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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러한 도리는 비록 단박에 깨닫더라도
오랜 습기가 한번에 없어지지는 않는다. 
理雖頓悟 事非頓除。

{38}
음행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귀를 막고 소리 듣는 것과 같고,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을 다듬어서 향을 피우는 것과 같아서,
설령 지혜가 많다해도 모두 마구니의 길이 된다.
帶婬修禪 如蒸沙作飯, 帶殺修禪 如塞耳叫聲, 帶偸修禪 如漏巵求滿, 帶妄修禪 如刻糞爲香, 縱有多智 皆成魔道。

{39}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 계율에는 의지하지 않고,
몸과 입, 생각의 세 가지로 짓는 행위를 단속하지 않는다.
함부로 풀어져서 게을리 지내며,
남을 가벼이 업신여기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근본으로 여긴다.
無德之人 不依佛戒 不護三業 放逸懈怠 輕慢他人 較量是非 而爲根本。

{40}
만약 계를 수지하지 않으면, 
비루병에 걸린 여우 몸도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청정보리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若不持戒 尙不得 疥癩野干 之身, 況 淸淨菩提果 可冀乎。

{41}
생사를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과 모든 갈애를 끊어야 한다. 
欲脫生死 先斷貪欲 及諸愛渴。

{42}
걸림없이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으로 인해 생겨난다.
無礙淸淨慧 皆因禪定生。

{43}
마음이 정에 들면, 세간의 생멸하는 온갖 모습을 알 수 있다.
心在定則 能知 世間生滅諸相。

{44}
경계를 보아도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음을 불생이라 하는데
불생을 무념이라 하고, 한 생각도 꿈틀하지 않는 무념을 해탈이라 한다.
見境 心不起 名不生, 不生名無念 無念名解脫。

{45}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했다면, 이것 역시 참된 것이 아니다.
마음속 모든 것이 뿌리까지 고요해져야 
번뇌의 불꽃이 사라진 참된 열반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셨다.
온갖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적멸의 열반상이구나.
修道證滅 是亦非眞也, 心法本寂 乃眞滅也。
故曰,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46}
가난한 사람이 구걸하거든 능력껏 베풀어 주어라.
내 몸처럼 여기는 대비심이야말로 참된 보시이다.
貧人來乞 隨分施與, 同體大悲 是眞布施。

{47}
어떤 사람이 와서 해꼬지 해도
마음을 추스려모아서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분심을 일으키면 백만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
有人 來害 當自攝心 勿生嗔恨, 一念嗔心 起 百萬障門開。

{48}
만약 인욕행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若無忍行 萬行不成。

{49}
본래 진여자성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정진이다.
守本眞心 第一精進。

 


삼현삼요三玄三要

어느 날 임제 선사가 법상에 올라 삼현삼요에 대해 설한바 있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고, 각기 현문마다 반드시 삼요가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는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처럼 임제종에서 종지를 나타내는 수단 중 하나가 삼현삼요인데, 그렇다면 삼현삼요는 무엇인가.

1) 삼현

삼현이란 체중현, 구중현, 현중현을 말한다. 그 어떠한 구절의 말이나 나아가 침묵속에서는 체중현이나 구중현, 현중현 중 어느하나는 반드시 담아내고 있다.

① 체중현體中玄: 문장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현묘한 이치를 드러낸다.
예를들면 “마음은 청정하다”라는 구절처럼 언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체중현이라 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다.”와 같은 문장도 체중현이 갖춰진 것이다.

② 구중현句中玄: 구절과 구절을 통해 개념 자체를 무너뜨림으로 현묘한 이치를 드러낸다.
어느 학인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바른 뜻입니까?”
운문선사가 답했다.
“마른 똥막대기다.”
이와 같은 문답에서는 기존의 개념이나 알음알이가 모두 부정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귀결되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치 장씨가 술을 마셨는데 이씨가 취했다는 말과 같다.
이처럼 구중현은 구절과 구절사이에서 흔적이 남아 그것으로써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③ 현중현玄中玄: 구중현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서 현묘한 이치를 드러낸다.
선사가 법상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냥 내려오는 경우가 있다. 앉아있는 모습으로 진리를 드러내면서도, 그 이치는 어떠한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선가에서 말없이 전하는 교외별전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배고프면 밥먹고, 잠오면 눕는 것도 모두 현중현의 가르침이다. 알음알이로 건드릴 근거조차 남아 있지 않는 가르침인 것이다.

 

2) 삼요三要


임제 선사가 참선학자를 제접하는 방식을 삼요라 하는데, 삼현과 짝이된다.

① 조요照要: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뒤에 한다.
학인이 선사에게 법을 청하자 선사가 묻는다.
“어디서 왔는가?”
이에따른 학인의 답변을 보아서 그를 대한다.

② 용요用要: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뒤에 한다.
학인이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에 선사의 답은 학인의 근기에 따라 달라진다.
“있다.”고 답하기도 하고, “없다.”고 답하기도 한다.
이는 학인이 드러내는 작용에 따라 그대로 비추어주 듯 응대하는 것이다.

③ 동시오同時要: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
예컨데, 학인이 선사에게 질문하면 선사는 답한다. 주장자를 세워 들기도 하고, 허공을 가리키기도 한다.
“알겠는가?”
선사가 묻자 학인이 말없이 합장한다.
이렇게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오고가는 것이 동시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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