이 없으므로 나도 없고, 생과 사가 없으므로 목숨이 없으며, 과거의 생과 미래의 생이 끊어졌기 때문에 내가 없으며, 모양이 없으므로 항상 적연(寂然)합니다. 진리는 원인을 도와서 결과를 맺게 하는 일이 없으므로 모양이 없으며,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름이 없고, 치밀하거나 치밀하지 못한 생각까지도 떠났기 때문에 말이 없고, 허공과 같으므로 형상이 없으며, 궁극적인 공(空)이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이 없습니다.
진리에는 내 것도 없고, 분별도 비교할 대상도 없으며, 진리는 간접적인 원인에 관계하지도 않고 직접적인 원인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사물의 안에 들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본성과 같습니다. 진리는 사물 그대로의 모습에 따르고 어떠한 환경의 영향도 입지 않으므로 진실 그곳에 머뭅니다. 또 진리는 육진(六塵)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흔들리지 않으며,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오고 감이 없습니다. 진리는 공(空)에 따르고 차별하지 않으며 작위(作爲)의 뜻이 없습니다. 진리는 아름답고 추한 것을 가리지 않고 더하고 덜함이 없으며 생멸(生滅)이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진리는 눈과 귀와 코와 혀 그리고 몸과 마음을 초월하였고 낮음이 없으며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관찰의 대상에서 떠나 있습니다.
진리는 중생의 능력에 따라 그에 맞게 설해야 합니다. 또 지견(知見)은 걸림이 없어야 하며, 대비심(大悲心)으로 대승(大乘)을 찬탄하고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삼보(三寶)가 영원한 것을 생각하면서 설법해야 합니다.’ 부처님, 저에게는 변재(辯才)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維摩經 弟子品』
3.2.3.걸식
부처님께서 카샤파[迦葉]에게 유마힐의 문병을 말씀하시자 카샤파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저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난한 마을에서 걸식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유마힐은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카샤파님, 자비심이 있다 해도 부자를 버리고 굳이 가난한 사람 카사파는 가난한 집만 골라 걸식했다. 가난한 사람이 보시한 공덕으로 가난을 면하게 하기 위해.
에게서 걸식하는 것은 그 자비심을 널리 펴는 일이 못됩니다. 걸식은 평등한 법에 머물러 차례대로 행해야 합니다. 걸식은 식용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음식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마을에 들어갈 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들어가야 하며, 형상을 보더라도 장님과 같이 보고, 들리는 소리는 메아리와 같이 듣고, 냄새는 바람과 같이 느끼고, 맛을 분별하지 않으며, 온갖 느낌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느끼듯 해야 하고, 또 모든 것이 꼭두각시와 같은 줄 알아야 합니다.
카샤파님, 이와 같이 걸식한 한 끼의 밥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모든 부처님과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에 먹을 수 있어야 남의 보시를 헛되이 먹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도 해탈에 들고, 집착을 끊지 않고서도 바른 가르침에 들 수 있습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복덕도 많고 적음이 없습니다. 손해나 이득을 떠날 때 이것을 깨달음의 길에 바르게 들어갔다 하고, 자기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길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처님, 저는 이와 같은 말을 듣고서 남에게 성문(聲聞)이나 독각(獨覺)의 수행을 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維摩經 弟子品』
3.2.4.지계(持戒)
우팔리[優婆離]도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도 유마힐의 문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파계한 두 비구가 죄에 대한 뉘우침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죄를 면하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형식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곳에 유마힐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우팔리님, 이 두 사람의 죄를 더 무겁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곧 두 사람의 뉘우침과 근심을 없애주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 죄의 본성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마음이 더러우면 중생도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면 중생도 깨끗한 것입니다. 또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이 그러하듯이 저도 또한 그와 같고, 모든 것은 그와 같아서 진실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팔리님, 만약 마음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마음은 더럽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중생의 마음도 그와 같이 때가 없습니다. 망상은 때입니다. 망상이 없으면 곧 청정입니다.
그릇된 생각은 더럽혀진 것이며 그릇된 생각이 없으면 곧 청정입니다. 나에 집착하는 것은 더렵혀진 것이며, 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곧 청정한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은 아지랑이나 물 속에 비친 달,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이 망상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때 두 비구는 뉘우침과 근심을 떠나 보리심(菩提心)을 내었습니다.”
『維摩經 弟子品』
3.2.5.출가의 공덕
라훌라도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저는 베살리에 사는 장자의 아들들에게 출가(出家)의 공덕에 대해서 적당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곁에 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라훌라님, 출가의 공덕을 설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익과 공덕이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된 것이라면 이익과 공덕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출가는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법에는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습니다.
출가에는 깨달음도 없고 미혹도 없으며 그 중간도 없습니다. 온갖 그릇된 견해를 멀리하고 열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찾는 것이며 성인이 닦는 길입니다. 출가의 길은 모든 마군을 항복시키고 미혹의 세계를 초월하며, 지혜의 눈을 밝게 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 그 힘을 얻습니다. 마군을 멀리하고 이교도를 설복하며, 거짓된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욕망의 늪에서 나와 묶이지 않고, ’나‘에 집착하지 않으며, 인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마음은 혼란하지 않으며, 안으로는 기쁘고, 중생의 뜻을 지키며, 선정을 따라 온갖 과오를 떠나는 것이 참다운 출가입니다.’
그리고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지금 이곳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계율을 완전히 갖춘 것이 된다.’
이때 서른두 명이나 되는 장자의 아들들은 모두 보리심을 내었습니다.”
『維摩經 弟子品』
3.2.6.중생 그대로가 진여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병문안을 하도록 하시오.”
“부처님,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그 옛날 도솔천의 왕과 그 일족을 위해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관해 설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미륵보살님, 부처님께서는 보살님이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수기(受記)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생(生)에 수기가 이루어질 것입니까? 과거, 미래, 아니면 현재입니까? 만약 과거의 생이라고 한다면 그 과거의 생은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미래의 생이라면 아직 오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현재의 생이라 해도 그 현재는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너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동시에 태어나고 늙으며 죽어가고 있다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생멸하는 미혹(迷惑)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수기를 이루는 것이라면, 생멸을 초월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경지이므로 여기에는 수기를 받는 일도 없고 깨달음을 얻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보살님은 여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습니까?
보살님, 진여(眞如) 우주 만유에 두루하여 상주 불변(常住不變)하는 본체.
가 생하는 것을 수기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멸하는 것을 수기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까? 설사 진여가 생하는 것이 수기를 이루는 것이라 해도 거기에는 생이 없으며, 멸하는 것이라 해도 거기에 멸은 없습니다. 중생 그 자체가 진여이며 모든 존재가 그대로 진여입니다. 따라서 보살님도 진여입니다. 만약 보살님이 수기를 받았다고 하면 모든 중생도 수기를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 그 자체는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보살님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 모든 중생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 그대로가 깨달음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기를 받았다고 설하여 천신(天神)을 유혹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자도 없고 또 물러서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신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대한 분별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維摩經 菩薩品』
3.2.7.깨달음
“미륵보살님, 깨달음은 몸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적멸(寂滅)이야말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모든 모양을 없앴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상과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관찰하는 일이 없는 것도 깨달음이며, 생각이 없으므로 행하지 않는 것도 깨달음입니다. 그릇된 소견을 끊어 없앤 것도 깨달음이며, 망상을 떠난 것도 깨달음이며, 욕망을 막는 것도 깨달음이며, 안팎의 모든 경계에 탐착하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며, 진여에 따르는 것도 깨달음입니다. 사물의 본성에 머무는 것도 깨달음이며, 사물의 진실한 존재에 이르는 것도 깨달음이며, 마음과 마음이 파악하는 대상에서 떠나 분별하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며, 허공과 같아서 평등한 것도 깨달음입니다.
생하고 지속하며 멸하는 일이 없으므로 무위(無爲)도 깨달음이며, 중생의 마음과 행을 아는 것도 깨달음이며 안팎의 경계를 만나 거기 영향을 입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며, 모양과 빛깔이 없으므로 일정한 위치가 없는 것도 깨달음인 것입니다.
거짓 이름도 그 이름과 글자가 공한 것이므로 깨달음이며,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것도 깨달음이며, 항상 스스로 적정(寂靜)하여 혼란하지 않음도 깨달음입니다. 미혹을 떠난 경계도 그 본성이 깨끗하므로 깨달음이며, 반연을 떠났기 때문에 대상에 집착하지 않음도 깨달음이며, 모든 것이 평등하므로 다르지 않음도 깨달음이며, 비유할 수 없으므로 비교할 길이 끊긴 것도 깨달음이며, 모든 법은 알기 어려운 것이므로 미묘함도 깨달음인 것입니다.’
부처님, 유마힐이 이같이 설할 때 천신들도 진리를 깨달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維摩經 菩薩品』
3.2.8.도량(道場)
부처님께서 광엄(光嚴)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여라.” “
부처님, 저도 적임이 아닙니다. 언젠가 저는 베살리 성문을 나가려 하고 유마힐은 들어오고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거사(居士) 가정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 신도.
님, 어디서 오십니까?’
‘나는 도량(道場)에서 옵니다.’
‘도량이란 어디를 말합니까?’
‘곧은 마음이 도량입니다.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도 도량입니다. 사물을 판별하기 때문입니다. 공덕을 증가시키므로 마음 깊이 도를 구하는 것도 도량이며, 잘못에 떨어지거나 진리를 의심하는 일이 없으므로 보리심도 도량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보시도 도량이며, 소원을 이루게 하므로 계를 지키는 것도 도량이며, 모든 중생을 대할 때 맞설 일이 없으므로 인욕도 도량입니다. 나태하여 물러서는 일이 없으므로 정진도 도량이며, 마음이 조화를 이루므로 선정(禪定)도 도량이며, 모든 것의 본체를 보므로 지혜도 도량입니다.
모든 중생에 대해 평등하므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푸는 따뜻한 마음도 도량이며, 중생을 위해 괴로움을 잘 참아내므로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고자 하는 마음도 도량이며, 여래의 가르침을 익히는 것이 즐거움이므로 중생의 기쁨을 기뻐하는 것도 도량이며, 사랑과 미움을 넘어선 것이므로 중생에 대해서 평등함도 도량입니다. 마음의 동요를 버리게 하므로 해탈도 도량이며, 중생을 교화하므로 방편도 도량입니다. 진리는 세상을 속이지 않으므로 도량이며, 무명으로부터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모든 일에 관계하므로 연기(緣起)도 도량이며, 온갖 번뇌까지도 진실을 알게 하므로 도량입니다. 무아(無我)를 알게 하므로 중생도 도량이며, 모든 존재가 공(空)함을 알게 하므로 모든 법도 도량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이 온갖 바라밀을 힘써 닦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면 발을 들고 내리는 동작까지도 도량으로부터 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일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維摩經 菩薩品』
3.2.9.중생이 앓으니 보살도 앓는다
문수보살은 유마힐을 문병하기 위해 여러 대중과 함께 베살리로 갔다. 그때 유마힐은 문수보살 일행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가구를 치우고 시중드는 사람들을 내어보내 홀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문수보살이 들어서자 유마힐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문수보살님. 올 것이 없는데 오셨고 볼 것이 없는데 보십니다.”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사님. 왔다 해도 온 것이 아니며 갔다 해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간 곳이 없으며, 본다는 것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병환은 좀 어떠십니까? 부처님께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병은 어째서 생겼으며, 얼마나 오래 됐으며,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유마힐은 대답했다.
“내 병은 무명(無明)으로부터 애착이 일어 생겼고, 모든 중생이 앓으므로 나도 앓고 있습니다.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내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고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생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깁니다.”
“거사님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내 병에는 증세가 없으므로 볼 수 없습니다.”
“그 병은 몸의 병입니까, 마음의 병입니까?”
“몸과는 관계없으니 몸의 병은 아니며, 마음은 꼭두각시 같으므로 마음의 병도 아닙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 네 가지 요소 중 어디에 걸린 병입니까?”
“이 병은 지의 요소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의 요소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수·화·풍의 요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병이 네 가지 요소로부터 생겨 앓고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입니다.”
“병든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리고 극복해야 합니까?”
“병든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과 그릇된 생각과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생긴 것이지, 결코 병에 걸려야 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몸이라고 가칭(仮稱)하였을 뿐 네 가지 요소에는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으며, 몸에도 역시 내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긴 것은 모두가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병의 근본을 알면 곧 나에 대한 생각도 중생에 대한 생각도 없어지고 존재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니 그때는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몸은 여러 가지 물질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생길 때는 물질만이 생기고 멸해도 물질만이 멸한다. 또 이 물질은 서로 알지 못해 생길 때 내가 생긴다고 말하지 않으며 멸할 때 내가 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병든 보살이 물질에 대한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이 생각도 또한 뒤바뀐 생각이다. 뒤바뀐 생각이란 커다란 병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떠난다고 하는 것은 나와 내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인 것을 떠난다 함은 주관과 객관을 떠나 평등한 행을 하는 것입니다.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열반이 평등한 것이며 나와 열반은 모두 공한 것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그와 같은 상대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평등함을 얻으면 다른 병은 없고 오직 공에 대한 집착만이 남지만 이 집착 또한 공인 것입니다.
이 병든 보살은 이제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일이 없지만 중생을 위해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합니다. 또 불법(佛法)이 중생계에서 충분히 성취되기 전에는 그 감수하는 일을 버리고 깨달음의 경지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기의 몸이 괴로우면 악의 과보를 받는 중생을 생각하며 ‘나는 이미 괴로움을 극복하였으므로 모든 중생의 괴로움도 극복하도록 해야 한다.’ 는 대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병의 근본을 끊기 위해 가르쳐 이끌어야 합니다.
병의 근본은 반연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대하여 작용할 때 그것은 병의 근본이 됩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대상은 삼계(三界)입니다. 이 마음의 작용을 끊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마음이 대상에 대해 작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생각을 떠나는 것이며,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며, 이것을 떠나는 것이 곧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문수보살님, 병든 보살이 그 마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마음을 극복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으며, 극복하지 않는 일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維摩經 問疾品』
3.2.10.보살의 수행
유마힐이 문수보살에게 말했다.
“이 두 가지를 멀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생사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고, 열반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생사의 바다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때 묻은 행이 아니며 깨끗한 행도 아닌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이미 마군의 장애를 초월하였지만, 계속해서 장애를 극복하는 것을 보이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하지만, 수행이 모자랄 때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또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디서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깨달음의 경지에 들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모든 중생을 사랑하면서도 그 애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심신(心身)의 업이 다한 경지를 바라면서도 그 경지를 즐기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불도를 이루고 법륜(法輪)을 굴려 열반에 들어도 결코 보살의 길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維摩經 問疾品』
3.2.11.구도자
사리풋타는 빈 방안을 보고 생각했다.
‘여러 보살과 수많은 불제자들이 어디에 다 앉을까?’
유마힐은 그러한 사리풋타의 마음을 알고 물었다.
“사리풋타님, 스님은 법을 위해 온 것입니까, 아니면 앉을 자리를 찾아온 것입니까?”
“저는 법을 위해 온 것이지 자리를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사리풋타님.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는데 하물며 앉을 자리가 문제이겠습니까? 또 법을 구하는 사람은 물질이나 정신에서도 구하지 않으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부처님에게 집착하여 구하지도 않고 교법에 집착해서 구하지도 않으며 승단에 집착해서 구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알기 위해 구하거나 괴로움의 근원을 끊기 위해 구하지 아니하며,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닦기 위해서도 구하지 않습니다. 만일 ‘나는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의 근원을 끊고,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는 말을 닦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리에는 부질없는 말이 없습니다.
사리풋타님, 진리를 적멸(寂滅)이라고 합니다. 만일 생멸을 거듭한다면 이는 생멸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진리라든가 열반에 물들게 되면 이것 역시 물든 집착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진리를 생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는 곧 생각에 맴도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는 취하고 버릴 것이 없습니다. 만일 진리를 취하고 버린다고 하면 이는 취하고 버림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일정한 곳이 없습니다. 만약 어떤 곳에 집착한다면 진리가 속해 있는 곳에 집착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모양이 없습니다. 만일 모양에 의해 식별한다면 이는 모양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는 머물 수 없습니다. 만약 진리에 머물면 이는 진리에 머무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면 이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상주 불변(常住不變)한 것입니다. 이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하여 결코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維摩經 不思議品』
3.2.12.중생에 대한 관찰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중생을 어떻게 보십니까?”
유마힐이 대답했다.
“마술사가 만든 꼭두각시를 보듯이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물속의 달을 보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이 봅니다. 또 한낮의 아지랑이, 메아리, 뜬구름, 물거품, 파초의 줄기, 번갯불과 같다고 봅니다. 또 보살은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無色界)에서 물질을 보듯이 중생을 보며, 불에 탄 낟알의 싹과 같이 중생을 봅니다. 장님이 빛을 보듯이, 공중을 나는 새의 자취와 같이, 석녀(石女)가 낳은 아이와 같이, 꼭두각시가 일으키는 번뇌와 같이, 잠에서 깨어나 보는 꿈과 같이, 열반에 든 사람이 다시 몸을 받는 것과 같이 보살은 중생을 그렇게 봅니다.”
『維摩經 觀衆生品』
3.2.13.보살의 자비
문수보살이 다시 물었다.
“만약 중생을 그와 같이 관찰한다면, 보살은 어떻게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유마힐이 대답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그와 같은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진실한 자비라고 생각합니다. 보살은 생멸하는 일이 없으므로 깨달음의 경지에서 자비를 행하며, 번뇌가 없으므로 번뇌에 타지 않는 자비를 행하며, 과거 현재 미래가 평등하므로 평등한 자비를 행하며, 대립된 다툼이 없으므로 다툼이 없는 자비를 행합니다. 보살의 마음은 부서지지 않으므로 견고한 자비를 행하며, 모든 사물의 본성은 청정하므로 보살도 청정한 자비를 행하며, 보살의 마음은 허공처럼 끝이 없으므로 끝없는 자비를 행합니다.
또 보살은 번뇌의 도둑을 쫓아버리므로 아라한의 자비를 베풀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므로 보살의 자비를 베풀며, 존재의 실상을 알았으므로 여래의 자비를 베풀며, 중생을 깨닫게 하므로 부처의 자비를 베풀며, 인연 밖에서 깨달았으므로 자연 그대로의 자비를 베풀며, 평등하여 한맛이기 때문에 보리의 자비를 베풀며, 온갖 애욕을 끊었으므로 일체를 초월한 자비를 베풀며, 대승(大乘)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므로 가엾이 여기는 자비를 베풀며, 공(空)과 무아(無我)를 깨달았으므로 권태를 모르는 자비를 행합니다. 주는 것을 아끼지 않으므로 설법으로 자비를 행하며, 계율을 범한 자를 교화하므로 계율을 지니는 것으로써 자비를 행하며, 나와 남을 함께 보살피므로 인욕으로써 자비를 행하며, 중생이란 짐을 지기 때문에 정진으로 자비를 행하며, 감각적인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선정(禪定)으로 자비를 행하며, 교화할 때를 잘 알므로 지혜로써 자비를 행합니다.
모든 것에 나타나므로 방편의 자비를 행하며, 진실한 마음은 청정하므로 떳떳한 자비를 행하며, 나쁜 행이 없으므로 깊은 마음의 자비를 행하며, 부처의 즐거움을 얻게 하므로 안락한 자비를 행합니다. 보살의 자비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維摩經 觀衆生品』
3.2.14.절대 평등의 경지
유마힐은 보살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보살은 어떻게 해서 차별을 떠난 절대 평등의 경지[不二法門]에 듭니까? 생각한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법자재(法自在) 보살이 말했다.
“생과 멸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멸하는 일도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곧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덕수(德守)보살이 말했다.
“나와 내 것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없다면 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묘비(妙臂)보살이 말했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보살의 마음과 자기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성문(聲聞)의 마음은 서로 대립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공하고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때, 보살의 마음도 성문의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사자(獅子)보살이 말했다.
“죄악과 복덕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만약 죄악의 본성이 복덕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알고, 금강석과 같은 지혜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며, 거기에 속박을 받거나 해방되는 일이 없으면,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나라연(那羅延)보살이 말했다.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은 서로 대립해 있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본성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이는 곧 출세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들고 나는 일이 없으며, 넘치고 흩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선의(善意)보살이 말했다.
“생사와 열반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의 본성을 이해하면 생사는 이미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박하는 일도 없으며, 그로부터 벗어날 필요도 없고 생멸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보수(普守)보살이 말했다.
“아(我)와 무아(無我)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무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자기 본성을 보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뇌천(雷天)보살이 말했다.
“지혜와 무명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본성은 곧 지혜입니다. 그렇다고 이 지혜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무명을 떠나 평등하고 상대되는 것이 없으면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적근(寂根)보살이 말했다.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곧 교법이고, 교법은 곧 승단입니다. 이 삼보(三寶)는 어느 것이나 변함이 없는 진실이 나타난 것으로서 허공과 같습니다. 모든 것도 이와 같아서 이것을 잘 행하는 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복전(福田)보살이 말했다.
“선행과 악행과 보다 뛰어난 선행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행위의 본성은 공(空)이며, 선행도 없고 악행도 없으며 보다 뛰어난 선행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에 있어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화엄(華嚴)보살이 말했다.
“자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나와 남을 구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본성을 보는 자는 나와 남을 구별하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식별하는 것도 식별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덕장(德藏)보살이 말했다.
“집착한 마음으로 취하고 버리면 두 가지 것이 서로 대립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으면 곧 취사(取捨)가 없습니다. 취사가 없으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월상(月上)보살이 말했다.
“어둠과 밝음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둠과 밝음이 없으면 곧 대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마음의 작용이 다해 적정(寂靜)한 경지에 들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존재의 현상도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평등할 수 있으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보인수(寶印手)보살이 말했다.
“열반을 바라는 것과 세간을 싫어하는 것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만약 열반을 바라지 않고, 세간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대립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박이 있으면 해탈이 있지만 본래부터 결박이 없다면 해탈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박도 해탈도 없으면 바라는 일도 싫어할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주정왕(珠頂王)보살이 말했다.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정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이것은 그릇되고 저것은 바른 것이라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를 떠나는 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요실(樂實)보살이 말했다.
“진실과 허위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보는 사람은 진실조차도 보지 않는데 어찌 허위를 보겠습니까? 왜냐하면 진실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의 눈에는 본다고 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보살이 설한 다음 문수보살이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도 없고 말할 것도 없으며, 가리킬 것도 식별할 것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떠난 것,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마힐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기 생각한 바를 말했습니다. 이제는 거사님의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여 보살은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갑니까?”
이때 유마힐은 침묵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것을 본 문수보살은 감탄하여 말했다.
“훌륭합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나 말 한마디 없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維摩經 不二法門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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