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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전체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자 정당들에 대립하는 특별한 당이 아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해들로부터 별도로 분리된 그 어떤 이해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만의 종파적 원칙을 세워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서만 다른 노동계급 정당들과 구별된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제기하고 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쳐야 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늘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나라의 노동계급 정당들 중 가장 선진적이며 가장 단호한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며,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비하여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 경로와 조건들 그리고 궁극적 전반적 결과들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장점을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주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명제들은, 자칭 세계의 개조자라는 사람들에 의해 발명 혹은 발견된 사상이나 원리들에 결코 근거하지 않는다.
 그 이론적 명제들은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다시 말해, 우리 눈 앞에서 진행 중인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현실적 제 관계들을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할 따름이다. 기존의 소유 관계들을 폐지한다는 것은 결코 공산주의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 관계들은 역사적 조건들의 변동에 기인하는 역사적 변화에 항상 종속되어왔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적 소유를 위하여 봉건적 소유를 폐지하였다.
 공산주의의 특징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의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계급적 적대에 기초한, 다시 말하여 소수자가 다수자를 착취하는 생산 및 전유 제도 중에서 최종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폐지라고 하는  단 한마디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의 노동의 결실로서 사적으로 취득한 재산의 권리를, 이른바 모든 개인적인 자유와 활동과 자립의 토대가 되는 재산의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노동하여 얻은, 스스로 벌어들인, 스스로 얻은 재산이라고! 당신들은 부르주아적 소유에 선행한 소부르주아적, 소농민적 소유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그러한 소유는 폐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공업의 발전이 그것의 대부분을 이미 파괴해 버렸으며,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현대 부르주아지의 사적 소유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임금 노동이 노동자에게 그 어떤 소유를 만들어 주던가? 아니다. 임금 노동이 만들어 내는 것은 자본일 뿐. 임금 노동을 착취하는 이 부르주아적 소유는 신선한 착취를 위하여 새로이 공급되는 임금 노동이 없으면 증식될 수 없는 소유이다. 오늘날의 형태에 있어서 소유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적대에 기초한다. 이 적대의 양 측면을 고찰하여 보자.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생산 속에서 단지 개인적인 지위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인 지위를 차지함을 의미한다. 자본은 공동의 생산물로서, 오직 여러 성원들의 공동 활동에 의해서만, 결국엔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공동 활동에 의해서만 가동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개인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자본이 공공의 소유로,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소유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상실한다.
 이제 임금 노동으로 넘어가자.
 임금 노동의 평균 가격은 최저 임금, 다시 말하면 노동자가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총액이다. 따라서 임금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전유하는 것으로는 고작 자신의 헐벗은 삶을 연장하고, 재생산하는 데 그칠 뿐이다. 우리는 노동 생산물의 개인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개인적 전유, 타인의 노동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잉여도 남기지 않는 개인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폐지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이러한 개인적 전유의 비참한 성격이다. 이러한 전유 하에서 노동자는 오직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하여 생존할 따름이며,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자를 필요로 할 때에만 노동자는 생존이 허용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사회에서 살아 있는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식시키는 수단일 뿐이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삶을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하며 고양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자본이 독자성과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있는 사람은 예속되어 있고 개성이 없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상태의 폐지를 개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부른다! 옳은 말이다. 부르주아적 개성, 부르주아적 독립성, 부르주아적 자유를 폐지하려 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의 부르주아적 생산 조건 하에서 자유란 거래의 자유, 매매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매매가 사라진다면, 매매의 자유 역시 사라진다. 매매의 자유에 관한 이런 이야기는, 자유에 관한 우리 부르주아지의 다른 모든 호언장담과 마찬가지로, 매매가 금지되던 시절 중세 시대의 속박된 상인들과 대비되었을 때에만이 일말의 의미를 가질 뿐, 매매의 폐지, 부르주아적 생산 조건과 부르주아지 그 자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폐지와 대비되었을 때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당신들은 우리가 사적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해서 놀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들의 사회에서는 사회 성원의 10분의 9에게서 이미 사적소유가 폐지되어 있다. 소수에게 사적 소유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들 I0분의 9에게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우리가 사회의 압도적 다수가 아무런 소유를 갖지 않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전제하는 그런 소유 형태를 폐지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들의 소유를 폐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그것이 우리가 의도하는 바이다.
 당신들은 노동이 더 이상 자본으로, 화폐로, 지대로, 간단히 말해서 독점 가능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다시 말해서 개인적 소유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로 전화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개성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개인"이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부르주아적 소유자임을 자백하는 셈이다. 이러한 개인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사라져야 한다.
 공산주의는 그 누구로부터 사회적 생산물을 사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다만 이러한 사유에 의하여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따름이다.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일체의 활동이 정지되고, 전반적으로 게으름이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르주아 사회는 이미 오래 전에 게으름 때문에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무엇인가 얻는 사람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반론은 결국 모든 자본이 없어지면 그 어떤 임금 노동도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동어반복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소유 양식 및 생산 양식에 대한 모든 반론은 정신적 생산물의 소유 및 생산 양식에까지 확대된다. 부르주아에게는 계급적 소유의 폐지가 생산 그 자체의 폐지처럼 보이듯이, 그들에게는 계급적 문화의 폐지 또한 문화 일반의 폐지와 동일하게 여겨진다.
 그들이 놓치기 아까와 하는 그 문화란 대다수의 대중에겐, 기실 하나의 기계로 행동하는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자유니 교양이니 법이니 뭐니 하는 당신들의 부르주아적 관념을 기준으로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려거든 더 이상 우리와 논쟁할 생각을 말라. 당신들의 법이란 것이 실상은 당신들의 계급 의지, 풀어 말하자면, 당신네 계급이 존재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들에 의해 그 본질적 성격과 방향이 규정된 의지를 법제화한 것에 지나지 않듯이, 당신들의 사상 역시 부르주아적 생산 조건과 부르주아적 소유 조건들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
 현존하는 부르주아적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가 생산의 발전 과정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역사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발생하여 나오는 사회적 형태들을 마치 영구적인 자연 법칙이나 혹은 이성의 법칙인 양 간주하고 싶어 하는 당신들의 태도는 이미 몰락해 버린 모든 과거의 지배계급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자기중심적 착각이다. 고대적 소유에 있어서 극명하게 확인되버 버렸고, 봉건적 소유에 있어서도 뻔히 인정하고 있는 사실들을 당신네 자신의 부르주아적 소유 형태로 옮아오면 한사코 적용하길 거부하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가족의 폐지라니! 공산주의자들의 이 수치스러운 제안에 대해서는 가장 극단적인 급진주의자들까지도 격분하고 있다.
 현대의 가족, 부르주아적 가족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본, 즉 사적인 이익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적 가족이 가장 완전히 발전된 형태는 오직 부르주아지 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부르주아 가족은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실질적 해체와 공창에 의해 보완된다.
 부르주아 가족은 이러한 보완물이 사라지면 당연히 함께 사라질 것이며, 자본의 소멸과 함께 양자 모두 소멸할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가 아동에 대한 부모의 착취를 중지시키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가? 그것도 죄라면 우리는 이 죄를 인정한다.
 그런데 당신들은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 교육으로 바꾸고자 할 때, 우리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관계를 파괴한다라고 당신들은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교육이란 뭔가! 당신들의 교육은 사회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과연 당신들의 교육은 교육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제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회의 간섭에 의해, 또는 학교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공산주의자들은 교육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고안해내지 않는다. 다만 그 개입의 성격을 변화시켜 교육을 지배 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할 따름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그리고 부모와 자녀 간의 화목한 관계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입에 발린 이야기는,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가족적 유대가 대공업의 활동에 의하여 갈갈이 찢겨져 나갈수록, 그리하여 어린이들이 단순한 판매품이나 노동 도구로 전락할수록 더욱더 혐오스러워진다.
 그런데, 당신들 공산주의자들은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려 하지 않는가라고, 부르주아지 전체가 입을 모아 비명을 지른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산 도구를 공동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부르주아가 여성들에게도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는 운명이 똑같이 닥칠 것이라는 결론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우리의 진심은, 한갖 생산도구로밖에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 처지를 타파하는 데 있다는 것을 부르주아들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으니. 

 더구나 우리 부르주아지들이 부인공유제에 대해서 보내는 도덕적 의분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이 부인공유제를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도입하려 한다나 어쩐다나. 공산주의자들은 부인공유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부인공유제는 거의 태고 적부터 존속해온 것이 아니던가.

 우리 부르주아들은 공식적인 매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들의 노동자의 아내와 딸을 농락하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아내를 서로 유혹하는 것을 주된 쾌락으로 삼고 있다.
 부르주아적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껏해야 공산주의자들이 위선적이고 은폐된 부인 공유제 대신에 공식적이고 공인된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현재의 생산관계들이 폐지되면 그 생산 관계들에서 비롯된 부인공유제, 즉 공식적, 비공식적 매춘 역시 소멸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다음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조국과 국적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그들에게 없는 것을 어떻게 빼앗는다 말인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우선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민족의 지도적 계급으로 올라서야 하며, 스스로를 민족으로 정립해야만 하기 때문에 비록 부르주아지가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아직은 그 자체 민족적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주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 시장, 생산 양식에 있어서의 유사성과 그에 상응하는 생활 조건의 유사성으로 인해 나날이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이러한 격리와 대립을 더욱더 사라지게 할 것이다. 적어도 문명국들 내에서의 통일된 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첫 번째 조건들 중의 하나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폐지됨에 따라,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의 착취도 폐기될 것이다.
 한 민족 내에서 계급 적대가 사라짐에 따라 민족 상호간의 적대적 관계도 사라질 것이다.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관점 일반으로부터 제기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은 더 이상 상세하게 논구할 가치가 없다.
 사람들의 생활 상태, 그들의 사회적 관계들, 그들의 사회적 존재와 더불어 그들의 관념, 견해, 개념, 이른바 그들의 의식 또한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그렇게 깊은 통찰이 필요하단 말인가?
 사상의 역사는 정신적 생산이 물질적 생산과 더불어 변화한다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증명하고 있단 말인가? 한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늘 지배 계급의 사상이었을 뿐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회를 변혁시키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낡은 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이 형성되어 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며, 구시대의 생활 조건들이 와해됨에 따라 구시대의 사상도 함께 와해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세계의 멸망이 가까워졌을 때, 고대 종교들은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다. 지난 18세기 기독교 사상이 계몽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 사회는 당시만 해도 혁명적이던 부르주아지와 목숨을 건 투쟁을 치렀다.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라는 사상은 다만 지식의 영역에서 자유 경쟁이 지배함을 표현한 것이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정치적, 법적 사상 등등이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부단히 변천해온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나 종교, 도덕, 철학, 정치, 법 그 자체는 이러한 변천 속에서 늘 유지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자유, 정의와 같이 모든 사회 상태에 공통된 영원한 진리가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 영원한 진리를 부정한다. 공산주의는 도덕이나 종교를 새로운 토대에 맞게 개조하는 대신 그것들을 부정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 발전과 모순된다."
 이러한 비난은 결국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지금까지의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시대마다 상이한 형태를 취한 여러 계급 적대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계급 적대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사회의 일부가 다른 일부를 착취한다는 점만큼은 과거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대의 사회적 의식이, 아무리 다양하고 이무리 상이하다 할지라도, 공통된 특정의 형태 혹은 일반적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나아가 지난 시대의 사회적 의식은 계급 대립이 전면적으로 소멸되어야만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모든 소유 관계들과 가장 철저하게 결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혁명이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사상과 가장 철저하게 결별한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제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비난은 그냥 놓아두자.
 우리는 이미 앞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 즉 민주주의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 전반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초기에 이러한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은 소유권에 대한, 나아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전반에 대한 전제적 침해뿐이다. 그러므로 전제적 침해는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운동을 거치면서 낡은 사회 질서 전체를 타파해 들어가는 수단이 될 것이며, 생산 양식을 전면적으로 혁신시키는 데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수단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책들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 나라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 사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경비로 전용.
2. 소득에 대한 고율의 누진세.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몰수.
5. 국가 자본 및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
6. 운송 수단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
7.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 및 생산 도구의 증대. 공동 계획에 의거한 토지의 개간 및 개량.
8. 모두에게 동등한 노동의무 부과. 농업을 위한 산업군대의 육성.
9. 농업과 공업의 결합. 도농 격차의 점진적 해소. 인구분포의 전국적 균일화.
10. 공립 학교에서 모든 어린이에 대한 무상 교육 실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어린이들의 공장 노동 폐지. 교육과 생산 활동의 결합 등등.

 발전을 거치는 가운데 계급적 차이들이 소멸되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정치권력이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조직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상황의 힘에 떠밀려 스스로를 단일한 계급으로 조직한다면, 그리고 만일 혁명에 의해 스스로를 지배 계급으로 만든다면, 그리하여 지배 계급으로서 낡은 생산 조건들을 폭력으로 쓸어버린다면, 그렇다면 이러한 낡은 생산 조건들의 폐지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적 적대와 계급 일반을 존재케해온 제반의 조건들을 쓸어내버릴 것이며, 결국엔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의 지배권마저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 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날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상으로는 우선 일국적 투쟁이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먼저 자기 나라의 부르주아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이 보이는 매우 일반적인 국면들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소간은 은폐된 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터져 나오는 지점,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의 폭력적 타도가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토대를 놓는 지점까지 추적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는,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억압 계급과 피억압 계급의 적대에 기초해 왔다. 그런데 한 계급을 억압하자면, 억압받는 계급이 최소한 노예적 생존이라도 유지할 만큼의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도 시절 농노는 도시 공동체(꼬뮌)의 성원으로 올라섰으며, 마찬가지로  봉건 절대제도의 속박 하에 있던 소부르주아는 어렵게나마 부르주아로 발전해나갔다. 그런데 현대의 노동자는 공업의 진보와 함께 올라서기는커녕, 자기 계급의 생존조건 아래로 더욱 깊이 가라앉고 있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고, 빈궁은 인구와 부보다 더 급속히 늘어난다. 이제 여기에서,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생존 조건을 사회에다가 고압적 법규로 강제한다는 것이 더 이상 부적합함이 명백해진다.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부적합하다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노예들에게 노예적 생존조차 보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인 것이며, 부르주아지가 노예들로부터 부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지경으로까지 노예들을 빠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사회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조건은 부가 개인의 수중에 쌓이는 것, 즉 자본의 형성과 증식이다. 자본의 조건은 임금 노동이다. 임금 노동은 오로지 노동자들 상호간의 경쟁 위에서만 유지된다. 부르주아지가 싫든 좋든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는 공업의 진전은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에 연대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그 토대 자체가 부르주아지의 발밑에서 무너져 간다. 이리하여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다 같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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