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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육근을 청정히 하는 방법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흐름을 거슬러 깊이 한 문에 들어가야만, 여섯 감관을 일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미 수다원과를 얻었으니, 3계의 중생세간이 견도(見道)의 자리에서 끊어야 할 번뇌는 멸했으나, 오히려 아직 여섯 감관 가운데 쌓아온 시작 없는 겁의 허망한 습기를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저 습기도 반드시 수도의 자리에서 끊어야 하는데, 더욱이 어찌 이 가운데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여러 미세한 종류의 수량이겠느냐?
이제 너는 또 현재의 여섯 감관이 하나인지 여섯인지를 살펴보아라. 만일 하나라고 한다면, 귀는 어째서 못 보고, 눈은 어째서 듣지 못하며, 머리는 어째서 밟지 못하고, 발은 어째서 말하지 못하느냐?
만일 여섯 감관으로 결정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 법회에서 너에게 미묘한 법문을 선양하고 있는데, 너의 여섯 감관 가운데 어느 감관이 와서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귀로 듣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귀가 제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입을 열어 뜻을 묻고 몸을 일으켜 공손히 받드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면 마침내 여섯이라야 하고, 여섯이 아니라면 마침내 하나라야 하니, 결국 너의 감관은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감관은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지만, 시작 없는 겁부터 뒤바뀌어 잠기고 무딘 까닭에 원만하게 고요한 자리에서 하나다 여섯이다라는 뜻이 생겼느니라.
너는 수다원이 되어, 여섯 감각 대상을 소멸하였으나, 아직은 하나를 없애지 못했으니, 마치 넓은 허공에 여러 가지 그릇을 섞어놓고, 그릇 모양의 다름을 따라 다른 허공이라고 하다가,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서 허공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저 한없는 허공이 어떻게 너를 위해서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으며, 더욱이 어찌 또 하나라 하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너의 분별하여 아는 여섯 가지 수용감관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밝음과 어둠 등 두 가지가 서로 형성되어 나타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보는 정기가 색을 반영하여 색과 맺어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勝義根)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눈의 본체라고 한다. 여기에 포도 알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塵根)이 제멋대로 흘러서 색을 좇아 달리느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듣는 정기가 소리를 반영해서 소리를 말아들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귀의 본체라고 한다. 여기에 둥글게 말린 새 잎사귀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소리를 좇아 달리느니라.
통함과 막힘 등 두 가지가 서로 열려 드러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맡는 정기가 냄새를 반영해서 냄새를 받아들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코의 본체라고 한다. 여기에 드리운 쌍 손톱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냄새를 좇아 달리느니라.
담담한 맛과 여러 가지 맛 등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림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맛보는 정기가 맛을 반영해서 맛과 짜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혀의 본체라고 한다. 여기에 활 모양의 초승달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맛을 좇아 달리느니라.
뗌과 닿음 등 두 가지가 서로 비빔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촉각을 일으키고, 촉각의 정기가 촉감을 반영하여 촉감을 뭉쳐서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몸의 본체라고 한다. 여기에 허리가 잘록한 북의 이마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촉감을 좇아 달리느니라.
생겨남과 멸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상속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인식작용을 일으키고, 인식의 정기가 법을 반영하여 법을 끌어당겨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뜻의 생각이라고 한다. 여기에 깊고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법을 좇아 달리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여섯 감관이 저 깨달음이 본래 밝은데서 밝은 것으로 밝히려는 깨달음을 두었기 때문에, 저 정밀한 밝음을 잃고 허망한데 엉겨 붙어 빛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그러기 때문에 너는 어둠을 떠나고 밝음을 떠나면 보는 자체가 없고, 움직임을 떠나고 조용함을 떠나면 원래 듣는 성질이 없으며, 통함이 없고 막힘이 없으면 냄새 맡는 성질이 생기지 않고, 여러 가지 맛이 아니고 담담한 맛이 아니면 맛보는 성질이 나오지 않으며, 떼지도 않고 대지도 않으면 촉감이 본래 없으니, 멸함이 없고 생김이 없으면 분별작용이 어디에 의지하겠느냐?
너는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과 닿음과 뗌과 담담한 맛과 여러 다른 맛과 생겨남과 사라짐과 어둠과 밝음 등 이러한 열두 가지 인연변화의 모양에 매어 구르지 않고, 어느 한 감관을 뽑아 엉겨 붙은 자리를 벗겨서 안으로 굴복시키고, 굴복시켜 원래의 진리로 돌아가면, 본래의 밝은 빛을 발하리라. 이렇게 비치는 성품이 환하게 밝아져야만, 나머지 다섯 엉겨 붙은 자리도 뽑힌 한 감관을 따라 원만하게 벗겨지느니라. 이것은 앞 경계를 따라 일으킨 지견이 아니므로, 밝음은 감관을 따르지 않고, 감관에 맡겨 밝음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여섯 감관이 서로 서로 융통하여 작용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네가 알다시피 이 법회 가운데 아나율타는 눈이 없어도 보고, 발난타용은 귀가 없어도 들으며, 긍가신녀는 코가 아닌 것으로 냄새를 맡고, 교범발제는 혀와 다른 것으로 맛을 알며, 또 순야다신은 몸이 없어도 촉감이 있는데, 여래가 광명 가운데 비춰서 잠깐 나타나게 하였을 뿐, 이미 바람의 성질이니, 그 몸은 원래 없느니라.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으로 고요한 경지를 얻은 성문들 가운데 이 법회의 마하가섭과 같은 경우는, 뜻 감관을 멸한지 오래 되었으나, 마음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도 뚜렷이 밝혀서 분별하느니라.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관을 뚜렷이 뽑아 버린다면, 안으로 밝게 빛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뜬 경계와 물질 세간의 온갖 변화의 모양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이 생각을 따라 더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화하리라.
아난아, 세상 사람이 보는 작용을 눈에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서 어두운 모양이 앞에 나타나면, 여섯 감관이 캄캄하여 머리와 발도 서로 캄캄하지만, 저 사람이 손으로 몸 둘레를 더듬으면,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머리와 발을 단번에 가려내서 밝을 때와 한가지로 깨달아 아느니라. 인연경계를 보는 것이 밝음 때문이라 하여 어두울 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밝지 않아도 스스로 밝게 아는 작용이 생긴다면, 온갖 어두운 모양이 그 아는 작용을 영원히 어둡게 할 수 없으리라. 이렇게 감관과 경계가 이미 소멸해버린다면, 어찌 깨달음의 밝음이 원만한 미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행자리의 깨닫는 마음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과자리의 명목과 상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위 가운데 보리와 열반과 진여와 불성과 암마라식과 공여래장과 대원경지의 일곱 가지 이름은, 명칭은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청정하고 원만하여 자체의 성품이 견고하니, 금강왕과 같이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보고 듣는 작용이 어둠과 밝음과 움직임과 고요함과 통함과 막힘을 떠나서는 끝내 자체가 없다고 하신다면, '생각하는 마음이 앞 경계를 떠나서는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끝내 단절되어 사라질 경계룰 가지고 수행자리의 원인을 삼아서 여래의 일곱 가지 영원불변한 결과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밝음과 어둠을 떠나서는 보는 작용이 끝내 공하다면, 마치 앞 경계가 없을 때는 생각 자체의 성품도 멸한다는 이치와 같으니, 앞뒤로 반복하여 자세히 추궁할지라도 본래 제 마음 자체도 제 마음의 소재도 없을 텐데, 무엇으로 원인을 세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여래께서 먼저 설하신 '고요하고 정밀하고 원만하고 영원하다'는 것도 진실한 말과 어긋나서 결국 쓸모없는 논리가 되어버릴 텐데, 어찌 여래를 '진실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겠습니까? 부디 큰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배우고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한갓 뒤바뀐 원인만 알 뿐, 눈앞의 뒤바뀐 실제를 참답게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오히려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지 못할까 염려되어 나는 이제 세속의 일들을 예로 들어 너의 의심을 없애 주리라.”

즉시 여래께서는 라후라에게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게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희들은 지금 이 소리가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종소리가 그치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도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 때 라후라는 또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었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이제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상태를 들린다 하고 어떤 상태를 들리지 않는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들린다 하고,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라후라에게 종을 치도록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조금 지나서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에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쳤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경우에 소리가 난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고 하며,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어째서 스스로 말을 교란하느냐?”
대중과 아난은 함께 부처님께 물었다.
“저희들이 지금 어째서 교란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들리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들린다 하고, 또 내가 너희들에게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소리가 난다고 하면서 '예, 들립니다. 소리가 납니다'라는 대답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이 교란이 아니고 무엇이냐?
아난아,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없으면 너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만일 참으로 영 듣지 못한다면, 듣는 성품이 이미 사라져서 마른 나무와 같을 텐데, 종을 다시 쳤을 때 소리가 나는 줄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나는 줄 알고 없어진 줄 아는 작용은 소리의 경계가 스스로 없기도 하고 나기도 할 뿐인데, 저 듣는 성품이 어떻게 네게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겠느냐? 또 참으로 듣는 작용이 아주 없다면, 무엇이 없어지는 줄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가 듣는 가운데 스스로 생기고 사라질지언정, 네가 소리의 생겨남과 소리의 사라짐을 듣는다고 해서, 너의 듣는 성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아니니라.
너는 오히려 뒤바뀌었으니 소리를 헷갈려 듣는 작용으로 여기고 영원을 단멸로 혼미한들 어찌 괴이한 일이겠느냐 만은, 끝내 마땅히 온갖 움직이고 조용함의 닫히고 막힘과 열리고 통함을 떠나서는 듣는 작용은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치 잠이 무거운 사람이 평상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그 집안 사람이 그가 자는 사이에 비단의 다듬이질을 하면서 방아를 찌면, 그 사람은 꿈속에서 절구질과 다듬이질 소리를 다른 물건의 소리로 여기고 북 소리든지 종소리로 들으면서, 꿈꾸는 동안에 스스로 '웬 종이 나무와 돌 소리를 내는 것일까'하고 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었을 때, 절구소리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꿈속에서 이 방아 찧는 소리를 북 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난아, 이 사람이 꿈속에서 어찌 고요하고 흔들리고 열리고 닫히고 통하고 막히는 경계를 기억하겠느냐? 그 형체는 비록 잠들었을지라도, 듣는 성품은 어둡지 않았느니라.
비록 네 형체가 스러지고 그 목숨이 옮겨서 사라진들, 이 성품이 어떻게 네게서 소멸되겠느냐?
모든 중생이 시작 없는 때부터 온갖 물체와 소리를 따라 생각을 좇아서 흘러 다니는 것은, 일찍이 성품이 맑고 묘하고 영원함을 깨닫지 못하여 영원한 진리를 따르지 않고 생기고 멸하는 작용을 좇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태어날 때마다 번뇌에 물들어 흘러 다니는 것이니라.
만일 생멸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지킨다면, 영원한 광명이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대상과 감관과 인식하는 마음은 즉시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모양은 티끌 번뇌이고, 인식하는 정은 때 번뇌이니라. 티끌 번뇌와 때 번뇌를 함께 멀리 벗어나면 너의 법안(法眼)은 바로 맑고 밝아질 텐데, 어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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