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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릇 참선을 배우는 이는
살아있는 활구*를 참구해야 하니,
죽어있는 사구*로 참구하지 말라.
大抵 學者 須叅活句 莫叅死句。

{13}
무릇 본래 참구하던 공안 위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가되,
암탉이 알을 품듯 
고양이 쥐를 잡아채듯 
굶주린 사람 밥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 마실물 찾듯
어린 아이 엄마찾듯 하면
반드시 사무치게 통하는 때가 온다.
凡 本叅 公案上 切心 做工夫, 如雞抱卵 如猫捕鼠 如飢思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 透徹之期。

{14}
참선에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니,
첫째는 크게 믿는 마음이요,
둘째는 크게 분한 마음이요,
셋째는 크게 의심하는 마음이다.
그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결국 망가진 물건이 된다.
叅禪, 須具 三要 一有 大信根 二有 大憤志 三有 大疑情。 苟闕其一 如 折足之鼎 終成廢器。

{15}
일상생활 가운데, 인연처에 응하면서도
다만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했을까?”
“어째서???”
라고 무자 화두를 들어야한다.
오나 가나 화두를 들고 들어,
오나 가나 의심하고 또 의심함에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의 길마저 사라져서,
아무런 맛조차 없어서
마음에 들어앉은 화두가 들끓어 답답하게 되는 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뚱이와 목숨까지 내던질 곳이며,
또한 이곳이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자리이다.
日用應緣處 只擧狗子無佛性話。 
擧來擧去 疑來疑去, 覺得 沒理路 沒義路 沒滋味, 心 頭熱悶時 便是 當人 放 身命處, 亦是 成佛 作祖底 基本也。

{16}
화두는
들어 일으키는 곳을 알아 맞히려 하지 말고
생각으로 헤아려서 어떤 경계도 바라지 말며
또한 깨닫기를 기다려서도 안된다.
생각할 수조차 없는 곳에 나아가면
생각하려해도 마음이 갈 곳이 없게된다.
마치 늙은 쥐가 소 뿔에 들어가면 곧 고꾸라져 끊어진 길을 보는 것과 같다.
또한
평소 좋다 별로다 따지고 드는 것이 식정인데
나고 죽음을 따라 변하는 것도 식정이며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도 역시 식정이니,
요즘 사람들은 이런 병통을 알지 못하고
좁은 소견에만 들어박혀 허우적거릴 뿐이다.
話頭不得擧起處承當 不得思量卜度 又不得將迷待悟。 
就不可思量處 思量心無所之. 如 老鼠入牛角 便見 倒斷也。 
又 尋常計較安排底 是識情, 隨生死 遷流底 是識情, 怕怖慞惶底 是識情, 今人不知是病 只管在裏許 頭出頭沒。

{17}
이 일은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이렇다 저렇다 묻지도 말라. 
주둥이를 꽂을 데가 없다해도
한 목숨 떼어놓고 한결같이 덤벼들면
몸뚱이째로 사무쳐 들어가리라. 
此事 如蚊子 上鐵牛, 便不問 如何若何。 
下嘴 不得處 棄命一攅 和身透入。

{18}
공부는 거문고 줄 고르는 방법처럼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애를쓰면 집착하게 되고, 놓치면 어리석음에 떨어지니
또렷또렷 성성역력하게 깨어있으면서 
찰나찰나 면면밀밀하게 빈틈없이하라. 
工夫 如調絃之法 緊緩得其中。 
勤則近執着 忘則落無明, 惺惺歷歷 密密綿綿。

{19}
공부를 지어감에
걸으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으면서도 앉는 줄 모르면,
이러한 때가 되어 팔만사천 마구니들이
눈, 귀, 코, 혀, 몸뚱이, 머리의 여섯개의 감각기관인
육근 문턱에서 빈틈을 엿보다가
마음따라 온갖 경계를 일으키니
마음이 일지 않으면 무슨 상관있겠는가.
工夫 到行不知行 坐不知坐, 當此之時 八萬四千魔軍 在六根門頭 伺候, 隨心 生設, 心若不起 爭如之何。

{20}
일어나는 마음이 천상의 마구니이며
일지않는 마음은 오온의 마구니이며
때론 일어났다 잦아들었다 하는 마음이 곧 번뇌의 마구니다.
그러나 우리 정법 가운데에는 그런 일들이 본래는 없다.
起心 是天魔, 不起心 是陰魔, 或起 或不起 是煩惱魔。 然 我正法中 本無 如是事。

{21}
공부가 충분히 두드려져서 한 조각을 이루면
금생에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악업에 끌려가지 않는다.
工夫 若打成一片 則縱今生透 不得, 眼光落地之時 不爲 惡業所牽。

{22}
무릇 참선하는 사람이
국가, 부모님, 스승님과 시주님의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돌아볼 줄 아는가?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거친 몸뚱이가
찰나 찰나 녹슬어 썩어감을 아는가?
사람 목숨이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음을 아는가?
살아오며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을 뵈었는가?
그리하여 위없는 가르침을 듣고 희유한 마음을 내었는가?
선방을 떠나지 않고 절개를 지켰는가?
주위 사람들과 한데 뭉쳐 잡담이나 하지는 않았는가?
시비를 일삼아 들쑤시고 다님을 절실히 경계했는가?
화두가 12시진 하루종일 또렷하여 어둡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과 말할 때에 끊어짐은 없는가?
무엇을 보고 듣고 깨우쳐 알게되는 때에도
화두가 타성일편으로 한 조각을 이루고 있는가?
자신을 돌이켜 관함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을 붙잡아 볼 만큼 공부가 되고 있는가?
이번 생에는 결정코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것인가?
일어서고 앉으며 편히 지낼 때 지옥 중생들의 고통을 떠올리는가?
이번에 받은 몸뚱이로 윤회를 벗어나겠는가?
세상의 온갖 팔풍*의 경계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사람이 일상생활중에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사람이 이른다.
“이 몸뚱이로 금생에 건지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건지겠는가.”

{23}
말만 배우는 무리들은
말해 줄 때는 깨친 듯 하다가
경계를 만나면 도로 헤메인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난 것이다.
大抵 叅禪者, 還知 四恩深厚麽, 還知 四大醜身 念念衰杇麽, 還知 人命在呼 吸麽, 生來 値遇佛祖麽, 及聞無上法 生希有心麽, 不離僧堂守節麽, 不與隣單雜話麽, 切忌皷扇是非麽, 話頭十二時中 明明不昧麽, 對人接話時 無間斷麽, 見聞覺知時 打成一片麽, 返觀 自己 捉敗佛祖麽, 今生決定 續佛慧命麽, 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麽, 此一報身 定脫輪廻麽, 當 八風境 心不動麽。
此是 叅禪人 日用中 點檢底道理,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24}
만일 생사를 대적하고자 한다면,
그 한 생각이란 놈을 ‘탁’ 깨뜨려 부숴버려야
비로소 생사를 요달할 수 있는 것이다.
學語之輩 說時似悟 對境還迷, 所謂 言行 相違者也。

{25}
그러나 일념이란 것도 탁 깨부순 다음에는
반드시 눈밝은 스승을 찾아 바른 안목인지 점검 받아야 한다.
若欲敵生死, 須得 這一念子 爆地一破 方了得生死 。

{26}
옛 어른이 이르셨다.
“그대의 안목이 바른 지가 중요할 뿐이지,
그대의 수행이 어디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古德云, 只貴子眼正 不貴汝行履處。

 

句와 사구死句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은?”
“뜰앞의 잣나무니라.”
라는 조사 스님의 문답에서 화두수행자는 ‘도대체 왜 뜰앞의 잣나무라 하셨을까?’하고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의심을 일으키라고 하는데, 의심을 일으키라는 말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고, 문답을 되뇌여 보아도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지 알수가 없다. 이치로 모색할 수 없고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않되며,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 참구의 시작이다.
다만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거듭 의심하는 것이 화두를 드는 바른 방법이다. 이처럼 도저히 방법을 모르니 갑갑하고 화도 나는 와중에 뜰 앞의 잣나무라는 구절을 앉으나 서나 골몰하는 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공부요, 바른 공부이다. 그것을 활구 참선이라 한다.
그렇게 없는 의심도 일으키며 하루종일 화두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의정이 몰록 나타난다. 의정은 뜨거운 화로가 되어 온갖 번뇌망상이 닿기도 전에 눈송이처럼 녹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활구 참선이다.
그러나 화두를 들어 의심을 하는 가운데, 알고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분석하며 생각을 전개해 가는 경우가 있다. 알음알이의 작용이 치성한 이들은 ‘오직 모를 뿐’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기도 전에 논리사고가 절로 전개된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들때에도, ‘달마는 초조요 서쪽에서 오신 까닭은 인도대륙에서 불교가 핍박받았기 때문이며, 실크로드를 따라….’ 이런식으로 논리를 붙여가는데, 이것을 옛 어른들은 죽은 참선, 즉 사구참선이라 했다.
용케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이 뜰앞의 잣나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야말로 마구니 소굴에 앉아 부처님 놀이하는 것이다.
화두를 들다가 제 아무리 기가막힌 생각이 떠오를지라도 말의 그림자가 남아있고, 분별의 기미가 스며있다. 언어와 생각과 사유가 담긴 참선에서는 알음알이의 작용일 뿐이다.
사구참선은 진정한 깨달음과 십만팔천리 멀리 있다.
사구 참선인의 깨달음은 깨달았다는 착각일 뿐이다.
활구와 사구의 구분은 처음 단계에서는 의심을 일으키느냐 의심을 일으키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진짜 공부로 들어가면 활구 참선과 사구 참선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의단이 독로하여 걸어도 걷는 줄 모르고 떨치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활구 참선에 비해 머리만 굴리는 사구 참선은 그야말로 죽은 참선인 것이다.

 


삼요三要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세가지가 있다. 그것을 화두 삼요라 한다.

 

1) 대신심大信心
화두 수행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그리하여 ‘오직 모를 뿐’으로 의심하라는 가르침을 무조건 믿고 그대로 따른다. 그러면 조사스님처럼 자신도 생사 윤회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다. 신심이 없다면 공부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2) 대분심大憤心
화두에 24시간 매진하지 못하고 망상과 번뇌에 끌려다니는 자신에 대한 분한 마음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두터운 업장과 습기에 대한 가슴뜨거운 참회이며, 찰나찰나 단속하겠다는 다짐이다. 화두를 놓치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왜 나의 마음은 망상경계에 끌려가는가? 이처럼 간단한것 조차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데에 대해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 꽉 쥐게 만드는 분한 마음이다. 분심이 추진력이 되어 공부의 힘을 더한다.

 

3) 대의심大疑心
없는 의심도 일으켜 의심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간절히 이어가면, 어느 순간 의심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러다 의정은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과도 같다. 하루 종일 화두를 떠올리고 잠이 들어서도 화두를 드는 꿈을 꿀 정도로 간절하게 이어지면, 몰록 의정의 일어나는 때가 온다.
의정이 한번 일어나면 밥을 먹어도, 말하는 가운데에도 의정이 계속 이어진다. 이 때에 찰나도 놓치지 않고 의정을 이어가다 보면, 어찌할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커져 의단이 독로하는 때가 온다. 떼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의단만이 남아, 먹어도 먹는 줄 모르고 걸어도 걷는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러야 참 공부인이라 할 수 있다.
대의심은 경계를 밀어붙이고, 마음의 바닦까지 꿰뚫어 생사를 부순다.

 


팔풍八風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여덟가지 경계를 말한다. 수행의 분상에서는 좋은 상황도 나쁜 상황도 없다. 좋은 상황에서도 나쁜 상황에서도 당면한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는지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오직 공부를 돕는 채찍삼아 이러한 경계에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하며 평등심을 유지해야 한다.
1) 이利: 내 뜻에 부합하는 이익된 경계
2) 쇄碎: 내 뜻과 반대되는 손실의 경계
3) 훼毁: 남들이 뒤에서 나를 비방하는 것
4) 예譽: 남들이 뒤에서 나를 칭찬하는 것
5) 칭稱: 남들이 면전에서 나를 칭찬하는 것
6) 기欺: 남들이 면전에서 나를 비방하는 것
7) 고苦: 몸과 마음이 괴로운 것
8) 락樂: 몸과 마음이 즐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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