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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대승경전 ③  보살의 덕

 


3.3.1.보살의 덕
어느 때 부처님께서 라자가하[王舍城] 영취산에 수많은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거기에는 일만 육천 명의 보살들도 자리를 같이했는데, 그들은 여러 불국토에서 왔고, 다음 생에서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이들이었다. 부처님께서 장로(長老) 지혜와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비구를 가리키는 말.
 카샤파에게 말씀하셨다. 
“다음 네 가지가 있으면 보살은 지혜를 잃게 된다. 첫째, 교법과 교법을 가르치는 스승에게 존경하는 생각이 없는 것. 둘째, 교법을 펴는 데에 인색하여 가르침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 셋째, 교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방해하거나 그 열의를 꺾어 설법하지 않고 숨기는 것. 넷째, 교만하여 남을 경멸하는 것. 
그러나 다음 네 가지 법을 지니면 보살은 뛰어난 지혜를 얻는다. 첫째, 교법과 교법을 가르치는 스승을 받든다. 둘째, 마음에 물욕이 없고 이해 타산이나 예배 공양이나 명성을 돌보지 않으며,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 또는 자기가 깨달은 대로 다른 사람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친다. 셋째, 교법을 많이 들음으로써 지혜가 생긴다고 알아들은 대로 받아 지닌다. 넷째, 수행을 위주로 하고 개념이나 해설의 언어 문자에 집념하지 않는다. 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면 보살은 뛰어난 지혜를 얻는다. 
다음 네 가지는 보살이 수행해야 할 길이다. 첫째,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가질 것. 둘째, 중생들을 부처님의 지혜로 이끌 것. 셋째,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교법을 말할 것. 넷째,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바른 행동을 실천할 것. 이 네 가지가 보살의 길이다. 
그리고 다음 네 가지는 진실한 보살에게 갖추어진 덕이다. 첫째, 모든 존재의 본성은 공(空)한 것임을 알면서도 행동의 결과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둘째, 중생이 무아(無我)인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자비심을 지닌다. 셋째, 진리를 구하는 자기 마음은 열반으로 향해 있지만 윤회의 세계에서 수행한다. 넷째, 중생들을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지만 그 갚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한 보살의 덕이다. 
비유를 들어 말할까 한다. 이 비유로써 보살은 보살에 합당한 덕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대지는 모든 중생들의 근원이다. 변함이 없고 보수를 바라지도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보리심을 낸 보살은 지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중생들의 삶의 근원이 되고 변함이 없고 보수를 바라지도 않는다. 물이 풀과 약초와 나무를 키우듯이 청정한 원을 지닌 보살은 중생들을 자비로 적시고 잠깐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맑고 깨끗한 성품을 키워 준다. 볕이 곡식을 여물게 하듯이 보살의 지혜는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맑고 깨끗한 법을 키워 준다. 바람이 불국토를 형성하듯이 보살의 미묘한 방편이 여래의 가르침을 이루는 것이다. 
또 선보름에는 달이 커가듯이 도의 마음이 청정한 보살은 맑고 깨끗한 법을 점점 키워간다. 태양이 일시에 비친 볕으로 중생을 비추듯이 보살은 일시에 비친 지혜의 빛으로 중생들의 지혜를 비춘다. 짐승 중의 왕인 사자는 어디 가든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의젓하게 활보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행동하고 교법을 듣고 덕과 법을 몸에 익힌 보살은 언제 어디서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방을 활보한다. 잘 훈련된 코끼리는 아무리 무거운 짐을 나를지라도 그 때문에 지치는 일이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잘 닦인 보살은 일체 중생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나를지라도 지치지 않는다. 
또 연꽃은 진흙 속에 있어도 진흙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듯이 보살은 세속에 살아도 세속의 일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는다. 가지 잘린 나무라도 뿌리가 성하면 다시 움이 터서 크게 자란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살은 미묘한 방편인 번뇌의 가지가 잘려도 모든 선근이 상하지 않는 한 다시 삼계(三界)에서 큰 나무처럼 자란다. 사방에서 흐르는 여러 강물도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한 가지 짠맛이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쌓은 보살의 선행도 중생의 깨달음에 회향하면 해탈의 한맛이 된다. 
왕은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으로서의 모든 임무를 수행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살의 지혜는 방편에 의해 여래의 일을 다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법을 조금밖에 듣지 못한 보살에게서는 진정한 가르침의 비를 기대할 수 없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비구름은 오곡 위에 비를 내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자비의 구름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들은 교법의 구름에서 내리는 비만이 모든 중생들을 고루 적신다. 단 한 개의 보석이라도 채취된 곳에서는 많은 보석을 얻을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살이 한 사람이라도 출현한 곳에서는 수많은 성문이나 독각(獨覺)이 나오게 된다. 냄새나는 똥오줌이라도 논밭에 주면 거름이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살에게 있는 번뇌일지라도 지혜에 대해서는 양분이 된다.” 

3.3.2.진실한 관찰
부처님께서 카샤파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한 보배의 모음[大寶積]인 이 법문에 의해 배우려는 보살은 존재에 대해서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존재에 대한 올바른 수행인가. 그것은 곧 모든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그러면 또 무엇이 모든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인가. 자아(自我)가 없다고 보는 관찰과 중생이 없다, 목숨 있는 것이 없다, 개인이 없다, 개아(個我)가 없다, 인간이 없다, 인류가 없다고 관찰할 경우 그것을 곧 중도(中道)라 하고,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라고 한다. 
중도, 즉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란 물질[色]에 대해서 영원하지도 않고 무사하지도 않다고 보는 관찰이다. 이와 같이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지작용[行]과 의식[識]에 대해서도 영원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이 중도이고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어떤 존재를 가지고 영원한 것이라거나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쪽에 치우친 극단론이다. 이 영원과 무상 사이의 올바른 것은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될 수도 없으며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중도, 즉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자아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한쪽에 치우친 극단론이다. 무아(無我)라고 하여도 이것 역시 극단론이다. 이 유아(有我)와 무아 사이의 올바른 것은 역시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될 수도 없으며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중도, 즉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마음이 실재한다거나 실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위의 경우와 같다. 
또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란 다음과 같은 관찰이다. 공(空)한 성질이 있어 그것이 모든 것을 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본래 공한 것이다. 무상(無相)이 있어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무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본래 상(相)이 없는 것이다. 무원(無願)이 있어 그것이 존재를 바람이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본래 바람이 없는 것이다. 무자성(無自性)이 있어 어떤 존재를 자성이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본래부터 자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중도이고 존재에 대한 진실한 관찰이다.” 

3.3.3.마음이란
부처님께서 카샤파에게 말씀하셨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아득하게 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과거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미래의 마음이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마음이라면 머무르는 일이 없다.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형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 없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떠한 여래도 일찍이 본 일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장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 작용은 어떤 것일까.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 가고 붙잡히지 않으며 모양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멈추는 일 없이 나자마자 곧 사라진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因)이 있어 연(緣)이 닿으면 불이 붙어 비춘다.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에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연기로 더렵혀진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움직인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마음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은 혼자서 간다. 두 번째 마음이 결합되어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왕과 같아 모든 것을 통솔한다. 마음은 원수와 같아 온갖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마음은 모래로 쌓아올린 집과 같다.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쉬파리와 같아 더러운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낚싯바늘과 같아 괴로움인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적과 같아 항상 약점을 기뻐하며 노리고 있다. 
마음은 존경에 의해서 혹은 분노에 의해 흔들리면서 교만해지거나 비굴해진다. 마음은 도둑과 같아 모든 선근(善根)을 훔쳐 간다. 마음은 불에 뛰어든 부나비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한다. 마음은 싸움터의 북처럼 소리를 좋아한다. 마음은 썩은 시체의 냄새를 탐하는 멧돼지처럼 타락의 냄새를 좋아한다. 마음은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종처럼 맛을 좋아한다. 마음은 기름접시에 달라붙는 파리처럼 감촉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관찰해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즉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그것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없는 것은 삼세를 초월해 있다. 삼세를 초월한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생기는 일이 없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그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에는 지나가 버리는 일이 없다.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 오고 죽고 나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 오고 죽고 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어떠한 인과(因果)의 생성도 없다. 인과의 생성이 없는 것은 변화와 작위(作爲)가 없는 무위(無爲)다. 그것은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인 것이다. 
그 타고난 본성이 허공의 어디에 있건 평등하듯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타고난 본성은 모든 존재가 마침내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 본성은 몸이라든가 마음이라는 차별에서 아주 떠나 있으므로 한적하여 열반의 길로 향해 있다. 그 본성은 어떠한 번뇌로도 더럽힐 수 없으므로 무구(無垢)하다. 그 본성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집착, 자기 것이라는 집착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다. 마음의 본성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결국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 본성은 가장 뛰어난 진리이므로 이 세상을 초월한 것이고 참된 것이다. 그 본성은 본질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없어지는 일도 없다. 그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如實性)으로서 항상 있으므로 영원한 것이다. 그 본성은 가장 수승(殊勝)한 열반이므로 즐거움이다. 그 본성은 온갖 더러움이 제거되었으므로 맑은 것이다. 그 본성은 찾아보아도 자아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다. 그 본성은 절대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진리를 구할 것이고 밖으로 흩어져서는 안 된다. 누가 내게 성내더라도 마주 성내지 않고, 두들겨 맞더라도 마주 두들기지 않고, 비난을 받더라도 마주 비난하지 않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비웃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으로 ‘도대체 누가 성냄을 받고 누가 두들겨 맞으며 누가 비난받고 누가 비웃음을 당하는 것인가’라고 되살핀다. 수행인은 이와 같이 마음을 거두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3.3.4.네 가지 사문 
부처님께서 카샤파에게 말씀하셨다. 
“흔히 사문 사문 하는데 어떤 것이 진정한 사문(沙門)인가. 사문에는 다음 네 종류가 있다. 겉모양만의 사문, 겉으로만 얌전한 체하는 것으로써 남을 속이는 사문, 명예와 명성과 칭찬을 구하는 사문,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 등이다. 
첫째, 겉모양만의 사문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문은 겉으로 보기에 사문다운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는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깎고 바리때를 가지고 있으나 정작 행동과 말씨와 생각은 깨끗하지 못하다. 수행도 하지 않고 해탈을 얻지도 못한다. 조용하지도 못하고 교법을 지키지도 않는다.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파계하며 항상 죄를 짓고 있다. 이것이 겉모양만의 사문이다. 
둘째, 겉으로만 얌전한 체함으로써 남을 속이는 사문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문은 예의범절이 깍듯하여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탓할 게 없고, 음식과 의복과 거처가 지극히 검소하며, 세속에 있는 신도나 다른 수행자와 잘 섞이지 않고 말수도 적다. 그러나 이 사문의 그와 같은 처신은 시주(施主)를 속여 자기를 훌륭한 사문으로 보이려고 하는 조작된 행동에 불과하다.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평안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며 수행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는 다만 겉으로만 훌륭한 사문으로 보여 공양을 많이 받으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공(空)에 대한 교법을 들으면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것같이 생각하고 공을 말한 비구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겉으로만 얌전한 체함으로써 남을 속이는 사문이다. 
셋째, 명예와 명성과 칭찬을 구하는 사문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문은 자기가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알릴까 생각하며 계율을 지킨다. 어떻게 하면 남들이 자기를 뛰어난 학자라고 알아줄까 생각하며 교법을 듣고 배운다. 어떻게 하면 남들이 자기를 산중의 도인이라고 알아줄까 생각하며 산중에서 수행한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이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욕정을 떠나기 위해서도 아니며, 평안을 위해서도 아니고 깨달음을 위해서도 아니다. 진실한 사문이나 진실한 바라문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며 열반의 실현을 위해서도 아니다. 이것이 명예와 명성과 칭찬을 구하는 사문이다. 
넷째,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이란 어떤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서도 생명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이익이나 존경이나 명예에 대해서이겠는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법을 듣고 기뻐하여 진실한 모습을 이해한다. 열반조차도 바라지 않으면서 청렴한 수행자의 생활은 한다. 삼계에 속한 기쁨에는 아예 아랑곳하지 않는다. 진리를 귀의처로 삼고 사람을 귀의처로 삼지 않는다.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안으로 구하고 밖으로 찾아 헤매는 일이 없다. 모든 존재는 그 본성이 청정하여 더럽히지 않는 것을 본다. 미혹의 바다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의지할 섬으로 삼고 타인을 섬으로 삼지 않는다. 법은 애욕을 떠난 것이라고 하는 진리에도 집착하지 않는데, 법을 말로 나타낸 것에 집착하겠는가. 무엇인가 잘못된 법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도를 배우기 위해서나 깨닫기 위해서도 아니다. 윤회의 길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열반의 세계를 유달리 기뻐해서도 아니다. 해탈을 구해서도 아니고 이 세상의 속박을 구해서도 아니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열반 상태에 있는 것임을 알아 윤회에 유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반에 안주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이다. 진실한 수행에 의해서만 사문의 덕행이 갖추어지는 것이지, 이름만의 수행에 의해서는 그리 될 수 없다.” 

3.3.5.대승 보살의 방편
지승(智勝)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 어떤 것이 보살의 방편이며, 보살은 어째서 방편을 씁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방편을 쓰는 보살은 한 덩이 밥을 가지고도 일체 중생에게 보시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보살은 한 덩이 밥을 베풀 때에도 일체 중생이 지혜를 얻도록 발원(發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과 보리로 회향(廻向) 자기가 닦은 선행(善行)의 공덕을 모두 중생이나 불과(佛果)에 돌려보냄.
하게 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사람을 보면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이 기뻐하는 선근이 중생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이 임자 없는 꽃이나 향을 볼 때에, 혹은 바람에 날리는 잎새를 보더라도 그것을 부처님께 공양하며 발원하기를, ‘이 선근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지혜를 갖추어지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시방세계 중생들이 누리는 온갖 즐거움을 보면, 일체 중생이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만약 고통 받는 것을 보면 중생들을 위해 모든 죄를 참회하고, 중생들의 고통을 모두 내가 대신 받아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받도록 원한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마침내는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만을 누리기를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한 부처님께 예배 공양 찬탄하면 곧 모든 부처님께 예배 공양 찬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한 법계 한 법신이며,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이 모두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은 자기 자신이 모자란다 할지라도 스스로 경멸하지 않고, 게송(偈頌) 하나라도 알게 되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 한 구절의 게송을 아는 것이 곧 모든 법을 아는 길이다. 모든 법이 이 게송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도시와 시골로 두루 다니면서 자비심으로 부지런히 법을 설한다. 이양(利養)이나 명망이나 찬탄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들려 준 이 게송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아난다와 같이 불법을 많이 듣고 여래의 변재(辯才)를 얻어지이다’ 하고 원한다. 이것이 보살이 쓰는 방편이다. 
보살이 방편으로 보시할 때 육바라밀이 갖추어진다. 왜냐하면 보살은 걸식하는 사람을 보면 아끼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져 큰 보시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시(布施)바라밀이다. 스스로 계행을 닦고 계행을 가지는 이에게 보시하고, 계행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지도록 권한 후에 보시한다. 이것이 지계(持戒)바라밀이다. 스스로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자비롭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중생을 보살피고 평등히 보시한다. 이것이 인욕(忍辱)바라밀이다. 음식이나 약을 보시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몸과 마음에 정진을 갖추어, 오고 가고 앉고 서는 온갖 동작을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정진(精進)바라밀이다. 중생들이 그 보시를 얻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기뻐하고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선정(禪定)바라밀이다. 이와 같이 보시를 한 다음에는 돌이켜 생각한다. ‘보시를 한 사람은 누구이며 보시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그 복을 받을 것인가.’ 이렇게 헤아려 보시한 사람과 보시 받은 사람과 그 갚음을 가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지혜(智慧)바라밀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방편을 쓰면 육바라밀이 갖추어지게 된다.” 
『寶積經 大乘方便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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