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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로 인해 잃는 것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것이나 가섭이 빙그레 미소지은 것도
모두가 교의 자취만 될뿐이지만,
마음으로 얻는 것이 있다면
세간의 거친말이나 사소한 이야기도
모두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이다.
是故, 若人 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麁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07}
나에게 한 마디 말이 있어,
생각이 끊어지고 인연있는 모든 것들을 잊게 한다.
우두커니 일 없이 앉아있으니
봄이 옴에 풀은 절로 푸르구나.
吾有一言 絕慮忘緣, 兀然 無事坐 春來 草自靑。

{08}
교문에서는 오로지 한마음 일심의 가르침을 전하고
선문에서는 오로지 깨달음 견성의 가르침을 전한다.
敎門 惟傳一心法, 禪門 惟傳見性法。

{09}
그러나
여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은
먼저 온갖 법들을 분별하고나서
이후 결국 공한 이치를 설하는데,
조사스님들께서 보이신 언구는
자취가 생각머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근원에서 드러난다.
然 諸佛說經 先 分別諸法 後說 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意地 理顯於心源。

{10}
모든 부처님은 활처럼 유연하게 설하시고
조사 스님들은 활줄처럼 곧바로 설하신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걸림없는 법은
바야흐로 근본의 한가지 맛으로 돌아가는데,
이 한가지 맛의 흔적마저도 떨쳐버려야
조사스님이 보이신 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말씀하셨다.
“<뜰앞의 잣나무> 같은 화두*는 용궁의 장경각에도 없다.”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 無礙之法 方歸一味, 拂此 一味之迹 方現 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 栢樹子 話 龍藏所未有底。 

{11}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진실된 가르침으로써
변치 않는 것과 인연 따라 변하는 것의 두 가지는
바로 각기 자성(근본 성품)과 심상(마음 상태)이며,
단박에 깨닫는 돈오와 점차 닦아가는 점수의 두 갈래 문은
바로 수행의 시작과 끝임을 제대로 알아야한다.
그러한 연후에 가르침의 의미까지 내려놓고
내 마음에 한 생각, 일념*만이 오롯이 현전하게 되어서
선지를 면밀하고도 면밀하게 참구*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니,
말하자면 육신을 벗어나서도 사는 길인 것이다.
故, 學者 先以 如實言敎, 委辨, 不變隨緣二義 是自心之 性相, 頓悟漸修兩門 是自行之 始終。
然後 放下敎義, 但將自心 現前一念, 叅詳禪旨則 必有所得 所謂 出身活路。 

 

공안公案과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란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줄임말로써, 공부안독은 본래 반드시 지켜야할 관공서의 법령을 말한다.
옛 스님들이 제자로 하여금 마음자리를 밝히는 기연을 열어준 사례들이 기록으로 남아, 후대 참선인들에게 공부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옛 스님들 간의 선문답을 참선수행자 개개인이 스스로 비추어 보아 밝게 통했는지 검증하는 지표로 삼았다. 즉 표준화된 선문답이 참선인들 스스로 점검하는 효과가 검증되자 정형화된 틀로 정리하여, 하나 하나를 고칙古則이라 했다.
하나의 공안에는 문답이 오가는 데, 그 가운데 핵심적인 말을 화두話頭라 하였다. 다시 말해 화두란 어떠한 공안이나 고칙의 내용을 함축하는 한 마디인 것이다.
잘 알려진 정전백수좌庭前柏樹子로 대변되는 공안을 통해 살펴보자
어느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선사가 답한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庭前柏樹子]”
이 문답의 전체 내용을 보고, 준비된 수행자는 문답 사이의 공백에서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 했을까?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왜 뜰 앞의 잣나무 일까? 뜰 앞의 잣나무? 잣나무?….’
이렇게 의문을 이어가다보면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머리를 다 읊기도 전에 의심이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의심은 일종의 감정처럼 이어져 한 덩어리 의정이 되면, 생활하는 중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화두 공부가 비로소 시작된다.
즉, 처음 화두를 들 때는 공안을 전부 되뇌이지만, 한번 의심이 일어나면 ‘뜰 앞의 잣나무’로 압축되고, 결국 “?” 물음표 하나가 남는다. 물음표 뒤로 화두와 공안이 미역줄기처럼 자동으로 달라붙는 것이다.
이것이 공안을 통해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일념一念

마음밭에 자란 온갖 번뇌 망상들을 베어버리는 것이 한 생각, 일념一念이다.
오직 의정만이 한결같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일념이다.
한 자락 의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 의정이 되고, 이것이 날카로운 검과 같아서 의정 이외의 모든 번뇌망상들을 베어버린다.

 

참구參究

비녀를 세 개 꽂은 여인이 인파에 뒤섞여 눈으로 분간하기 힘든 것, 그것을 참參이라 한다.
참구한다는 것은 가물가물 알 듯 말듯 한 그것을 알고자 몰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로 산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카드 결재와 개인정보까지 있는 휴대폰은 단순히 백만원짜리 단말기가 아니기에 가슴 졸이게 된다. 도대체 휴대폰이 어디있을까, 어디서 잊어버렸는지 더듬어 생각하느라 누가 말하는 소리도 귀에 스칠 뿐이고,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며 오직 휴대폰만을 간절히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참구’라 할 수 있다.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화두를 통해 잡힐듯 잡히지 않는 의심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일념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을 여쭈었는데, 왜 뜰앞의 잣나무라 하였을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 뜰앞의 잣나무? 정전백수좌? 왜? 왜?’
처음 화두를 공부하는 초학자는 이런 식으로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화두 생각이 간절하여 스물네시간 이어지면, 마침내 의정이 몰록 일어나 저절로 공부가 이어진다.
이 때 의심 없는 화두 참구는 망상놀음에 불과하고, 의심이 있으되 이어지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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