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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석분 1)현시정의 -생멸인연상

다시 다음에 생멸의 모습(生滅相)을 분별하건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추(麤)이니,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세(細)이니,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추 중의 추(麤中之麤)는 범부의 경계요, 추중의 세(麤中之細)와 세 중의 추(細中之麤)는 보살의 경계요, 세 중의 세(細中之細)는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있으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 함은 불각의 이치이기 때문이요, 연에 의한다 함은 허망하게 경계를 이루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이 멸하면 연이 멸하나니, 인이 멸하는 까닭에 불상응심이 멸하고 연이 멸하는 까닭에 상응심이 멸하는 것이다.

【문】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어찌 상속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찌 글까지 멸한다고 하는가?
【답】
 이른바 멸한다 함은 오직 마음의 겉모습이 멸하는 것일 뿐, 마음의 실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니, 마치 바람은 물에 의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물이 멸한다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서 의지할 바가 없어지거니와 물이 멸하지 않으므로 바람의 모습이 상속하고 오직 바람이 멸하는 까닭에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도 그와 같아서 마음의 바탕을 의지하여 움직이나니, 만일 마음의 바탕이 멸한다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어지겠지만 바탕이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어리석음이 멸하는 까닭에 마음의 모습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마음이나 지혜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다음에 네 가지 법이 훈습(熏習)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물든 법과 맑은 법이 일어나기를 끊이지 않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맑은 법인 정법(淨法)으로서 진여(眞如)라 하고, 둘째는 온갖 물듦의 원인으로서 무명(無明)이라 하고, 셋째는 허망한 마음으로서 업식(業識)이라 하고, 넷째는 허망한 경계로서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훈습의 정의는 마치 세간에서 의복에 실로 향기가 없으나 어떤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는 까닭에 향기가 있는 것같이, 이 법 또한 마찬가지로 진여의 맑은 법은 실로 물듦이 없으나 오직 무명으로써 훈습한 까닭에 물든 모습이 있고, 무명의 물든 법은 실로 맑은 업이 없으나 오직 진여로써 훈습하는 까닭에 맑은 작용(淨用)이 있다.

어떻게 훈습하여 물든 법이 일어나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의 법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이 있고, 무명의 물든 법의 인(因)이 있는 까닭에 진여를 훈습하고 훈습했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한 마음이 있으므로 무명을 훈습해서 진여의 법을 알지 못하게 하는 까닭에 불각(不覺)의 생각이 일어나서 허망한 경계(妄境界)를 나타내고, 허망한 경계가 있으므로 물든 법의 연이 되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을 훈습해서 그로 하여금 생각하고 집작하고 갖가지 업을 지어 온갖 몸과 마음의 고통들을 받게 한다.

이 허망한 경계의 훈습(妄境界熏習)이라는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망념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念熏習)이요, 둘째는 집착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取熏習)이다.

허망한 마음의 훈습(妄心熏習)이라는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이 근본이 되는 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분별사식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범부들로 하여금 업에 얽매이는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무명의 훈습(無明熏習)이라는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훈습(根本熏習)이니 능히 업식(業識)을 성취시키는 뜻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무명에 의해서 일어난 견과 애의 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분별사식을 성취시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훈습하여 맑은 법이 일어나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의 법이 있는 까닭에 능히 무명을 훈습하고,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허망한 마음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기어 구하게 된다. 이렇듯 허망한 마음이 싫어하고 구하는 인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해서 스스로가 자기의 성품을 믿고,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인 것이어서 눈앞의 경계가 없는 것임을 알고는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눈앞의 경계가 없는 것임을 여실히 아는 까닭에 갖가지 방편으로 수순하는 행을 일으켜 취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영원한 겁 동안 훈습하는 힘 때문에 무명이 멸한다. 무명이 멸하는 까닭에 마음의 일어남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도 따라서 멸하고, 인과 연이 모두 멸하는 까닭에 마음의 모습이 모두 다함으로써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

망심훈습(妄心熏習)의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들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해서 자기의 힘에 따라 차츰차츰 위없는 도(無上道)로 향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함이 용맹해서 속히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진여훈습(眞如熏習)의 이치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요,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자체상훈습이라 함은 끝없는 예부터 무루의 법을 갖추고 있으므로 부사의한 업을 골고루 갖추어서 경계의 성품을 일으킨다. 이런 두 가지 이치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힘이 있는 까닭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바라고 구하여 자기 몸 안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하고 수행하게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가 진여를 가지고 있으니, 똑같이 모두가 훈습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믿음 있는 이와 믿음 없는 이가 있어 한량없이 앞뒤로 차별되는가? 모두가 동시에 스스로 진여의 법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균등하게 열반에 들어야 할 것이다.

【답】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한량없고 끝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그 성품이 차별되어서 두텁고 왔음이 같지 않은 까닭에 항하사(恒沙) 수효를 지나는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我見)과 애염(愛染)의 번뇌가 무명에 의해 차별을 일으킨다. 이러한 일체 번뇌는 무명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서 앞뒤로 무량하게 차별이 있지만 오직 여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은 인(因)과 연(緣)이 있으니, 인과 연이 구족하여야 이룰 수 있다. 마치 나무속의 불의 성질(火性)은 곧 불의 직접적 원인(正因)이기는 하나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않으면 저절로 불이 나서 나무를 태울 수 없듯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비록 바른 원인(正因)으로서 훈습해 주는 힘이 있어도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이나 선지식들이 연(緣)이 되어 주는 계기를 만나지 못하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바깥 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에서 맑은 법이 훈습해 주는 힘이 없으면 역시 마침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해서 열반을 즐겨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과 연이 구족한 이, 즉 스스로에게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의 자비로운 가호가 계신다면 그 까닭에 능히 괴로움을 싫어할 마음이 생기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힌다.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해진 까닭에 부처님들과 보살들의 보이심(示)ㆍ가르치심(敎)ㆍ이롭게 하심(利)ㆍ기쁘게 하심(喜)을 만나 비로소 능히 길을 떠나 열반도(涅槃道)로 향하는 것이다.

용훈습(用熏習)이라 함은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 외연에는 한량없는 이치가 있는데 간략히 두 가지를 말하리라.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되게 응해 주는 연(差別緣)이요, 둘째는 평등하게 응해 주는 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이라 함은 이 사람이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에 의하여 처음 발심하여 도를 구하기 시작함으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그 사이에 뵙거나 생각하면 혹은 권속이나 부모나 모든 친척이 되어 주며, 흑은 시종(給使)이 되어 주고, 흑은 친한 벗이 되어 주며, 혹은 원수가 되어 주고, 혹은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나아가서는 일체 지을 수 있는 한량없는 행과 연으로 대비로써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서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보거나 듣는 이가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緣)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속히 제도를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만에야 제도를 얻기 때문이다.

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행을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이요, 둘째는 도를 받아들이는 연(修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라 함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모두가 일체 중생 제도키를 원하여 자연스럽게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않되 동체지(同體智)의 힘 때문에 보고 들음에 따라 업 짓는 모습을 나투나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에 의해서야 비로소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되기 때문이다.

이 체와 용의 훈습(體用熏習)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상응하지 못하는 것(未相應)이니, 이른바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 보살들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는 믿음의 힘 때문에 수행을 하기는 하나 분별없는 마음과 본체와는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재한 업으로 수행함이 용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미 상응한 것(已相應)이니, 이른바 법신 보살이 분별없는 마음을 얻어 부처님들의 지혜의 응(智用)과 상응하나니, 오직 법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행해서 진여를 훈습하고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물든 법은 끝없는 예부터 훈습하기를 끊이지 않다가 부처의 경지를 얻기에 이르면 그 뒤에 끊어짐이 있고, 맑은 법의 훈습은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세가 다하기에 이르나니, 이 이치는 어떠한가? 진여의 법이 항살 훈습하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이 멸하고 법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용(用)을 일으켜 훈습하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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