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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위대한 책들의 목록은 대체로 금서들의 목록이다. 사상의 위대성처럼 책의 위대성도 위험성을 잣대로 하면 그렇게 많이 틀리지 않는다. 세상을 한 번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은 책이 어떻게 위대한 책일 수 있겠는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불을 품지 않은 책은 불로서 심판해야 한다.’ 하지만 위대성이 위험성으로 감지된다는 불행한 사실 때문에 역사에서 불태워진 것은 대부분 ‘불을 품은 책’들이었다.

<공산당 선언> (이하 <선언>) 역시 ‘불을 품은 죄’로 오랫동안 금서의 상단을 차지해온 책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선언>을 읽는 것은 그렇게 안전한 일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의 위반자라면 <선언>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죄목 하나가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위험성이야말로 <선언>이 위대한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한다.

 

1. 위협하는 책과 위험한 책

<선언>은 위험한 책이다. 하지만 이때 ‘위험하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위협하다’는 말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선언>의 유명한 문장,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가 위협하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선언>의 위험성은 오히려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위협하다’는 것과 ‘위험하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위협하는 자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사용할 때조차 거래를 원한다.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말하는 제국의 지도자도, 직장을 폐쇄하겠다는 사장도, 총파업으로 위협하는 노조도, 회초리를 들고 서 있는 교사도 원하는 것은 거래이다. 위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들은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지만, 폭력은 여전히 거래의 메시지다. 일정한 개량이 이루어지면 그만하겠다는 메시지. 따라서 이들 때문에 현존하는 세계가 위험에 처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기득권이 강화되고 법이 강화될 뿐이다. 부시를 보라. 위협하는 자가 원하는 것은 세계 속 이권이지 새로운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자는 세계의 이권에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이다. 폭력은 그에게 수단도 목적도 아니다. 벤야민은 노동조합의 정치적 파업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총파업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전자의 작업 중단은 노동조건의 외적 변화만을 의도하는 것으로써 폭력적인데 비해, 후자의 작업 중단은 순수한 수단으로서는 비폭력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정한 개선이 이루어지면 작업을 재개한다는 전제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더 이상 국가에 의해 강요받지 않는 전면적으로 변혁된 노동에만 참여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위험한 자는 결코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폭력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나는 <선언>을 읽을 때마다, 거기에 나타난 천연덕스런 폭력성, 위협하지 하지 않는 위험성, 악의 없는 공격성에 감탄하게 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이 도발적 문구는 아무런 거래의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위협도 협박도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지배계급에 대해 오직 자신들이 ‘잃을’ 것만을 발견하므로 그들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배계급은 어디에서 공포를 느끼는가.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성이 아니라, 더 이상 거래가 불가능한 공산주의자들의 존재와 그 세계에서 그것을 느낀다.

따라서 <선언>을 계시록에 비유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 마샬 버만은 <선언>과 계시록을 이렇게 구분했다. “계시록적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정적이며, 값싼 전율을 제공한다. 이에 비해 맑스의 관점은 우리가 성숙하지 않으면 보유하기 힘들 정도의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상한 구분으로는 충분치 않다. 계시록은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위협하기 때문에 문제다. 계시록은 위협하고 주눅 들게 하는 책이다. 그것은 죄와 벌로 이루어진 심판의 책이다. 그러나 <선언>은 차라리 복음서에 가깝다. 그것은 위축시키고 처벌하는 책이 아니라 자극하고 촉발하는 책이다. 그것은 복종보다는 자유의 본능을, 질서의 경계보다는 위반의 횡단을 부추긴다.

 

2. 프롤레타리아라는 공통의 이름

<선언>이 위대한 두 번째 이유는 그 스스로가 기술한 내용을 생산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선언>은 계급투쟁을 생산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선언>은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생산한다. 과거를 기술하기 위해 과거를 생산하고, 주체를 포착하기 위해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언>의 슬로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는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이 신체로 주어지기 이전에 대중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추출하는 비신체적 변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라는 이름이 <선언> 속에서 어떻게 발견되고 생산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단순화한 것은 다양하고 복잡하게 배열된 신분과 세력들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시기에 현존하며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자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그 공통된 자가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빈곤하며, 배제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공통 이름이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19세기적 형상이다. 이들은 모든 이익의 생산에 참여하지만 모든 이익으로부터 배제된 자이다. 하지만 이때 노동자 계급을 자극하는 <선언>의 문장들은 놀라울 정도로 명랑하다. <선언>의 위대함은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그로부터 탈주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비상을 기술하는 것에 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가 근대에 진입하면서 겪었던 이중의 자유, 즉 인격적 예속으로부터의 분리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를 묘사하면서 ‘포겔프라이(자유로운 새, Vogelfrei)’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의 자유는 시장에 내던져진 노동자의 슬픈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것뿐일까. 그렇지 않다. 니체가 <즐거운 지식>에 덧붙였던 ‘포겔프라이의 노래’와 같은 명랑성이 <선언>을 지배하고 있다.

부르주아의 공격에 대한 <선언>의 반박에는 슬픈 현실을 넘어서는 강철 같은 명랑성이 존재한다.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는 데 경악하지만, 지금 이 사회의 인구 중 9/10는 사유재산을 갖고 있지 않다.” “당신은 공산주의자가 나라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하지만 이미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사유재산과 보호해줄 국가가 없다는 사실이 프롤레타리아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박탈당했지만 또한 없애버릴 생각이기 때문이다.

<선언>은 대중의 무차별적 흐름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해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역사적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이 속한 시대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을 공표한다. 혁명적인 탈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잃어버리기. <선언>의 수사는 매우 각별한 것이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결핍을 이용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경쟁시키고 더 큰 가난으로 위협하면서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 그러나 <선언>은 결핍을 예속의 조건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은 결핍을 채우려하지 않고, 결핍을 결핍하게 만듦으로서, 즉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능동적으로 ‘잃어버림으로써’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3. 혁명의 영원회귀

기존의 모든 지배계급들은 자신의 현재적 전유양식을 강화함으로써만 지배력을 확보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전유양식을 폐지함으로써만 주인이 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죽음으로써 살아 돌아오는 자. 니체는 이렇게 묻곤 했다. “너는 너의 죽음을 욕망할 수 있는가.” 영원회귀란 스스로 죽는 자의 영원한 돌아옴이다. <선언>이 위대한 세 번째 이유는 혁명의 영원회귀를 제기하는 것에 있다. 죽음을 통해 영원히 돌아오는 자.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혁명의 영원성은 시간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부르주아는 어떻게 보면 진정으로 역사에 시간을 도입한 계급이다. 부르주아 시대에 들어 “모든 단단한 것들은 녹아 사라지고,” “끊임없는 발전과 교란, 항구적 불안과 동요”가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프롤레타리아 역시 부르주아가 도입한 시간 속에 거주한다. 하지만 그들은 부르주아와는 다른 시간대에 거주한다. <선언>은 부르주아의 시간과 공산주의의 시간을 대비시킨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자본은 죽은 과거의 노동의 집적물이기 때문에 자본의 지배는 과거의 지배를 나타낸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현재적 자유를 위해 축적된 과거의 노동을 사용한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의 대비는 불충분한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량과 혁명을 상이한 시간대로 구분한 적이 있다. 개량은 과거에 속하지만 혁명은 미래에 속한다. 세계를 연장할 것인가, 세계를 시작할 것인가. 나는 미래야말로 <선언>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도래할 시간’으로서, ‘와 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시간’으로서, 모든 역사 속에서 무산자들 곁에 잠재된 형태로 미래가 존재한다. 부르주아의 시대가 현재에 달라붙은 과거라면, 공산주의 시대는 현재에 달라붙은 미래이다. 공산주의가 현 상태를 지양하기 위한 영원한 운동이라는 말은, 시간이 흐르는 한 혁명은 영원한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언>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은 위험한 책이자, 생산하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그것은 위험한 복음이자, 혁명 기계이며, 영원회귀하는 유령이다. 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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