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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석분 1)현시정의 -심생멸

이 식(識)에 두 가지 이치가 있어 능히 일체법을 거두어 모으고(攝受) 일체법을 내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깨달음 쪽인 각의(覺義)요, 둘째는 미혹 쪽인 불각의(不覺義)이다.

 


1. 각

이른바 각의라 함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윈 모습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하며,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어 법계 그대로인 한 모습인지라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본각의 이치는 시각(始覺)의 이치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 까닭은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이치는 본각에 의거한 까닭에 불각(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거한 까닭에 시각이 있다고 설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은 까닭에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범부들은 앞생각에 악(惡)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능히 뒷생각을 그쳐 일어나지 않게 하나니, 비록 각(覺)이라 하지만 이것도 또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으로서 지혜롭게 관찰하는 이나 초발의(初發意) 보살들은 생각(念)의 다름(異)을 깨달아 생각에 다른 모습(異相)이 없어지니 거친 분별의 집착상(麤分別執着)을 버린 까닭에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법신 지위의 보살(法身菩薩)들은 생각의 머묾(住)을 깨달아 생각에 머묾의 모습(住相)이 없고, 분별의 거친 생각(分別麤念相)을 여읜 까닭에 수분각(隨分覺)이라 한다. 보살의 지위가 다한 이는 방편을 만족히 하여 한 생각에 상응(相應)하므로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모습을 깨달았으나 처음이란 모습이 없다. 미세한 생각(微細念)을 멀리 여읜 까닭에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항상 머무르니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그러므로 수다라(修多羅)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중생이 능히 무념(無念)을 관한다면 부처님의 지혜로 향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첫 모습(初相)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첫 모습을 안다고 한 것은 곧 무념(無念)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을 각(覺)이라 하지 않나니, 본래부터 생각생각에 이어져서 일찍이 생각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무명(無始無明)이라 한다.만일 무념을 얻은 이는 곧 마음의 상(相)인 생(生:생겨남)ㆍ주(住:머묾)ㆍ이(異:달라짐)ㆍ멸(滅:사라짐)들을 아나니, 무념으로써 동등하기 때문이다. 실제에는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나니 네 모습(四相)이 동시에 있는 것이어서 모두가 홀로 서지 못하나니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본각(本覺)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 모습을 내어 본각과 서로 여의지 않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혜가 항상 청정한 상(智淨相)이요, 둘째는 부사의하게 사업을 일으키는 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智淨相)이라 함은 말하자면 법력(法力)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하게 수행해서 방편이 만족해진 까닭에 아뢰야식인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하는 마음의 상(相續心相)을 멸하여 법신의 지혜의 순수하고 맑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어떠한가? 일체 마음(心識)의 모습은 모두가 무명(無明)이니 무명의 모습은 본각의 성품(覺性)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의 물처럼 바람으로 인해서 파도가 일면 물과 바람이 서로 여의지 않으나 물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니 만일 바람이 그쳐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나 습성(濕性)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자성인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이 움직임으로 인해서 마음과 무명이 모두가 형상이 없어 서로 여의지 않으나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니, 만일 무명이 멸하면 상속심(相續心)도 멸하지만 지혜의 성품(智性)은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 함은 지정상(智淨相)에 의하여 온갖 수승하고 묘한 경계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모습은 항상 끊어짐이 없고 중생들이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응하도록 갖가지 모습으로 시현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각의 바탕(體)과 모습(相)에는 네 가지의 큰 이치가 있어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淨鏡)과도 같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일체 마음과 경계의 모습을 멀리 여의어 어떤 법도 나타날 것이 없는 상태로서 깨달아 비추는(覺照)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인으로서 훈습하는 경(因熏習鏡)이니, 이른바 여실히 공하지 않은 것(如實不空)이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아서 항상 머무는 일심(一心)이니, 일체 모든 법 그대로가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물든 법(染法)이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니, 지혜의 바탕은 동요하지 않되 무루의 법을 구족히 갖추고서 중생들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난 경(法出離鏡)이니, 이른바 공하지 않은 법이 번뇌애(煩惱礙)와 지애(智礙)를 벗어나고 화합된 모습(和合相)을 여의어서 순박하고 맑고 밝기 때문이다.

넷째는 연으로서 훈습하는 경(緣熏習鏡)이니, 이른바 법출리(法出離)에 의한 까닭에 두루 중생들의 마음을 비추어서 그들로 하여금 선근을 닦게 하기 위하여 생각대로 시현하기 때문이다.


2. 불각


이른바 불각의 이치(不覺義)라 함은 말하자면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므로 불각심(不覺心)이 일어나서 생각(念)이 있게 되었으나 생각은 제 모습이 없는 것이어서 본각(本覺)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미흑한 사람이 바른 방향에 의지하여 미흑을 일으켰으나 만일 바른 방향을 벗어나면 미혹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각(覺)에 의지한 까닭에 미혹했으나 만일 각성(覺性)을 여의면 불각도 없는 것이다. 불각의 망상이 있기 때문에 능히 이름과 이치(名義)를 아는 것을 참된 각(眞覺)이라 하거니와 불각의 마음을 여의면 참된 각이라 할 제 모습도 없다.

다시 다음에 불각에 의지한 까닭에 세 가지 상(相)이 생겨나서 그 뿌리인 불각과 서로 응하여 여의지 않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의 활동인 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한 까닭에 마음이 움직인 것을 업이라 하거니와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분별의 주체인 상(能見相)이니 움직임에 의한 까닭에 보거니와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견(見)도 없다. 셋째는 경계인 상(境界相)이니 능견상에 의한 까닭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거니와 견(見:能見)을 여의면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 상이 생기나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해서 마음을 일으켜 사량함(愛)과 사랑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智相)에 의하는 까닭에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내고 생각(念)을 일으켜 서로 응함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함에 의하는 까닭에 경계를 반연하고 기억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무르고는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허망한 집착에 의하여 거짓 이름이나 말을 분별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에 의하여 이름을 찾아 집착하고는 갖가지 업을 짓기 때문이요,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해 보를 받아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이 일체 물든 법을 내나니, 모든 물든 법은 모두가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각과 불각에 두 가지의 상이 있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같은 모습(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異相)이다.

동상(同相)이라 함은 비유컨대 갖가지 질그릇은 모두가 동일한 미진(微塵)의 성질과 모습인 것같이 무루와 무명의 허깨비(幻) 같은 업은 모두가 다 같은 진여의 성질과 모습이다. 그러므로 경전속에서 이런 이치에 의거해 말씀하시되 “일체 중생은 본래부터 상주하여 열반에 들어갔으며 보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상(相)도 아니요, 지을 수 있는 상도 아니어서 끝내는 잡을 수도 없고 그 빛깔과 모습을 볼 수도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빛깔과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물듦을 따르는 허깨비 같은 업이 지은 것일 뿐이요, 이 지혜의 빛깔이 공하지 않은 성품인 것과는 같지 않나니, 지혜의 모습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異相)이라 함은 갖가지 질그릇이 각각 같지 않은 것같이, 무루와 무명이 물듦을 따라 허깨비같이 차별되며 성품이 물들어서 허깨비같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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