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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 

황광우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
   그곳은 어디인가
   전선이다 감옥이다 무덤이다 
   도대체 동포의 살해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누가 있어 한낮의 태양 아래서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김남주 시인의 포고처럼, 지난 80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짤리고 투옥되고, 다시 현장에 들어가서 조직하고 또 짤리고 투쟁하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었던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의 가슴을 치는 ‘양심의 명령’이었다. 정말 그 때, 그 어두웠던 죽음의 시절 우리가 싸워 전두환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는 구체적인 확신을 갖고 투쟁의 대열에 몸을 던진 이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얻어진 모든 승리는 부르주아지의 승리”

86년 인천 5.3 항쟁에서 당대의 모든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이 10만 군중과 함께 “미국반대, 파쇼타도”를 외치면서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운동권의 구호이지, 그 목소리들이 쌓이고 쌓여 역사의 수레바퀴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던 것을 의식한 이는 내가 알기로는 없었던 것 같다. 86년 5월 3일 그 날 우리는 하루 종일 화염병으로 최루탄과 맞서 싸웠다. 어거지로 끝까지 싸우다 그냥 터덜터덜 자취방에 돌아왔을 따름이다. 누구는 전경들로부터 탈취한 곤봉을 쥐고, 누구는 터지지 않은 최루탄 통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돌아왔던 것이 이전 투쟁과의 차이였다면 차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막걸리를 앞에 두고 그 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하루를 마감하면서도 그렇게 역사가 한 발 전진하였던 것을 몰랐다.
우리의 눈에 오히려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전두환은 인천 5.3 사태를 주모한 이들을 ‘소요죄’로 수배하였고, 언론을 동원하여 불순 세력들의 반국가 전복 음모라고 지면을 도배질하였다. 사태가 불리하면 언제나 김대중은 민중과 잡았던 손을 먼저 놓았듯이, 그 때도 3비, 즉 ‘비반미, 비용공, 비폭력’을 먼저 외치면서 미국과 보수 세력의 치마폭에 안겼다. 친미면 친미지 무슨 얼어죽을 비반미?

인천 5.3 항쟁을 경유하면서 민중운동진영은 더욱 고립되었다. 많은 이들의 수배 사진이 전봇대에 붙기 시작하였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서에 끌려가 거시기 고문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쉬쉬하며 돌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이 거주하는 자취방은 형사들에게 완전 무방비로 짓밟혀 나갔다. 지금은 아무 데에나 꽂혀 있는 북한 관련 서적 한 권만 보관하고 있어도 줄줄이 국가보안법의 사냥감이 되어 나갔다. 86년 가을은 ‘권인숙 성고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건만, 우리들은 그렇게 무감각하게 술만 마시며 살았다. 
87년 1월 14일 아침, 신문을 사들고 방에 들어온 한 녀석이 “큰 일 났다.”는 비명을 질렀다. 신문 1면 저 한 구석에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 중에 죽어간 기사가 실린 것이다. 우리는 가슴이 미어졌다. 더 이상 자취방에 처박혀 있을 수 없다는 어떤 확고한 결의가 동시에 모두의 가슴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살인, 강간, 고문 정권 타도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우리는 다시 거리로 달려나갔다. 운동권이 흔히 좋아하는 ‘정세 분석과 투쟁 방향’ 같은 것은 우리의 안중에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살을 범하고도 모자라, 성고문을 하고, 이제는 고문으로 젊은이를 죽이는 이 군사 정권에 대해서는 “타도, 타도, 타도”를 부르짖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가 서울의 명동에서 종로를, 광화문에서 남대문 상가를 휩쓸게 될지, 정말 우리는 몰랐다.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한 6월 항쟁에 전국의 시민들 500만 명이 동참할 지 우리는 정말 몰랐다. 나를 잡으려는 형사대들이 처의 친족들을 휩쓸고 지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와 나는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수배 중이었던 나는 당시 서울의 망원동 지하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침이면 집 앞에 형사가 나타난다고 집사람은 헛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온다던가. 저주스런 압제가 언제 끝날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때,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약속한 ‘6.29 선언’이 나오고, 다방에서는 차를, 술집에서는 술을 공짜로 내놓으면서 서울 시민들은 ‘오늘 같이 좋은 날’을 자축하였다.
우리들 30대의 패기와 열정을 송두리째 바친 6월 대항쟁, 민중의 땀과 힘으로 일군 6월 대항쟁은 그 모든 성과를 노태우와 김영삼과 김대중과 그리고 어서 빨리 없어져야 하는데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노망을 떨고 있는 염병할 김종필, 이 따위 보수 정객들에게 다 넘겨주었다. 민중은 다시 개털이 되었다. 우리는 몸을 바쳤다. 그런데 역사는 비정하게도 우리의 뺨을 때리고 보수정객들에게 무대를 열어주었다. 왜 그랬던가? 그것은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가지고, 자기의 역할을 하려면, 아주 기본적인 요건인 자신의 정치조직을 갖추었어야 하는데, 우리는 민중을 대표할 정치조직을 만들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 대목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선언』의 다음과 같은 문구가 더욱 적합할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는 노동자들이 전국에 흩어진 채 경쟁에 의하여 분산된 대중을 이루고 있다. 노동자들의 대중적 결속은 아직 그들 자신의 단결의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단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동원해야 했다…그리하여 이렇게 얻어진 모든 승리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된다.”

6월 항쟁과 그로 인한 6.29선언은 지배세력 대 민중진영 간의 일대 타협이었다. 따라서 6.29 선언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으로 정착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중 투쟁의 전취물임에 분명하다. 동시에 그것은 민중 투쟁의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기 위한 유화책인 것이다. 1987년에 맺은 민중과 지배세력 간의 이 타협이 언제 깨질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민중이 자신의 힘으로 집권에 도전하게 되는 그 어느 시점, 혹은 민중의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되는 그 어느 시점, 혹은 민중의 권력이 과거의 지배세력을 강타해 나가는 그 어느 시점에서 협약은 파탄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가 이 나라의 지배적인 정치제도로 자리잡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를 전취한 주체인 민중과 민중운동진영은 초상집의 개 마냥 ‘보수정치의 마당’에서 철저히 홀대를 당해왔다는 역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

6월 민주대항쟁 이후의 역사는 철저히 민중을 기만하였지만, 이를 위해 역사는 새로운 주인공을 불러내었으니, 다름 아닌 87년 7, 8월 대파업이다.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사회의 공업화, 자본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래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한 최초의 대규모적이고 폭발적인 진출이었다. 전 산업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투쟁은 2개월 동안 발생 건수가 약 3,000여 건에 이르고, 투쟁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그 깊이와 다양함에 있어서 유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 경제적 요구가 중심이었음에도 단순히 임금인상안만이 아닌 조직 건설의 요구, 인간적 대우 요구 등이 대단히 컸으며, 많은 경우 투쟁이 장기간에 걸쳐 완강하게 진행되었고, 파업농성을 조직적으로 이끄는 모습에서도 현저히 발전된 양상을 나타내었다. 
『선언』은 프롤레타리아의 성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공업이 프롤레타리아의 숫자만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보다 거대한 집단 속에서 한데 뭉쳐 성장하며, 점차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 87년 노동자 대파업은 88년 파업으로 다시 분출하였고, 그 해 11월 12일 전국의 선진노동자들은 최초로 연세대에 집결하여 노동계급의 연대를 과시하였다. 이 장면을 찾기 위해, 묻혀 있던 <노동자의 길>을 펴들어 보니, 당시의 감동적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8년 11월 12일 밤 연세대는 노동자의 대열과 함성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각 지역의 선봉대들이 속속 도착하고 ‘전태일 노동자상 시상식’, ‘전태일 정신 계승 및 노동법 개정 웅변대회’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수가 3-4만 명에 이르렀다. 거제의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입장과 더불어 시작된 웅변 대회에서는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단결하여 노동자 스스로 단결하여 노동법 개정, 더 나아가 민주쟁취를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뒤이어 선봉대 결단식과 화형식이 끝날 무렵은 이내 새벽 3시가 넘었는데 그 때 마산 창원 지역 본대 800여명의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올라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전국의 노동자들이 투쟁의 열기를 모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침 7시 다시 현대중공업 노동자 600여명이 ‘제3자 개입, 복수노조, 정치활동 보장’이라는 프랭카드를 앞세우고 진입로를 구보해 들어왔다. 이후 노동자들의 발길과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11월 13일 오후 2시에 이르러서는 이미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세대 노천극장이 의기충천한 노동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진주민주노조연합, 거제도의 대우조선, 울산의 현대중공업, 서울지역 노조협의회, 성남 노조협의회 등의 노동자들이 차례로 들어와 앉으며 자리가 꽉 차버렸다. 인천 지역, 경기남부 지역, 부산지역, 대구 구미 포항지역, 현대엔진 등의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운동단체회원, 학생들이 줄줄이 늘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노동자들은 일어서서 자리를 좁혀 보았으나 헛일, 서울지역 노동자들은 서슴없이 일어나 산등성이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진행된 1시간여에 걸친 입장식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노동자 부대는 노천극장과 그 위 산등성이를 가득 덮어버렸다. 이들의 연합된 목소리, “노동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외침은 건너 산마루까지 뒤흔드는 감동의 함성이었다.” (<노동자의 길> 33호, 1988. 11. 23 간행)

맑스는 『선언』에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진시켜 주는 요소로 “대공업에 의해 더욱 더 발전해 가는 교통 및 통신수단”을 지적하는데, 자가용이 노동자들에게까지 보급되고, 핸드폰과 인터넷이 전 인민에 의해 활용되는 오늘의 시대를 예견이나 하고 그런 글을 썼을까? 아무튼 “이러한 연결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띤 수많은 지역적 투쟁이 하나의 전국적 투쟁, 즉 계급투쟁으로 집중된다.”고 썼는데, 87년과 88년 두 해에 터져 나온 전국 노동자들의 자생적 투쟁들은 불과 두 해도 넘기지 않은 88년 11월 자신의 정치적 구호를 앞세우고 여의도로, 여의도로 밀려 나아갔다.

“가자! 여의도로. 이 물밀듯 밀려나가는 힘을 누가 막을쏘냐. 3만, 4만 여의도로 행하는 노동자의 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혈서로 쓴 “노동해방”이라는 프랭카드를 든 의장단을 선두로, 검푸른 작업에 붉은 띠를 맨 선봉대, 마창노련, 울산지역 순으로 이어진 노동자의 대열은 질서 있고 힘으로 가득 찼다. 가로변의 시민들이 노동자의 대행진에 감탄과 찬사를 보냈으며 전경들과 백골단의 눈빛은 위력에 압도당한 그것이었다. “노동계급의 영웅적 투쟁 만세”. 길목 언덕배기 서강대학교 수위실에 서 있는 이 열 두개의 대형 글자는 이 날 노동법 개정을 위해 나아가는 대행진의 기세를 그대로 압축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행진하며 “노동해방”, “악법철폐”,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 철폐, 민주 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부정축재 환수하여 서민주택 건설하자”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앞의 책)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라 하였던 맑스의 『선언』 그대로 한국의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정치투쟁으로 전화해나갔던 최초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새롭게 거듭 일어나며 더욱 강고하게 된다”

그러면 이처럼 전국의 선진 노동자들이 모여 벌여 나가는 계급투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질문을 맑스에게 던지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이처럼 계급으로 조직화되고요, 이어 정당으로 조직화되지요. 그리고 정당으로 조직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파괴되는데요, (실망할 것 없어요) 이 일은 거듭 일어나며 그때마다 더욱 강하고 견고하고 위력 있는 것이 되지요.”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냉정한 진술이다.
노동조합 운동을 하면서 곧바로 민주노총의 일원이 된 동지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이 민주노총을 조직하기까지 얼마나 커다란 산고를 치러야 했는지를. 민주노총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소속의 동지들이 얼마나 피나는 싸움을 벌여왔는지 알고 있는 조합원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 전노협을 결성하기 위해 또 얼마나 심각한 논쟁을 벌여야 했는지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정말 적을 것이다. 무슨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되지도 않을 민주노총 꿈일랑 빨리 접고,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한국노총 속으로 들어가 한국노총 민주화나 하자는 (장명국류의) 주장이 당시에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개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자가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되는 이 피나는 과정을 단 몇 단어로 끄적거리고 있으니, 남한 노동계급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모든 이들이여, 인정 사정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맑스의 이 객관주의에 침을 뱉어라. 정말 노동자의 정당을 만들기 위해 가진 것 모두 바쳐가면서 투옥되고 깨지고 좌절하고 인내하고 다시 일어서서 만들게 되는, 그 지난한 노동자 정당 결성의 과정을 어떻게 “노동자들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으로 끊임없이 파괴되고, 하지만 새롭게 거듭 일어나며 더욱 강고하게 된다.”는 문장 하나로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예끼 여보슈, 젊은 맑스 양반, 겪어보지도 않은 일들을 그렇게 쉽게 선언하다니. 
돌이켜 보면 역사처럼 냉정한 것이 없다. 우리는 보통 역사적 사명 의식을 (내가) 갖고,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내가) 결단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역사가 당신을 불러 임무를 맡기는 것이며, 당신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할 것 같으면, 역사는 가서 쉬라고 역사의 무대에서 당신을 내보내는 것이다. 늘 자기중심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은, 역사가 나를 버릴 때, 나를 둘러보지 아니하고, 동료를 비난하고, 조직을 헐뜯고, 역사를 탓하기까지 한다. 역사가 당신에게 휴식의 기회를 준 것을 모르고 말이다. 87년과 88년 그 뜨거웠던 여름날, 노동계급의 역사를 일구는 데 동참하였다가 지금은 생활인으로 돌아가 있는 전국의 수많은 노동형제들을 떠올리며, 그 때, 먼저 가신 거제 옥포조선소의 이석규 동지에 관한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해설을 마칠까 한다. 


오리걸음으로 올라 오라

농성 17일째.
얼굴은 꺼멓게 타고 끼니도 제대로 못 때웠는데
사장은 호텔에서 계속 배짱만 튕기고 있었다.

“호텔로 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선봉에 섰다.
삽시간에 옥포 관광 호텔을 에워쌌다.
전경이 출동하였고,
경찰서장은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사장을 만나게 해줄테니 오리걸음으로 올라 오라.”

오리걸음이라니! 
노동자가 죄인인가!
노동자들은 귀를 손으로 잡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다는 게 굴욕인가?

그때, 
전경들은 노동자들의 이마를 향해 최루탄을 내리꽂았다.
한 맺힌
21세의 청춘
일천구백팔십칠년 팔월 이십일일
우리의 형제 이석규, 이렇게 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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